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답사기록 : 조선시대 위항문학의 산실 '송석원'의 흔적을 찾아서..
초보산꾼 답사기록 : 송석원과 벽수산장 그리고 옥류동 각자를 찾아가는 사진 답사기
언제 : 2022년 3월 12일 토요일
누구랑 : 초보산꾼
어딜 : 종로구 옥인동 옥류동 계곡 답사를 겸해서..
종로보건소 옆 담장 ~ 송석원터 ~ 벽수산장 흔적 ~ 송석원 각자 ~ 옥류동 각자
역사의 주인의 바뀐 옥류동.. 송석원松石園 터와 벽수산장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47번지 일대를 부르는 지명이다. 중인 계층을 중심으로 위항 문학 운동이 일었는데, 옥류동 계곡에 천수경이 송석원이라는 집을 짓고 살면서 그를 중심으로 열린 옥계시사 또는 송석원시사가 널리 알려졌다. 송석원시사의 부흥을 계기로 이 일대의 지명은 옥류동 계곡을 말하는 옥계(玉溪) 대신 송석원이라 불리게 되었다.
천수경 사후 송석원의 주인은 여러 차례 바뀌었는데, 장동 김씨라 불린 신 안동 김씨와 여흥 민씨를 거쳐 1910년경에 윤덕영이 송석원 터에 프랑스풍 건물인 양관(洋館)이 중심이 된 벽수산장(碧樹山莊)이라는 저택을 지었다.
자료 : 송석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종로구 보건소(종로구 자하문로19길 36)와 공공 건축상을 받은 상촌재 사잇길로 진행하면..
경찰청 사이버 수사대 건물앞 벽면에 조선시대 위항문학의 산실 "송석원의 문인들" 안내문이 있다..
먼저 군인 아파트 정문에서 보았던 자수궁터에서 유물들이 나왔다는 안내문..
안내문으로 보아 경찰청 앞에서 부터 봐야 할 듯..
위항인의 고향..
도로점용허가증..
위항문학의 발전
차좌일의 통곡
조수삼의 시..
옥계사 십이승
문화와 예술의 발신지..
위항문학의 발상지..
벽수산장은 양관으로 유명하였으나 이는 화재로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 건물로는 서용택 가옥과 박노수 가옥이 있다. 그 밖에 벽수산장 정문 기둥 4개 중 3개가 옥인동 47-27번지와 47-33번지 앞에 각각 1개, 2개 남아 있다. 옥인동 62번지 소재 건물 동쪽에는 벽수산장의 벽돌담과 아치 흔적이 남아 있다. 벽수산장의 화재 이후 부재를 가져다가 집을 짓는 주민들도 있었는데, 그 중 하나로 어느 집에는 태극 무늬가 그려진 돌계단 난간이 남아 있다. 정문의 기둥을 축소하여 제작한 석재나, 난간이나 정원에 쓰였을 돌을 가져다 둔 집도 있다.
자료 : 송석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다시 필운대로로 나와..
인왕 부동산 앞에 위항문학의 발생을 알리는 송석원터 표석이 있고.. 부동산 건물 뒤에 벽수산장 정문 흔적이 남아 있다.
위항문학의 꽃을 피웠던 옥계동계곡 답사기는 https://blog.daum.net/kmhcshh/5682 초보산꾼
부동산 건물뒤 청운동 화실 골목으로 들어가면..
정문의 흔적.. 이 정문을 들어서서 골목으로 보이는 인왕산 아래까지 벽수산장터였다는.. 자료 : 청운초등40회 | 벽수산장 정문 - Daum 카페
옥류동 계곡 역사는 장동김씨에 이어 위항문학이 꽃피웠다가 일제 시대 다시 친일파 윤덕영이 차지했던 곳이리라..
옥인동 47-27번지와 47-33번지 앞의 흔적들..
자수정터였다는 군인아파트 정문.. 군인아파트 뒤가 방금 답사했던 종로구 보건소 이다.
군인아파트 좌측에 있는 세종아파트 앞에서 본 고개방향.. 옥류동 각자 1차 답사시 저 고개로 해서 서울교회로 갔었다..
석교(石橋) : 옥인동 47-144번지(필운대로9길 8)앞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벽수산장으로 들어가던 옥류동 쪽 물길을 건너던 다리로, 오홍교(五虹橋)라고도 하였는데, 그 난간석의 일부 부재가 옥인동 56번지 안에 남아 있다.
자료 : 위키백과 옥류동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세종아파트(옥인동 56번지) 건물 안에 있는 주차장에 들어가 보면 옥류동 계곡에 있었다는 다리인 석교 부재가 남아 있다.
세종아파트에서 석교터(필운대로9길8)까지 이어지는 필우대로9길
벽수산장 양관(洋館)은 1935년에 완공되었고, 1954년 6월부터 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언커크) 본부가 입주하여 사용하였기에 1970년대 후반에 고급 주택지로 개발되면서 필운대로9길은 ‘언커크’가 발음이 변한 말인 ‘엉컹크길’로 불리게 되었다.. 송석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처음 서촌을 답사할 때는 이 길이 '엉컹크길'인줄 몰랐었다는.. 집이 거의 없었을 때는 양관만 보였을 터.. 사진 자료 : 초보산꾼
송석원터가 있었던 갈림길.. 좌측 계단위에 벽수산장 흔적이 남아 있고 옥류동 계곡인 우측으로 가면 송선원터 각자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부속건물 2개중 서용택 가옥인데 윤덕영의 소실이 살던 집으로 알려졌고 입구에 흔적이 남아 있다..
옥인동 서용택 가(옥인동 서용택가(玉仁洞 徐龍澤 家): 옥인동 47-133번지에 소재하는 한옥으로,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23호로 지정되었으나 해제되었다. 벽수산장의 부속 건물이었다.
청운효자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자료 : 초보산꾼.. 현재는 철거된 1차답사시 내외주가라는 집이 있었는데.. 대문 틈 사이로 볼 수 있었다는..
송석원 각자 우측 옆에 벽수산장 각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후에 윤덕영의 별장이 된 듯 하고..
‘벽수산장’ 글씨는 ‘송석원’ 글씨 옆에 세로로 새겨졌다.
1817년 음력 4월 김정희는 송석원시사가 모이던 뒤편 바위에 가로로 ‘송석원(松石園)’ 각자를 새기고 그 옆에 ‘정축청화월소봉래서(丁丑淸和月小蓬萊書)’라고 관지를 달았다. 송석원 각자는 한 변의 길이가 4치인 정사각형으로 새겨졌다. 이 각자의 위치는 현재 불분명한데, 주민들은 각자가 옥인동 47-253번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자료 : 송석원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wikipedia.org)
웅벽을 만들면서 세면으로 덧칠을 하는 바람에 바위에 음각된 송석원 각자까지 사라졌다고.. 옥인동 47-253번지
송석원 각자와 옥류동 각자
김수항이 청휘각을 지은 지 꼭 100년 뒤 옥류동에 새바람이 불었다. 장동 김씨, 의령 남씨 등 권력 가문이 독차지했던 옥류동에 중인이 몰려들었다. 그 선두 주자는 옥계시사(옥류동 시모임) 또는 송석원시사(송석원 시모임)를 만들어 활동한 중인 문인 천수경, 장혼 등이었다. 옥계는 옥류동과 같은 뜻이며 옥류, 옥천, 옥동, 옥류천으로도 썼다. ‘송석원’(소나무와 돌 정원)은 천수경이 붙인 옥류동의 다른 이름이며, 그의 호이기도 하다.
송석원 세 글자는 이 시기 옥류동에서 중인이 장동 김씨나 사대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증거다. 마지막으로 청휘각을 소유했던 장동 김씨 김학진은 ‘일양정기’에서 이곳을 ‘옥류동 송석원’이라고 썼다. ‘옥류동’은 장동 김씨가 역사에 새긴 이름이고, ‘송석원’은 중인이 역사에 새긴 이름이다.
자료 : [제1369호][역사 속 공간] 사대부와 중인, 옥류동을 공유하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hani.co.kr)
송석원터에서.. 옥류동 각자는 좌측으로 그리고 양관으로 알려진 건물이나 가재우물터등의 흔적은 우측으로..
좌측으로 옥류동 각자를 찾아가는 길.. 호천재옆을 지나면 암반이 확실히 나타나고.. 암반 아래에 옥류동 각자가 있다..
1차 답사시는 비어 있는 집 뒤로 각자가 있어 철거하고 개방했으면 했었는데 다행히 현재는 철거되고 무슨 공사인지 하고 있고..
현재 공사중인 모습.. 그런데 각자 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가려놓아 보이지 않고.. 또 와야 하나?
1차 답사시 담벽 넘어로 손을 올려 어렵게 찍은 사진.. '옥'자만 확실히 보였었다.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고..
2019년 2월 서울시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360 집 뒤편 바위에서 ‘옥류동’(玉流洞)이란 각자(새긴 글씨)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각자는 조선시대 서인 노론의 지도자인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옥류동은 옥빛의 맑은 물이 흐르던 이 골짜기의 옛 이름이다. 이 각자는 이 일대의 오랜 소유자 집안이던 장동(신안동) 김씨 김학진의 <일양정기>(1913)에도 나오고 언론인 김영상이 쓴 ‘서울 6백년’ 연재 기사(1959년)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이 일대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서면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옥류동’ 글씨는 거의 60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자료 : [제1369호][역사 속 공간] 사대부와 중인, 옥류동을 공유하다 : 문화일반 : 문화 : 뉴스 : 한겨레21 (hani.co.kr)
이제 서울교회로 올라가는 길과 만나는 옥류동 각자 위로 올라오면 날이 개고 빛나는 집을 뜻하는 청휘각 안내문이 있다..
옥류동과 청휘각은 양반인 장동김씨가 만든 흔적이고 세월이 흐른뒤 중인이 중심이 된 송석원이 주인으로 자리했었다..
김수항은 1683~1684년 옥류동에 ‘육청헌’(여섯 그루 사철나무 집)이란 살림집을 마련했고, 1686년엔 샘 부근에 ‘청휘각’(날이 개고 빛나는 집)이란 정자를 지었다. 육청헌은 여섯 아들이 모두 성공하길 바란 집이고, 청휘각은 자신의 휴식 공간이었다. 자료 : 한겨레21 중에서..
옥류동 계곡 상류를 계속 따라오면.. '인왕산 숲길' 둘레길을 만나고..
잠시 우측으로 가면 위항문학 안내문이 있다.. 방금 올라온 옥류동 계곡에 이런 의미가 숨어 있다.
옥류동 계곡 상류 도로 위에 현위치 전망대가 나오고..
전망대에서 본 옥류동 각자 암반과 위로 서울교회가 보이고..
경복궁에서 시작하여 올라온 길이 거미줄처럼 보이고.. 화살표가 군인아파트로 옆에 있는 세종아파트 부근에 벽수산장 정문이 있는 곳이다..
벽수산장 정문을 들어서면 방금 답사한 송석원터까지에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을 비롯해 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것이다..
수성동계곡으로 넘어와.. 윤동주 하숙집 우측이 벽수산장의 연못이 있던 자리라고..
벽수산장의 외곽에는 수성동 계곡(옥류동천 본류)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모으는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 곧 방지(方池)가 있었다. 약 200평 규모로, 그 안에서 배를 타고 놀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누상동 1~3번지에 있었다. 자료 : 위키백과
현재 남아있는 벽수산장 부속건물 2개 중 하나였다는 박노수 가옥.. 1940년대에는 건물 뒤쪽에 양관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어서 벽수산장과 연결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