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떠나는 영산강 도보 답사, 죽산보에서 영산강 하구둑까지
세 번째 떠나는 영산강 도보 답사, 죽산보에서 영산강 하구둑까지
나주 정도전 유배지에서 마무리한 영산강 기행이 영산강의 죽산보에서 석관정과 마안의 아름다운 정자인 식영정을 지나 영산강 하구둑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2022년 세 번째 떠나는 영산강 삼백 오십 리 도보 답사 여정이 6월 24일(금)에서 5월 26일(일요일)까지 2박 3일간에 걸쳐 실시됩니다.
나주 반남 고분군, 장춘정, 기축옥사의 최대 피해자 중의 한 사람인 정개청을 모신 자산서원, 그리고 목포의 유달산과 목포일대의 문화유산을 답사할 영산강 마지막 기행에 팜여 바랍니다.
홍어는 톡 쏘는 맛이 특징인데, 그 맛은 코를 통해 곧장 올라와 뇌리를 스치는 암모니아 냄새라고 한다. 그 맛을 어떤 사람은 “역겨워야 완성되는 역설의 미학”이라고도 하는데, 그 맛이 만들어지는 것이 흑산도에서 이곳 영산포까지 오는 열흘이나 15일간의 뱃길이었다. 배에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 열흘정도의 시간에 자연발효가 되어 식힌 홍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영산포 ‘영산강 홍어’집을 운영하는 양치권(55세)씨의 말에 의하면 홍어는 암놈이 맛있고 비싸기 때문에 어부들은 잡자마자 수컷의 성기를 잘랐다고 한다 그래서 억울한 일로 싸울 때에 쓰는 말에 “만만한 것이 홍어좆이라더니 내가 홍어좆이냐”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알싸하고 톡 쏘는 맛이 일품인 흑산도 홍어는 그 맛이 부위마다 다르다. 미국의 작가인 허만 멜빌이〈백경〉을 쓰기 위해 포경선을 4년간을 타고나서 쓴 글에 의하면 고래고기중의 가장 맛이 뛰어난 부위가 혓바닥 고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홍어의 가장 맛있는 부위는 어느 곳일까?
날개 살은 광어 날개 살처럼 씹는 맛이 좋고, 뱃살 부위는 도톰하게 썰고, 몸통은 적당한 두께로 썰어야 좋다. 아가미 부위는 부들부들하면서도 묵직한 맛이 나는데, 하지만 홍어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건 코다. ‘일 코, 이 날개, 삼 꼬리, 사 살’이라고들 한다. 어떤 이는 애(간)를 최고로 친다. 그리고 홍어는 삼합으로 먹어야 한다. 삼은 완성의 숫자다. 삼합이란 적당히 삭힌 홍어, 삶은 돼지고기, 잘 익은 김치가 만나는 것이다. 입은 하나인데, 맛은 세 가지가 충돌한다. 기름진 돼지고기와 매콤한 김치 때문에 처음에는 홍어의 꼬릿꼬릿한 냄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돼지고기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 홍어 특유의 퀴퀴한 향이 날카로운 여운으로 남는다. 겨울이면 홍어애탕이 최고다.(...)
이곳 죽산은 죽지와 신두의 아름을 따서 지어진 이름인데 돌개석 안쪽에 있는 화동마을에 장춘정藏春亭이 있다. 조선조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에 공이 컸던, 고흥 류충정이 세운 장춘정의 은행나무는 네 아름이나 되어 몇 백년은 되었음직한데 정자는 다시 세운 듯 세월의 때가 덜 묻어 있다. 왕곡면 송죽리 재창으로 건너가는 좌창 나루에는 배 한척 보이지 않고 화동 가운데에 있는 선소터는 배가 닿았던 곳이라 한다.(...)
숙종때 우의정을 지낸 허목이 쓴 정개청의 저서 <우득록> 발간 서문에 “남쪽 선비중 곤재를 추종했다고 옥에 가둔 자가 50여명이요, 귀양 보낸 자가 20여명이며 금고된 자가 4백여명이었다” 는 기록은 그를 따랐던 선비들이 얼마나 많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를 흠모했던 제자들은 지금의 전남 함평군 엄다면 엄다리 제동 마을에 1616년 6월 4일에 광해군의 윤허를 받아 정개청을 배향하고 후학을 기르기 위해 자산서원을 세웠다. 그 후 숙종은 사액을 내렸다. 사액서원은 국가에서 서책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한 서원으로 면세․면역의 특전을 입는 곳이다. 나주에서 태어난 정개청이 어린 시절을 보낸 제동마을은 영산강의 지류로서 하마다리가 놓여 있고 이 마을 앞까지 그 당시에는 바닷물이 출렁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자산서원은 당파싸움의 와중에서 서인이 집권하면 헐리고 남인이 집권하면 세우고 하면서 여섯 번을 헐리우고 여섯 번을 다시 지었다. 그러한 가운데 기축록에 의하면 효종 정유년에 정철의 후손인 송준길이 임금에게 아뢰어 개청의 사우를 헐고 그 고을에서 위판을 불사르고 그 재목과 기와는 무안현청의 말집을 만들기까지 했다.(...)
이곳 몽탄면 사창리가 내 기억 속에 각인된 것은 푸르디 푸르던 시절 철원에서 보낸 군복무 시절 만났던 우리 부대 고참 때문이다.
이름도 잊히지 않는다. 이상민, 그가 상병이었고 내가 일병이었던 시절 나는 우리 포대 내의 관측장교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고 있었다. 전봇대로 귀를 후비라면 후빌 수밖에 없던 시절 여러 사람의 연애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 피할 수 없는 졸병의 처지였다. 내가 편지를 보내는 몇 사람, 관측장교의 애인이나 몇 사람은 그래도 내 생각과 흡사한 점이 많아 마치 내 애인이나 파트너처럼 쓸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 직속 고참의 애인(구로공단에 근무하고 있었음)과 몇 사람의 상대방은 그렇지 않았다. 글씨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장력하고는 거리가 먼 고참의 상대방 여자에게 고민과 고민 끝에 편지를 써서 보낸다. 그 다음이 문제다. 곧바로 답장이 오면 괜찮지만 올 때가 됐는데도 안 올 땐 고참의 구박이 시작되었다. “이 새끼 네가 이 번 편지를 잘 못 썼기 때문에 편지가 안 오는 게 아냐?” 오지 않는 답장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구박 당한 당시를 회고해보면 랭보의 시 제목처럼 그 시절이 ‘지옥에서 보낸 한철’같다는 표현이 적절했으리라.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이렇게나마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군대생활 중에 여러 사람의 연애편지를 써준 것도 하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상민 고참과 연애편지의 악연만으로 맺어진 것만은 아니다. 가끔씩 전라남도 사투를 구사하며 에 씩 웃던 그 모습이 떠오르는 걸 보면 푸쉬킨의 시처럼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진다”는 말이나 “잊으려 할수록 더 생각난다”라는 말이 맞기는 맞는가 보다. 김옥수씨의 친구분에게 물어봐도 이상민이라는 사람은 기억을 못하겠단다. 아무래도 진즉 고향을 떠나간 모양이다.(...)
무안의 식영정務安息營亭은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夢灘面) 이산리(梨山里)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亭子)로 전남문화재자료 제237호로 지정되어 있다.
나주임씨 한호공파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는 식영정은 승문원(承文院) 우승지(右承旨)를 지낸 한호(閑好)가 말년에 여생을 보내려고 지은 정자이다. 그는 조선시대인 1610년(광해군 2)에 성균관 진사가 되고 161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여 영암군수, 진주목사, 남원부사 등을 지냈다. 이 정자는 그의 호인 한호처럼 한가로움을 좋아한다는 취지로 그림자가 잠깐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식영정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
드디어 강이 휘돌아간 해창마을에서 다리를 만난다. 이렇게 보이는 강은 돌아가다 보면 건널 수가 있지만 사람의 강 그 오묘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의 강은 건너갈 수도 들여다 볼 수도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드디어 다리를 건넌다. 저 멀리 보이는 죽산竹山마을과 죽산 남쪽에 있는 큰 섬인 대죽도에선 대나무가 많이 나서 화살용으로 나라에 바쳤다고 한다.
또한 안동마을에는 부엉이가 살았으며 해창마을에는 조선조 때 세금을 백미로 받아서 쌓아 두었다가 서울로 가져가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회룡 서쪽에 있는 하나울 마을에서 용포리 용계로 넘어가는 고개는 구슬재였다.
서편들, 배깟들, 암소머리, 물깻재, 구수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이름들은 언제까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남아 있을까?
하루종일 걷다보면 마지막 구간은 늘 이랬다. 산을 올라가거나 풀섶을 헤쳐 나가거나 해서 마지막 남은 진을 다 빼앗기 일쑤였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영산강 하구둑이 보이는 이 지점에서 한시간 남짓 돌아버렸으니 날은 저물고 갈 길은 아직도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