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숲이 무성한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넘는다.

산중산담 2013. 8. 4. 23:20

숲이 무성한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넘는다.

 

계사년 8월 마지막 주인 8월 31일 토요일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설된 옛길인 계립령, 곧 하늘 재와 문경새재를 넘습니다. 여름의 막바지에 나라 안에서 가장 잘 정비된 길이자 역사가 깊은 길인 문경새재와 영남대로 옛길 중에서도 가장 원형이 그래도 남아 있는 관갑천 잔도와 고모산성과 미륵리 절터로 이어지는 하늘재(계립령)는 문화재청에서 명승지로 지정한 길입니다. 그 길에 얽힌 유래와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떠나는 이번 기행은 여름의 막바지와 가을을 첫머리를 가슴 깊히 호흡하는 그런 시간이 될 것입니다.

너무 좋은 길이라서 치마를 입고도 걸을 수 있는 길, 그 길을 걸으실 분의 참여를 바랍니다.

 

“길은 그리 길지 않지만 너무 아름다워서 천천히 오르고 싶은 이 길이 곧 계립령 하늘재다.

이 지역 사람들이 한티, 천티,마골령이라가도 부르는 계립령 즉 하늘재는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신라의 8대 임금인 아달라 왕 3년인 156년에 개척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립령鷄立嶺은 마골점 혹은 마목현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은 껍질 벗긴 삼대를 겨릅(사투리로는 지릅)이라고 하니, 그것을 한자로 옮기면서 음을 따면 계립(鷄立)이 되고 뜻을 따면 마골(麻骨) 또는 마목(痲木)이 되었으리라 짐작하고 있다. 2년 뒤에 개척된 죽령과 더불어 오랫동안 백두대간을 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고려 후기에 지름길인 문경새재가 개척되었어도 조선시대까지 주요 교통로 활용되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 이화령과 죽령에 터널이 뚫리면서 그 기능을 잃고 말았다.

 

이 고개는 포졸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있는 새재를 떳떳이 통과할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나 보부상들, 그리고 길을 더럽히는 말이나 소를 동반한 사람들이 넘는 눈물고개였다. 소설가 김주영은 『객주(客主)』에서 “문경읍에서 여주목 고개를 올라서서 대의산 자락을 오른쪽으로 끼고 여우목을 지나 중평리 계곡을 거쳐 포암산 중턱인 하늘재를 넘어 수안보에 이르는 험로가 바로 이곳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고개 마루를 넘어서면서 충청도 땅에서 경상도 땅인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길은 포장도로다. 이곳 관음리 일대에는 관음리마애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 136호인 문경관음리석불입상을 비롯한 여러 점의 문화유산들과 함께 아름다운 옛 지명들이 남아 있다.“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에서

 

“조선시대 영남지역의 사대부들이 서울로 가던 길이 세 개가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경주와 영천 안동영주 풍기를 거쳐 죽령 넘어 서울로 가던 길이 열닷새 길이었고, 양산,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낙동나루를 거쳐 문경새재 넘어 가는 열나흘 길이었다. 마지막이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청주로 해서 가는 길이 열엿새 길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르거나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았고,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의 새재를 넘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난다

노다 가세 노다 가세 저 달이 떴다지도록 노다나 가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며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

 

아리 아이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진도 아리랑 속에 나오는 칠천만 우리민족의 노래아리랑 가락을 부르며 넘는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다.

 

문경새재가 있는 문경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신라, 백제의 세력이 각축전을 벌인 전략적 요충지였다.“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에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면서도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 문경새재와 하늘재를 걷고자 하는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