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답사.. 1차 ~ 3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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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늦가을 철원의 한탄강 물윗길을 걷는다.
2021년 11월 20일 토요일에 한탄강 변에 자리 잡은 철원을 갑니다.
백마고지와 월정역 그리고 노동당사, 도피안사를 거쳐 2021년 가을에 새롭게 선 보인 한탄강 물윗길, 곧 송대소에서 은하수교까지 이어지는 길을 걷고, 임꺽정의 자취가 서린 고석정과 순담, 그리고 한탄강 제일의 절경으러 국가 명승인 화적연으로 이어질 이번 여정에 참여 바랍니다.
그 쇠둘레의 땅 철원
조선시대에 철원도호부(鐵原都護府)가 있던 철원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건치연혁(建置沿革)’편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이다. 모율동비(毛乙冬非)라고도 한다. 신라의 경덕왕이 철성군(鐵城郡)이라고 고쳤다. 뒤에 궁예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의 옛 땅을 침략해 차지하고 송악군으로부터 와서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궁실을 지어 더할 수 없이 사치하게 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고 하였다. 고려 태조가 즉위하게 되어서는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을 고치어 동주(東州)로 하였다. 충선왕 2년에 모든 목을 재정비할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낮추어 부로 하였고, 조선 태종 13년에 통례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다. 세종 16년에는 경기로부터 옮겨다가 본도에 예속시켰다.”
“함경도로 가는 길 수백 리, 안팎의 온 강산이 또렷이 내 눈 안에 들어오네.”이이만李頤晩의 기記에 실린 글이다. 산의 모양이 날아가는 학鶴의 형체인 금학산金鶴山(947)이 동송읍 뒤편에 자리 잡아 진산이 되고, ‘한국의 그랜드캐년 이라고 부르는 한탄강이 흐르며, 철원평야라는 강원도에서는 보기 드문 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 ’쇠 둘레‘의 땅 철원이다.
그런 연유로 경원선 열차가 다닐 때에 철원의 서남쪽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열차의 연기를 평강지방에 이르러 사라지기 전까지 한 시간이 넘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철원의 역사에서 궁예의 태봉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통일한국이 이루어진다면 맨 먼저 할 일이 휴전선 가운데에 있는 궁예도성을 발굴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 역사 속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용재총화(傭齋叢話)?는 “철원은 궁예가 차지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경성의 옛 터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한다. 지세가 막혀 강하(江河)는 조운이 어렵다”고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 땅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빼어난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궁왕 대궐 터에 오작이 지지괴니 천고흥망을 아는다 모르는다”라고 읊었다.
강원도 내에서 가장 넓은 평야를 자랑하는 철원평야는 비무장지대를 지나 평강고원으로 이어진다. 금학산․오성산․대성산․백암산․명성산 등이 있으며, 그 중에 명성산은 궁예가 왕건에게 쫓겨들어가 울었다는 데에서 연유한다.
철원평야를 휘감아 도는 강이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철원군 갈말면의 북쪽에서 남대천을 합친 뒤 갈말면과 어운면, 동송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흘러, 경기도 포천군 전곡읍을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가는 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탄강을 석체천(石切川)이라 기록하였다.
철의 삼각지
한편 철원 하면 떠오르는 것이 철의 삼각지․백마고지․아이스크림 고지․김일성고지 등의 싸움터이다. 한국전쟁 때에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인 이곳 비무장지대인 월정역에는 가다가 부서진 채 고철로 남아 있는 열차 한 량이 남아 있다.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이곳은 철원군과 김화군․평강군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를 들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철원 평야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에 벌어진 싸움은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 전투 전적비’에 적힌 대로 포탄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을 채울 만큼 치열했다. 높이가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에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4천 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십만 발이 넘었다고 한다. 백마고지에서 건너다보면 봉우리가 세 개 다정하게 서 있는 삼자매봉이 있고 철원평야 언저리에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울었다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도선국사가 세운 도피안사到彼岸寺가 있다. 도피안사는 속세를 넘어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 절집으로 이절에 국보 제 6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우리나라 철불의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인 철불이 있다. 신라 경덕왕 5년인 865년에 ‘철원지방의 향도香徒 1500여명이 결연結緣하여 조성했다.“ 라는 기록과 함께 <함통 6년 기유 정월 咸通 六年 己酉 正月>이라는 문구가 철불 뒷면에 남아 있어 그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원래 이 철불은 철원의 안양사安養寺에 봉안하려 했던 불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운반 도중 없어졌는데 나중에 찾고 보니 현재의 도피안사 자리에 안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이곳에 있기를 원한 불상의 뜻에 따라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고 철불을 모셨는데, 그가 세운 이 나라 800여개의 비보사찰중 하나라고 한다. 도피안사가 들어선 화개산은 물위에 떠 있는 연꽃의 연약한 모습이라 철불과 석탑으로 산세의 허약함을 보충하고 외부로부터 오는 침략에 대비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강원도>에서ㄶㄶㅎㄴ
첫 번째 떠나는 한탄강 도보 답사, 철원 정자연에서 고석정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특하고 기묘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한탄강을 도보로 답사합니다. 겸재 정선이 금강산 가는 길에 그림으로 그린 민통선 안에 있는 정자연에서부터 시작하여 한국의 나이아가라 라는 평을 받는 직탕폭포, 주상절리가 아름다운 송대소, 임꺽정의 자취가 서린 고석정을 지나 순담, 포천의 멍우리 협곡, 정선의 그림 속에 남아 있는 화적연과 비둘기나 폭포 등 매 순간 만나는 모든 풍경이 명승인 곳이 한탄강입니다.
한탄강변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천천히 걷게 될 한탄강 보도답사는 아우라지를 지나 전곡읍으로 이어집니다.
임진강으로 한탄강이 합류하는 연천군 전곡읍 도감포를 지나 황희 정승이 만년을 보낸 파주 반구정까지 이어질 한탄강과 임진강 기행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2022년 한국의 강기행, 첫 번째 떠나는 한탄강 기행 도보 답사 여정이 7월 15일(금)에서 7월 17일(일요일)까지 2박 3일간에 걸쳐 실시됩니다.
철원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아이스크림 고지, 김일성 고지 등의 싸움터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던 이곳 비무장지대 내 월정역에는 부서진 채 고철이 되어버린 열차 한 량이 남아 있다.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진 이곳은 철원군과 김화군·평강군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가 있다. 그중에서도 철원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 벌어진 싸움은 철원군 동송읍이 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전투전적비’에 적힌 대로 포탄 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 높이까지 채울 만큼 치열하였다. 해발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 4000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 진 포탄만 해도 30만 발이 넘었다.
백마고지에서 건너다보면 봉우리 세 개가 다정하게 서 있는 삼자매봉이 있고 철원평야 언저리에는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울었다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노동당사는 그날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고,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가 쓰인 부서진 열차가 휑하니 서 있다.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는 도선국사가 세운 도피안사到彼岸寺가 있다. 도피안사는 속세를 넘어 이상 세계에 도달한다는 의미를 지닌 절로, 이곳에 국보 제63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불이 있다.
철원평야를 휘감아 도는 강이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강원도 평강군 현내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철원군 갈말면 북쪽에서 남대천과 합쳐진 뒤 갈말읍과 어운면, 동송면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쪽으로 흘러, 경기도 포천군 전곡읍을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한탄강을 석체천石切川이라 기록하였는데, “양쪽 언덕의 석벽이 모두 계석체와 같아 ‘체천’이라 했다” 하였다. 또한 한탄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원이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어느 날 남쪽으로 내려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온 궁예가 이곳에 와서 마치 좀먹은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아하, 내 운명이 다했구나!” 하고 한탄 을 하여 그때부터 한탄강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또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한국전쟁 때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간 곳이라 해서 한탄강이라 불렀다는 슬픈 내력도 있다.
그 강물에 기대어 펼쳐진 철원평야는 분단이 되면서 심한 물 기근을 겪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북한이 철원평야로 들어오던 봉래호의 물줄기를 황해도 쪽으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 뒤 철원평야는 물이 모자라서 점차 황폐해지게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에 용화저수지와 하갈저수지 등이 건설되고 1970년대에는 둘레가 몇십 리에 이르는 토교저수지를 포함한 저수지 여러 개가 새로 만들어져 다시 물이 닿는 땅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물이 모자랐는데, 한탄강의 물 을 퍼올릴 수 있는 기계를 곳곳에 설치한 뒤부터 철원평야의 물 걱정은 줄어들었고, 지금은 기름진 땅이 되었다.
철원에 관한 《택리지》의 기록을 보자.
철원 고을이 비록 강원도에 딸렸으나 들판에 이루어진 고을로서 서쪽은 경기도 장단 과 경계가 맞닿는다. 땅은 메마르나 들이 크고 산이 낮아 평탄하고 밝고 환하며 두 강 안쪽에 위치하여 두메 속에 하나의 도회지다. 들 복판에 물이 깊고 벌레 먹은 듯한 검은 돌이 있는데 매우 이상스럽다.
한탄강변에는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현무암, 즉 곰보돌이 있다. 화산에서 흘러나온 용암이 굳어져 이루어진 이 돌은 가볍고 모양새가 좋아 맷돌이나 절구통을 만들거나 담을 쌓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구철원과 신철원으로 나뉜 철원의 명소는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일一 자 모양의 기암으로 이루어진 직탕폭포와 고석정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석정에 대한 기록이 이렇게 남아 있다.
고석정은 부의 동남쪽으로 30리 거리에 있다. 바윗돌들이 솟아서 동쪽으로 못물을 굽어본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의 진평왕과 고려의 충숙왕이 일찍이 이 정자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고려의 승려 무외의 기에 “철원군의 남쪽 1만여 보에 고석정이 있는데, 큰 바위가 우뚝 솟았으니 거의 300척이나 되고 둘레가 10여 장이나 된다.”라고 하였다. 바위를 기어 올라가면 굴이 하나 있는데 기어 들어가면 방과 같다. 층대에는 여남은 명이 앉을 만하다. 그 곁에 신라 진평왕이 남긴 비석이 있다.
다시 굴에서 나와 오르면 꼭대기가 울퉁불퉁하여 마치 둥근 단(壇)과 같다. 거친 이끼 가 자라서 자리를 펼친 듯하고, 푸른 솔이 둘러 있어 우산을 편 듯하다. 부딪치고 돌 구르는 소리가 마치 여러 가지 악기를 한꺼번에 연주하는 듯하다. 바위 아래에 이르면 물이 고여 못을 이루었는데, 굽어보면 두려워서 벌벌 떨리니 마치 그 속에 신령스러운 어떤 대상이 살고 있을 것 같다. 그 물이 서쪽으로 30리쯤 흘러 남쪽으로 이동한다. 앞뒤로는 모두 바위산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단풍나무와 녹나무, 소나무와 참나무가 그 위 에 뒤섞여 자란다. 맑고 시원하며 기묘하고 이상하니, 비록 글 잘 짓고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라도 비슷하게 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석정은 철원팔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로 꼽힌다. 한탄강 한복판에 10여 미터 높이의 거대한 기암이 우뚝 솟았는데, 그 양쪽으로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른다. 직탕폭포 아랫자락에는 승일교承日橋가 있는데, 승일교를 거쳐 흘러온 한탄강은 고석정이 있는 지역에서 강폭이 넓어진다. 그 옛날 있었다던 정자는 사라지고 없지만 대신 수수한 모양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고석정은 조선시대 최대의 도적이었던 임꺽정이 활동했던 곳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를 소재로 한 소설 속에 고석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한탄강을 따라 2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만나는 명소가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의 순담계곡이다. 이 계곡은 조선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몸이 허약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전국의 휴양지를 물색하고 있을 때 이 고장 출신인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유척기가 추천한 곳이다. 순담계곡은 계곡의 양편 언덕이 거대한 암반이라 마치 신들이 빚어놓은 조각품 같다. 말년을 의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 이라고 여긴 김관주는 이곳에 오자마자 거문고 모양의 연못을 만들어 순채蓴菜라는 나물을 제천 의림지에서 구해다 심고, 못 이름을 순담蓴潭이라고 지었다. 순채는 수련 모양의 약초로 봄이면 줄기에 흰색의 액체가 쌓이는데, 이것이 허리 아픈 병으로 인한 담에 특효약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강원도 편에서
두 번째 떠나는 한탄강 도보 답사, 포천시 용담교에서 창수면 아우라지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특하고 기묘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한탄강 도보답사가 두 번째로 이어집니다. 8월 넷째 주인 26일(그)에서 28일(일)요일 포천시 관인면 용담교에서부터 시작하여 문화재청에서 명승으로 지정한 멍우리협곡과 겸재 정선이 금강산 가는 길에 그림으로 그린 천하의 절경 화적연, 비둘기낭 폭포와 재인폭포를 비롯 1차 때 보지 못한 민통선 안의 월정역과 궁예도성을 답사할 예정입니니다.
한탄강변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천천히 걷게 될 한탄강 보도답사는 아우라지를 지나 전곡읍으로 이어집니다.
“겹겹이 산은 북쪽에 우뚝 솟아 있고, 한 줄기 강물이 남쪽으로 흐른다.”
지금은 포천시의 하나의 면이지만 조선 후기까지 현이었던 영평永平의 형승을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임成任이 남긴 글이다. 고구려 땅이었던 포천의 옛 이름은 마홀현馬忽縣이고 신라 때는 견성군堅城郡이라 불렀으며, 고려 초기에 포천으로 고쳤다. 조선 성종 때 문신 성임(成任)의 시에 “천충산은 북쪽에 우뚝하고, 한 줄기 물은 남쪽에서 흐른다”라고 하였던 포천은 1914년에 영평군과 합쳐 군이 되었다.
성산城山 관아의 북쪽 1리에 있다. 수원산水源山에서 뻗어나와 관아 뒤쪽의 주산主山을 이룬다. 다른 이름으로 반월산半月山이라고도 하는데, 반달처럼 생긴 산 모습 때문에 이런 이름을 얻었다.
《여지도서》에 실린 포천의 성산에 대한 글이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양사언楊士彦은 포천에 대한 다음의 시를 나겼다.
갈라 뉘어 온전히 고리 모양 이루고
수레바퀴 잘라 놓은 듯 반원 모양 이뤘네.
하늘을 바라보니 초승달 떠오르려 하더니
호수 너머로 초승달 물결에 잠기려 하네.
구름이 초승달을 놀리듯이 스쳐 지나가고
밤안개는 미인 눈썹 같은 초승달 가리네.
삼태성 앞에 안산案山이 기묘히 자리해
정승 감 길러내기에 안성맞춤인 듯하네.
양시언이 시를 쓰고 다음과 같이 풀어 썼다.
“예로부터 반달이 삼태성三台星을 얻으면 앞에 있는 안산의 땅 기운이 모여서 정승이 끊임없이 배출된다고 전해온다. 포천은 아주 작은 고을이지만 지금 많은 정승을 배출했으니 그 말이 입증되었다고 하겠다.”
지금은 사람들로부터 청성산靑城山이라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는 성산 말고도 여러 산들이 많은 곳이 포천이다. 군내면 구읍리와 용정리 경계에 있는 풍류산風流山은 삼태성처럼 생겨서 포천 구읍의 안산이 되기 때문에 포천에서 재상이 많이 난다는 산이다.
성임成任은 그의 시에서 포천을 다음과 같이 실었다. “고을이 작아서 송사하는 백성이 없고 전지가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이 든다.”
인조 때 영평과 포천으로 나뉘었고, 현종 때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포천군에 속하면서 하나의 면이 되었다.
드넓고 평평한 금빛 물결에 은빛 모래사장
구름 낀 골짜기 비오는 강에 산뜻한 갈매기.
경치 찾아 우연히 무릉도원의 길로 들어서니
고깃배를 보내어 골짜기를 나가게 말아다오.
한음 이덕형의 시 한편이 남아 있는 이곳 영평의 처음 이름인 양골이란 뜻은 ‘산골’, 즉 ‘산 속의 고을’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지역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 유역의 산간분지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포천과 평강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발달했으며, 한탄강을 따라서 마전과 적성 그리고 파주를 지나 바다와 연결되었다. 영평에는 영평천이 있는데 포천군 이동면 광덕산에서 발원하여 영평팔경의 하나인 선유담을 이루고 백운동 계곡을 받아들인 뒤 청산면 궁평리에서 한탄강과 합류하는 길이가 40킬로미터에 이르는 천이다.
연천지방을 연결하던 국도와 철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경기, 강원, 함경도 사람들이 서울로 오고 갈 때 이용하던 나루터가 이곳에 있던 아우라지 나루터였다. 아우라지라는 이름은 한탄강과 영평천이 이곳에서 ‘아우러진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영평현에는 살여울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하나는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포천 경계에서 나와 고을 남쪽에서 합류한다. 그리고 곧은 여울直灘이 있다.
신정일의 <신택리지, 경기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한탄강이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연천군 전곡읍 도감포를 지나 황희 정승이 만년을 보낸 파주 반구정까지 이어질 한탄강과 임진강 기행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세 번째 떠나는 한탄강 도보 답사, 포천시 운산전망대 부근에서 전곡 선사유적지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독특하고 기묘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한탄강 도보답사가 세 번째로 이어집니다. 9월 넷째 주인 23일(금요일)에서 25일(일)요일 포천의 운산 전망대 부근에서 시작하여 아우라지 나루터와 연천군 전곡읍 일대를 흐르는 구절양장 한탄강의 비경을 답사할 예정입니다.
한탄강변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며 천천히 걷게 될 한탄강 보도답사는 아우라지를 지나 전곡읍으로 이어집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평현‘ ‘형승‘조에 “천층 산은 우뚝하고 한줄기 물은 남으로 흐른다.” 라고 실려 있는 영평을 두고 성임이라는 사람은“고을이 작아서 송사하는 백성이 없고, 전지가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이 든다.”고 하였다.
영평현은 현재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과 일동 이동. 영북면 지역에 자리 잡은 조선시대의 현이었다. 본래 고구려 때 양골현梁骨縣이었던 영평현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에 소속되어 있다가 광개토대왕 이후에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신라 경덕왕 때 신라의 영토가 도면서 동음洞陰으로 고치어 견성군(지금의 포천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현종 때는 철원에 예속되었다가 예종 때 감무를 설치하였다.
원종 때 위사공신 강윤소康允紹의 고향이라하여 영흥현령으로 승격시켰고, 공양왕 때 관할을 교주도에서 양광도로 옮겼다. 조선시대 태조 3년에 영평현으로 바뀌었고,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이곳에 경기 감영을 만들면서 포천과 합해서 대도호부가 되었다. 인조 때 영평과 포천으로 나뉘었고, 현종 때 군이 되었다가 1914년에 포천군에 속하면서 하나의 면이 되었다. 처음 이름인 양골이란 뜻은 ‘산골’ 즉 ‘산 속의 고을’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이 지역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 유역의 산간분지 지역에 자리 잡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포천과 평강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발달했으며, 한탄강을 따라서 마전과 적성 그리고 파주를 지나 바다와 연결되었다.
영평에는 영평천이 있는데 포천군 이동면 광덕산에서 발원하여 영평팔경의 하나인 선유담을 이루고 백운동 계곡을 받아들인 뒤 청산면 궁평리에서 한탄강과 합류하는 길이가 40킬로미터에 이르는 천이다.
연천지방을 연결하던 국도와 철길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경기, 강원, 함경도 사람들이 서울로 오고 갈 때 이용하던 나루터가 이곳에 있던 아우라지 나루터였다. 아우라지라는 이름은 한탄강과 영평천이 이곳에서 ‘아우러진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 영평현에는 살여울이 있는데, 물의 근원이 하나는 백운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포천 경계에서 나와 고을 남쪽에서 합류한다. 그리고 곧은 여울直灘이 있다.
이동면 노곡리의 이리너미 고개는 노곡리에서 영북면 산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관음산과 사향산 사이에 있으며 예전에 이리가 많았다고 한다. 도평리에는 백운동이 있는데, 백운동에 있는 선유담(仙遊潭)은 백운동에 있는 소로. 물이 아주 맑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신선이 목욕하며 놀았다 하여 영평 팔경(永平八景)의 하나로 이름이 나 있다.
영중면 금주리에 있는 청학동(靑鶴洞)은 영평 팔경중의 한곳으로 일동면으로부터 흘러내려온 물을 껴안듯이 서 있는 병풍처럼 생긴 절벽이다. 이 벼랑 낭떠러지에는 청학동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어떤 효자가 아버님의 시신을 모시고 이장을 하기 위해서 터를 잡고서 땅을 파기 위해 한 삽을 뜨는데, 그 속에서 청학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라가 그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영평팔경은 화적연(禾積淵). 창수면 오가리의 금수정(金水亭). 창수면 오가리에 있는 창옥병(蒼玉屛). 영중면 거사리에 있는 낙귀정지(樂歸亭址). 이동면 도평리에 있는 선유담(仙遊潭).일동면 수입리에 있는 와룡암(臥龍岩). 영중면 거사리에 있는 백로주(白鷺洲).와 청학동인데 영평팔경을 주제로 지은 의 노래가 있다.
화적에서 벼를 털어
창옥병에 넣어들고,
낙귀정으로 돌아드니
청학이 날아드네.
금수로 술을 빚어
와룡을 빗겨타고
백로는 황강하고
선유담이 예 아니냐.
연천을 흐르는 한탄강,
예전에는 산골짜기 사람들이라서 꾸밈없고, 순수하여 다스리기가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러 번 굶주림과 전염병을 겪은 뒤로 미풍양속이 매우 무너졌다.
《여지도서》 연천군 ‘풍속’ 조에 실린 글이다.
연천군의 고구려 때의 이름은 공목달현工木達縣이었다. 연천군이 마전군과 적성현 그리고 삭녕군의 대부분과 철원군의 일부를 받아들여 연천군으로 통합한 것은 1914년이다.
조선시대의 문신 홍귀달洪貴達은 연천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산은 첩첩이 돌아오고 물은 구불구불 흐르는데, 난간에 의지해 앉으니 눈이 훤하네. 책상머리에 문서 처리할 건 많은데, 산새 울음소리 정이 있는 듯하여라.
한탄강과 임진강이 흐르는 연천군에도 산이 적지 않다. 고대산․지장봉․보래산 등의 산 사이를 한탄강이 흐른다. 이러한 연천군의 지세를 보고 서거정은 다음과 같은 글을 지었다.
봄 진흙 미끄러워 말도 가기 어렵구나. 양주서 오는 길 높았다 낮았다 하네. 한탄선 이미 얼음 얇을까 겁냈는데, 여러 영을 바라보니 눈이 아직 그득하구나. 헌 모자 얇은 옷은 봄 추위 더하는데, 환정宦情 나그네 생각은 도리어 처량하구나.
아름답기로 소문난 한탄강이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연천군 전곡읍 도감포를 지나 황희 정승이 만년을 보낸 파주 반구정까지 이어질 한탄강과 임진강 기행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금강산 가는 길목인 월정역에서 ‘철마는 달리고 싶다’ 는 녹슨 기관차와 궁예도성 그리고 백마고지와 노동당사를 비롯 철원의 구석구석을 다 안다고 생각했었다.
어디 그뿐인가, 2005년 한탄강을 한 발 한 발 걸었었다.
그런데, 그때도 못 보았던 아름다운 경치인 칠만암이 한탄강에 있을 줄이야.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던 때 보았던 경치, 그래서 꿈결에서처럼 보았던
칠만암(七萬巖)이 자료룰 찾아보니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정자연, 송대소, 직탕폭포, 고석정 및 순담과 더불어 철원 지역의 한탄강을 대표하는 명승지였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양지리에 속한 곳으로
조선 광해군 때 철원 출신으로서 명나라 구원병의 좌영장으로 출정하여
후금 군대와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전사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이 청년 시절 무예를 닦던 곳이었다. 지금도 그 일대에는 김응하 장군의 용마에 얽힌 <김응하 장군의 용마>에 관한 전설이 전해진다.
칠만암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주변 경치가 마치 수만 개의 바위를
한곳에 모아 놓은 것처럼 기묘한 조화를 이루는 데서 유래되었다.
칠만암은 크기가 큰 화강암 바위들이 많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특징인데,
처음 보고 느낀 감상은 마치 해 금강산 같았다.
한탄강의 여러 화강암 지대의 화강암보다 더 뾰족하고 거칠고 투박한 것을 관찰할 수 있다.
화강암의 모양은 마치 급속히 냉각되어 기괴하게 생긴 현무암 같이 보이기도 한다.
칠만암 전체 화강암 군락의 크기는 약 300m에 달하며,
가장 큰 화강암은 약 50m에 달한다.
주변에 공룡의 발같이 생긴 기괴한 모양을 한 바위가 있는데,
그 넓이가 약 20m로 추정된다.
화강암은 현무암 용암이 넘치기 전 원래 한탄강 기저에 있던 것이
물과 바람에 침식되어 드러난 것이다.
가장 높은 화강암 바위에서 상류 쪽을 바라보면 비교적 확 트인
개활지 바닥에 갖가지 모양의 돌들이 깔려 있다.
대부분 화강암 지역이 그러하듯이 강 양쪽 절벽은 그리 경사가 급하지 않다.
화강암에 절리가 생긴 곳에는 돌단풍과 군데군데 짙은 녹색의 이끼도 뒤덮여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철원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한 인근 초등학교의 단골 소풍지가 칠마암이었고,
그래서 여름만 되면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더위를 피해 천렵을 하며 하루를 보내던 소문난 명소였다.
하지만 한국 전쟁 이후 DMZ와 민통선이 생기면서
출입 통제지역이 되어 아무도 접근할 수 없었다.
가자 아름다운 보석은 지금도 숨어 있어 찾기가 힘들다,
칠만암이 그랬다. 이제라도 칠만암을 볼 수 있었다는 것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다시 철원에 간다면, 날이 화창한 날이라면
칠만암을 찾아가 그곳의 경치를 보리라 마음먹는다.
그때까지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칠만암을,
한탄강의 순담에 들어선 잔도
고석정에서 한탄강을 따라 2킬로미터쯤 내려가면 만나는 명소가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의 순담계곡이다. 이 계곡은 조선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김관주가 몸이 허약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전국의 휴양지를 물색하고 있을 때 이 고장 출신인 조선 영조 때의 문신 유척기가 추천한 곳이다.
순담계곡은 계곡의 양편 언덕이 거대한 암반이라 마치 신들이 빚어놓은 조각품 같다. 말년을 의탁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여긴 김관주는 이곳에 오자마자 거문고 모양의 연못을 만들어 순채蓴菜라는 나물을 제천 의림지에서 구해다 심고, 못 이름을 순담蓴潭이라고 지었다. 순채는 수련 모양의 약초로 봄이면 줄기에 흰색의 액체가 쌓이는데, 이것이 허리 아픈 병으로 인한 담에 특효약이다.
이렇듯 아름다웠던 한탄강도 오늘날 댐이 생기고 래프팅을 비롯한 관광 개발이 진행되고 더더구나 잔도를 만들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얼마나 변해야 그 변화의 물결이 잦아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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