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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일곱 번 째

산중산담 2014. 9. 19. 23:03

서해안을 걷는다. 일곱 번 째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에서 태안 안흥항까지,

 

 

서해안 걷기 일곱 번 째가 원래 일정대로 8월의 네 번째 주말에 실시됩니다. 나라 안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 중위 한 곳인 태안의 안면도 끝자락에서부터 시작되어 태안군 근홍면의 안흥곶까지 이어지는 일곱 번째 여정에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꽃지, 몽금포를 비롯한 수많은 해수욕장과 나라 안에서도 이름난 소나무 숲이 울창한 태안의 바닷길을 걸어서 조선시대에 이름났던 안흥곶에 이를 것입니다.

소나무숲이 아름다운 태안

태안군 안면읍 안면도의 끝자락에 신야리新野里가 있다. 본래 서산군 안면소의 지역으로 새초가 많으므로 새들 또는 신야라고 불렀던 신야리 남쪽에 살 썩은 여라는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에 군량을 운반하던 배들이 마을 앞에 있는 암초에 부딪쳐서 파선하여 쌀이 많이 썩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서지는 신야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고, 국사봉은 구역말 남쪽에 있는 산으로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봉화불을 피우던 곳이다. 우서지 남쪽의 체다리골은 모양이 체 다리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고, 구억말 동남쪽에 있는 항개는 지형이 목처럼 길게 바다로 뻗어 들어가서 지은 이름이다. 부추밭의 머리 쪽에 되므로 줄밭버리라고 지은 마을을 지나면 꽃지해수욕장이 있는 승언리에 이른다. 바다 끝부분 병수안 마을은 예전에 군대가 수자리를 서던 곳이라 하고, 병수안 남쪽에 있는 마을이 둔두리 마을이다. 바다를 따라 올라가자 오션캐슬리조트에 이르고 바로 그 위쪽이 꽃지해수욕장이다. 잡화서남쪽에 있는 이 마을은 곶으로 되어 있어서 꽃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세계 꽃박람회와 꽃지해수욕장, 그리고 왕실의 숲으로 가꾸어지던 소나무 숲으로 알려져 있는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그렇게 된 연유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고려 인종이, 안흥정(安興亭)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격하는 곳이 되어 있고 또 암석의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鄭襲明)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팠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본조(本朝) 세조 때에 건의하는 자가 혹은 팔 만하다 하고 혹은 팔 수 없다 하여 세조가 안철손(安哲孫)을 보내어 시험하였던바,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여 대신에게 제하여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중지하고 말았다.”

그 뒤 조선 인조 때인 1638년에 삼남지역의 세곡을 실어 나르는 것이 불편하자 충청감사 김유金庾가 지금의 남면과 안면도 사이의 바닷길을 파서 안면도는 섬이 되었다. 섬이 되면서 안면도를 싸고도는 뱃길보다 약 200여리가 단축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운하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름을 백사수도白沙水道라고 불렀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1970년에 나라 안에서 세 번째로 섬과 육지를 잇는 연륙교(連陸橋)가 생기면서 배를 타지 않고도 육지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황해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려고 내닫고 있는 형국이라는 태안반도에 자리 잡은 태안군을 신숙주는 비옥한 지대로 통칭한다고 하였고, 남수문(南秀文)은 기문(記文)에서 태안군은 옛날 신라의 소태현(蘇泰縣)이었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재배하기에 알맞고, 또 어물과 소금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 즐겨 이 땅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 고을의 읍내가 멀리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니 이는 곧 해상의 구적(寇賊)들이 왕래 출몰하는 요충(要衝)”이라고 하였다. 태안군은 백화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읍을 중심으로 서해안을 따라 안면도로 이어져 있다.

신숙주가 기문에서 태안군이 충청도에 있어 해변의 요충지가 되어 국가에서 순성진(蓴城鎭)을 설치하고 지군사(知郡事)로 하여금 이를 지휘 관할하게 하고 있다. 군내의 토지가 비옥하여 화마(禾麻)가 풍부하며,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어 옥구(沃丘)로 일컬어 왔다고 기록하였던 것처럼 오래 전부터 태안서산 일대는 수산업이 발달하였던 곳이다.

태안군의 아래쪽에 자리 잡은 섬이 바로 안면도(安眠島)라는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인 안면도는 태안반도 중간에서 남쪽으로 뻗은 남면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유독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이곳 안면도에서 유명한 것이 바로 안면도 소나무 숲이다.

고려 때까지만 해도 안면도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이 제주도처럼 말을 기르는 목장이 되면서 사람들을 쫓아내고 말았다.

350여년 전만해도 사람이 살지 않았던 사람이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은 재목으로 쓸 나무를 심고 관리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시대에 이곳 안면도는 섬 전체가 왕실의 숲으로 지정되어 온통 소나무 숲이었다. 이곳 안면도에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나무를 심고 황월장봉산黃月長封山이라고 하여 왕실의 관을 짜는 데만 쓰기 위해 산지기 30여명쯤을 살도록 하였다. 그 뒤 자연스레 숨어 살아야 했던 사람들과 천재지변으로 땅을 잃은 사람들이 이 섬으로 들어오면서 마을들이 조성되었다.

한편 나무숲이 울창하고 기름진 땅이 많았기 때문에 태안지역에서 만들어진 속담이 도끼 하나만 있으면 잘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조선 후기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에 이곳 안면도의 소나무들이 많이 쓰여 졌고, 해방이후에도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이 벌채되었다.

소나무숲길이 울울창창한 승언리 일대의 야산에는 높이 20m쯤 되는 수령 100년의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2001년에는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에서 보전해야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 중의 하나인 소나무를 사명당四溟堂은 다음과 같이 예찬했다.

소나무 푸르구나. 초목의 군자로다. 눈서리 이겨내고 비오고 이슬 내린다 해도 웃음을 숨긴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이 없구나.! 겨울. 여름 항상 푸르구나. 소나무에 달이 오르면 잎 사이로 금모래를 체질하고 바람 불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이곳 안면읍 황도리는 적돌강積乭江(군 산천) 가운데 있는 섬이다. 산과 논이 없고, 오직 밭만 있어서 보리가 익으면 온 섬이 노란색으로 변한다. 이 섬에서 매년 정월 초 이틑 날과 사흘에 황도 풍어제를 올렸었다. “칠산 앞바다에 조기도 많고, 우리네 주머니에 돈도 많다. 순풍에 돛달고 만경창파로 떠나세. 돈 실러 가세. 연평바다로 에헤 어허쿵 에헤 어허쿵” <붕기 풍어타령>을 불렀던 뱃사람들의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안면도는 북쪽에 솟은 국사봉(107m)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안면도는 해안의 드나듦이 복잡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므로 간조 때에는 간석지가 넓게 펼쳐진다. (...)

이곳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안흥량安興梁 또는 난행량難行梁, 난행목이라고도 부르는 안흥항이 있다.

안흥항에서 신진도로 기는 이 목은 물결이 하도 험해서 배들이 파선이 잘되므로 난행목이라고 하였다. 그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안전하게 일어나라는 뜻으로 안흥이라고 이름 지은 이곳은 조세로 징수한 미곡과 면포 등을 해상으로 운송하는 항로 중에서 가장 물살이 세어 험난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선박의 잦은 조난사고 때문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후기까지 나라의 근심거리였다.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굴포掘浦해안에 창고를 설치하고자 고려 인종 때 창고를 짓기 시작하여 1412년인 태종 2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굴포의 선박출입이 어렵게 되자 육지에 창고를 설치하여 운송하자는 안이 채택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도 항상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안흥량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안흥항이 가장 역사가 깊은 항구로 발달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후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 사신들이 왕래하던 안흥항은 특히 중국의 산동 반도와 가까워서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지금도 서산시에서 가장 큰 항구인 이 항구는 인천과 군산항의 중계지인 안흥항의 뒷산에 있는 안흥산성은 십년이 넘게 걸려 쌓은 성이다.

안흥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948자 높이가 11자이며 소근포첨절제사所斤浦僉節制使가 군사를 나누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신장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충청도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