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대웅전을 보며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다.
조계사 대웅전을 보며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다.
서울의 인사동에서 조계사를 찾았다. 조계사의 대웅전의 근황을 알고 싶어서였다. 전라도 정읍 입암면 대훙리에 서 있던 건물이 어떤 사연을 품은 채 이곳 서울로 옮겨왔는지를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내일은 공주, 모레느 수원, 글피는 서을 하면서 기세좋게 올라갔던 전봉준이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도 패했다. 태인에서 동학군을 해산한 전봉준이 하룻밤을 보낸 집은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잇는 차치구의 집이었다. 이곳은 동학의 십대 접주 중의 한 사람이었고, 원평 태인전투 이후 그의 아들 경석이를 데리고 전봉준을 따라 순창 피노리까지 동행했던 차치구의 주무대가 있던 곳이었다. 차치구는 평민두령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차경석은 훗날 증산사상을 기반으로 민족종교 보천교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흥덕에서 관군에게 붙잡힌 차치구는 그 앞산에서 포살되었고 그때 15살이었던 차경석은 아버지의 시신을 업어다가 대흥리에 묻었다고 한다. 지금의 대흥리는 입암산과 갈재를 그윽히 바라보며 고창군 신림면으로 가는 길 옆에 있는 조용한 마을에 지나지 않지만, 1920년대에서 30년대 중반까지 이 나라의 경성 다음에 중요한 곳이었다고 한다.
1920년대 보천교 신도수가 조선총독부 집계로 무려 백칠십만 명을 웃돌았고, 보천교의 집계로는 7백에서 8백만을 넘었다는 통계가 나와 있는 걸 보면 그 무렵의 보천교의 교세가 어떠했는가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증산의 제자였고 보천교를 일으킨 차경석은 자기가 거처하던 입암면 대흥리를 오선위기五星歸垣의 명혈名穴이라고 했다. 즉 내장산은 五行의 火星에 속하고, 입암산은 土星으로 火生土가 되고 노령산맥으로 이어지는 한쪽자리에 자리 잡은 방장산은 金星이니 土生金이 되며, 순창 쌍치의 회문산은 水星이라 金生水가 되고, 두승산은 木星으로 水生木이 되니 완전한 五行相生의 형국을 이룬다고 풀이한 바 있다. 풍수지리학자 최창조 선생에 의하면 그러한 땅은 원래 풍수가에서 지고지귀한 땅으로 하늘이 내려주어야 얻을 수 있다고 인식하는 天下大地라고 했다.
보천교 중앙본부라고 쓰여진 낡은 소슬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옆문으로 들어선 그집은 눈이 내려도 쓸쓸했다. 마당에는 금새 내린 눈이 소복하고 인기척에 문을 열고 주인장께서 나오셨다. 차용남옹 올해 나이 74세인 그 노인이 동학의 십대접주 차치구의 손자였고, 차경석의 큰 아들이었다. 차용남옹은 듬직한 풍채답게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린 시절 유복했던 환경 덕분에 한학을 공부했던 덕에 주역과 한학에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주역은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대가라고 한다. 대전에 있는 과학기술원에서 주역을 특강한다는 차용남옹의 집에는 눈이 내리는 겨울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새배를 오는 사람, 공부를 하다가 의문이 나서 온 사람들 그리고 보천교도들 속에서 우리 일행 몇 사람만 딴 뜻을 가지고 온듯 했다. “오늘이 할아버지 기일이지요.” 그러면서 차용남옹은 “상 한 상 봐오게.” 젊은 청년에게 말씀하셨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정갈하게 한 상 내오신 그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들은 잔잔하지만 가슴 떨리는 그 역사를 들을 수 있었다.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 가셨지. 보천교 간부들을 총독부 관리들이 이간질시켰고, 조만식 선생이 이곳에서 체포되었어. 그때 이 곳에 ‘대성전’이라는 십일전 건물을 지었는데 십일전의 대들보를 만주 훈춘현 노령지방에서 가져온 재목을 썼었다네. 이 나라 반 만년 역사상 어느 왕조도 쓴 일이 없는 누른 기와를 올린 것은 중국의 천자궁을 그대로 본 뜬 존대의식이었다네. 그 십일전 건물이 얼마나 컸었는지 2층까지 합하면 백 86간이 되었다니 지금 경복궁 근정전의 두배 쯤이 되었을 것이네. 저 남쪽에 있는 입암산을 바라보고 지은 것이 아니라 등을 지고 세운 오좌지형이었다고 하니 이러한 좌향은 현세는 선천시대와 달리 운수가 뒤집혀 좌향도 정반대가 될 것이라고 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나중에야 들었네. 삼국시대이후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던 십일전이 아버님(차경석) 선화하신 1936년 5월 이후 일본 사람들에 의해 500원에 경매 당하여, 서울에 있는 조계사의 대웅전이 되고 말았지. 지금은 없어져 버린 전주 역사가 이곳에서 뜯어다 지은 건물이었다고 하니, 그 교세가 어떠 했겠는가. 신도들이 수저 하나씩을 모아 1만 팔천근의 대종을 만을었는데 직경이 8척에 높이가 십이척이었다네. 그 대종을 동정각에 걸어 놓고 아침, 점심, 저녁에 세번 각기 72번씩 타종을 하면 먼 지평선 너머 이리 시내까지 들렸다고도 전해지는데, 그 커다란 종은 해체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지. 아버님은 평생 비단옷을 입지 않으셨고, 신출귀몰하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그 소리는 아버님을 못잡으니까 낮에는 새가 되고 밤에는 쥐가 되어 도망갔다고 총독부 관리들이 거짓보고를 했다지.”
조만식과 이상재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고, 아버지와 그들이 한방에서 며칠씩 쉬어가곤 했다는 그의 말은 대체로 사실이었다.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 날 그 방에서 들었던 가슴 아픈 그 이야기들을 어떻게 다 기록하랴. 훗날 밤을 새워 그 이야기를 들으리라. 우리가 그 방을 나오자,
“저 방에서 전봉준이 조부님과 그 마지막 밤을 지냈지”하고 쓸쓸한 뒷말을 남긴다.
눈 내리는 겨울 몇 채의 퇴락해 가는 기와집에서 우리들이 보천교의 위세당당했던 전성기를 기억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경상도 함안 일대와 전라도 고흥일대에서 조상도 버리고 재산을 팔아 이곳 정읍땅으로 꾸역꾸역 몰려왔던 민중들의 절절한 삶을, 1990년 세기 말을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알기나 하랴. 증산 강일순이 세계의 배꼽이라고 명명했던,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 그곳으로 증산이 말한 것처럼 세계 열강의 모든 사람들이 남조선 뱃노래를 부르며 오는 날은 과연 있을 것인가.
그새 30여 년 전 1993년의 이야기다. 보천교의 십일전 건물이 만물은 가고 만물이 오는 그 이치에 따라서 서울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변모했고, 계절의 꽃인 연꽃 향기에 취해 있으니, 우리들 인간의 삶은 어떤 변화를 겪으며 어떻게 변모할 것인지,
2022년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