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의 관촉사와 쌍계사, 그리고 공주의 동학사와 공산성을 찾아가는 사월 초파일 삼사기행을 떠납니다.
관촉사가 있는 논산지방의 문화유산을 답사하다.
3월 5일 토요일 논산시 일대의 문화유산으 답사하고 탑정호 일대를 걷습니다.
논산시 연무읍에 후백제의 창업주인 견훤의 묘가 있고,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에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가 있다. 그리고 성삼문의 묘와 그림같이 아름다운 쌍계사, 그리고 백제의 장군 계백의 묘와 탑정호 출렁다리, 그리고 사계 김장생을 모신 돈암서원이 있다.
연산현과 은진현이 합해 논산이 된 논산지방의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답사가 2월 초에 실시된다.
관촉사에서 앞쪽을 바라보면 백제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패했던 황산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촉사 은진미륵의 왼쪽에 사적비가 있어서 이 미륵부처의 유래를 자세히 적어놓았는데,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고려시대인 969년(광종20)에 혜명대사(慧明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부처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27년만인 1006년(목종9)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찬란한 서기가 21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불공하러 오는 사람이 저자를 이루고 또한 송나라의 혜안대사(慧眼大師)가 이 빛을 따라 와서 예배한 후 말하기를 “중국 가주 땅에도 큰 부처가 있어서, 그 광명의 빛이 동시에 합해졌다”고 하여 관촉사 앞 내를 시진강(市津江)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부처를 조성하던 당시의 신비한 일이 적혀 있는데, 고려 광종 19년(968) 봄의 일이었다.
이 마을 사제촌(사다리)에 사는 한 여인이 반암산 서북쪽에서 나물을 뜯다가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가 본즉, 아이는 없고, 그곳에 큰 바위가 솟아 나오므로, 크게 놀라 곧 그 사위에게 말하니, 그 사위가 관장에게 보하매, 조정에서는 “이것은 큰 부처를 조성하라는 큰 길조라”하여 금강산에 있는 혜명대사를 명하여 그 솟아나온 바위로 허리 이하의 부분을 만들고 그 위 부분은 연산 우두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어서, 세우려고 별 연구를 다 하다여도 세울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천 ― 사다리내 ― 가에 나가 보니, 어린아이 둘이 “부처님을 모신다”고 하면서 밑 부분을 세운 후 모래를 쌓아 올려 덮고, 그 위에 가운데 부분을 올려놓고서 또 모래를 쌓은 후, 맨 위 부분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런 방식으로 이 부처를 세웠는데, 그 아이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 하였다.
부처 좌측에 있는 사적비에 의하면 37년 만에 부처가 완성되자 찬란한 서기(瑞氣)가 삼칠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찾아오는 사람들로 마치 시장 통처럼 북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머리의 화불(化佛)에서 내는 황금빛이 하도 밝아서 송나라의 지안대사가 그 빛을 따라 찾아와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관촉사(灌燭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논산의 성삼문 묘
한편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리 구리개 서쪽에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묘가 있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성삼문의 시체를 조선팔도에 조리돌리다가, 이곳을 지나던 길에 시체가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정하여 묘를 썼고, 그 곳을 성삼문의 송죽松竹 같은 충의를 사모한다는 뜻으로 사송思松재 또는 사송티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지도서>의 “성삼문총成三問塚)>에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다.
관아의 동쪽 20리, 구로현에 있다. 고을 사람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대대로 전해져 온다.
“옛날에 김한金僩이라는 사람이 이곳에다 똥을 누고 쌍계사에서 밤에 묵었다. 꿈에 건장한 사내가 와서 물었다.
“어찌해서 내 머무르는 곳을 더럽히느냐.?‘ 꿈에서 깨어 절의 스님에게 물어보니 대답했다.
“성 승지의 팔 다리 가운데 하나가 이곳에 묻혀 있니다.
“마침내 가서 파헤쳐 보니 뼈가 있었다. 이에 감싼 옷을 풀어 묻어주고 나무에 새겨서 표시했다.
그 뒤에 현감 정효성이 제문을 지어 제사 지냈다. 세월이 오래 지나서 쇠퇴해졌는데, 현감 이선장이 가서 찾아보았으나 자세한 곳을 찾지 못했다. 병진년에 현감 이도선이 본토박이가 가리키는 것에 따라서 봉분을 더 쌓았다. 고을의 선비 이단후가 의견을 내어 논산에 사당을 세웠다. 추인 양응춘과 함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갑오년(1714) 이후 설립된 것이라 하여 헐어버렸다.“
그곳에서 가까운 곳에 아름답고 고즈넉한 절 쌍계사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불명산 : 현동쪽에 33리에 있다. 산이 청산현 도솔산으로부터 꾸불꾸불 서쪽으로 흘러 본현으로 와서는 나란히 세 산이 되었으니 동쪽으로는 불명산 남쪽으로는 마야산 북쪽으로는 반야산이 있다.”
또한 ‘불우조’ 에 “쌍계사 : 불명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절에 관한 기록은 고려 말의 삼은(야은 길재, 목은 이색, 포은정 몽루) 중의 한 사람인 이색이 지은 사적기에 의하면 쌍계사는 창건주는 전하지 않고 극락전, 관음전, 선원, 동서당, 명월당, 백운당, 장경각, 향로전, 해외, 삼보, 요사 등이 있는 500~600여 칸의 대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은 불에 타 없어지고 고려 충숙왕 때의 대문장가 행촌 이암이 발원하여 중건하였지만 그 절 역시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 영조 때에 지어진 것이다. 숙종 42년(1716) 승려 자영이 2층으로 된 대웅전을 중창하였지만 영조12년 11월 화재로 전소된 것을 그 뒤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64년 9월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 집은 돌축대 위에 세워진 겹처마 팔각 다포집으로 굵은 느티나무 기둥은 배흘림기둥이다.
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짜돌리고 그 위에 외사출목 내사월목의 공포를 배열하였으며 그 위에 받혀진 보머리에는 사자와 연꽃모양을 새겼다.
대웅전 안에는 높은 우물 천장을 하고 있고 석가모니를 주불로 우측에 아미타여래 좌측에 약사여래불이 따로 따로 봉안되어 있는데 제각각 화려한 닫집으로 치장되어 있다.
닫집에는 연꽃봉우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나무학들이 날아갈 듯한 자세로 정면 5칸에 매달린 2개씩의 문살에는 국화, 연꽃, 모란, 무궁화 등의 꽃살무늬들이 섬세하게 조각된 후 채색되어 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공진회에서 이 꽃살무늬 문짝을 서울까지 가지고 가 출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절 대웅전의 오른쪽 세 번째 기둥은 굵은 칡덩쿨로 만든 것으로 노인들이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죽을 때까지 고통을 면하게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절 명부전의 문 양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가 없는 인왕상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칼을 들고 서있고 지장보살을 가운데 두고 명부시왕은 ‘어서오게’하고 손을 내밀 듯이 인자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양옆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목조상들이 서있다.
또한 웅진전에는 거조암의 나한들처럼 생각에 잠겨 턱을 괴고 있는 모습 마음씨 좋게 웃고 있는 모습 등 제각각의 모습의 나한상들이 들르는 사람을 맞고 있다.
이외에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돈암서원과 개태사를 찾아갈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논산의 관촉사와 쌍계사, 그리고 공주의 동학사와 공산성을 찾아가는 사월 초파일 삼사기행을 떠납니다.
2022년의 사월 초파일 논산의 아름다운 절 관촉사와 쌍계사,그리고 동학사가 있는 공주와 공산성으로 삼사三寺기행을 떠납니다.
코로나 19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 침체 된 마음에 오월의 푸른 산천과 격조 높은 우리나라 문화유산으로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2022년의 삼사기행을 실시합니다.
논산시 은진면 관촉리 반야산에 은진미륵으로 유명한 관촉사(灌燭寺)가 있는데, 관촉사에서 앞쪽을 바라보면 백제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패했던 황산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관촉사 은진미륵의 왼쪽에 사적비가 있어서 이 미륵부처의 유래를 자세히 적어놓았는데,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고려시대인 969년(광종20)에 혜명대사(慧明大師)가 왕명을 받들어 부처를 조성하기 시작하여 27년만인 1006년(목종9)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찬란한 서기가 21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불공하러 오는 사람이 저자를 이루고 또한 송나라의 혜안대사(慧眼大師)가 이 빛을 따라 와서 예배한 후 말하기를 “중국 가주 땅에도 큰 부처가 있어서, 그 광명의 빛이 동시에 합해졌다”고 하여 관촉사 앞 내를 시진강(市津江)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 부처를 조성하던 당시의 신비한 일이 적혀 있는데, 고려 광종 19년(968) 봄의 일이었다.
이 마을 사제촌(사다리)에 사는 한 여인이 반암산 서북쪽에서 나물을 뜯다가 아이 울음소리를 듣고 찾아가 본즉, 아이는 없고, 그곳에 큰 바위가 솟아 나오므로, 크게 놀라 곧 그 사위에게 말하니, 그 사위가 관장에게 보하매, 조정에서는 “이것은 큰 부처를 조성하라는 큰 길조라”하여 금강산에 있는 혜명대사를 명하여 그 솟아나온 바위로 허리 이하의 부분을 만들고 그 위 부분은 연산 우두촌에 있는 바위로 만들어서, 세우려고 별 연구를 다 하다여도 세울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천 ― 사다리내 ― 가에 나가 보니, 어린아이 둘이 “부처님을 모신다”고 하면서 밑 부분을 세운 후 모래를 쌓아 올려 덮고, 그 위에 가운데 부분을 올려놓고서 또 모래를 쌓은 후, 맨 위 부분을 올려놓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그런 방식으로 이 부처를 세웠는데, 그 아이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신이라 하였다.
부처 좌측에 있는 사적비에 의하면 37년 만에 부처가 완성되자 찬란한 서기(瑞氣)가 삼칠일 동안 천지에 가득하여 찾아오는 사람들로 마치 시장 통처럼 북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머리의 화불(化佛)에서 내는 황금빛이 하도 밝아서 송나라의 지안대사가 그 빛을 따라 찾아와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관촉사(灌燭寺)라고 지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는 관촉사석조 미륵보살 입상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가 55년 만인 2018년에 국보 제323호로 승격되었다.
이곳을 찾았던 고려의 문장가인 이색이 시 한 편을 남겼다.
“마읍馬邑(서천군 한산의 옛 지명) 동쪽 백 여리,
시진 고을 안 관촉사,
커다란 석상의 미륵불이 있으니
‘내 나간다.’ 하며 땅에서 솟았지,
눈처럼 흰 빛으로 우뚝 큰 들판 내려보니
농부 벼를 베어 힘닿는 대로 보시하네.
때때로 땀 흘려 임금과 신하 경계시키니,
어찌 말로만 전하랴. 역사에 실려 있는 걸,“
신라와, 궁예의 태봉국, 그리고 뒤를 이은 왕건의 고려와 함께 자웅을 겨루었던 후백제 견훤은 아들과의 불화로 인해 왕건에 항복하였고, 후백제는 결국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논산의 아름다운 절 쌍계사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불명산 : 현동쪽에 33리에 있다. 산이 청산현 도솔산으로부터 꾸불꾸불 서쪽으로 흘러 본현으로 와서는 나란히 세 산이 되었으니 동쪽으로는 불명산 남쪽으로는 마야산 북쪽으로는 반야산이 있다.” 또한 ‘불우조’ 에 “쌍계사 : 불명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절에 관한 기록은 고려 말의 삼은(야은 길재, 목은 이색, 포은정 몽루) 중의 한 사람인 이색이 지은 사적기에 의하면 쌍계사는 창건주는 전하지 않고 극락전, 관음전, 선원, 동서당, 명월당, 백운당, 장경각, 향로전, 해외, 삼보, 요사 등이 있는 500~600여 칸의 대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은 불에 타 없어지고 고려 충숙왕 때의 대문장가 행촌 이암이 발원하여 중건하였지만 그 절 역시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 영조 때에 지어진 것이다. 숙종 42년(1716) 승려 자영이 2층으로 된 대웅전을 중창하였지만 영조12년 11월 화재로 전소된 것을 그 뒤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64년 9월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 집은 돌축대 위에 세워진 겹처마 팔각 다포집으로 굵은 느티나무 기둥은 배흘림기둥이다. 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짜돌리고 그 위에 외사출목 내사월목의 공포를 배열하였으며 그 위에 받혀진 보머리에는 사자와 연꽃모양을 새겼다. 대웅전 안에는 높은 우물 천장을 하고 있고 석가모니를 주불로 우측에 아미타여래 좌측에 약사여래불이 따로 따로 봉안되어 있는데 제각각 화려한 닫집으로 치장되어 있다. 닫집에는 연꽃봉우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나무학들이 날아갈 듯한 자세로 정면 5칸에 매달린 2개씩의 문살에는 국화, 연꽃, 모란, 무궁화 등의 꽃살무늬들이 섬세하게 조각된 후 채색되어 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공진회에서 이 꽃살무늬 문짝을 서울까지 가지고 가 출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절 대웅전의 오른쪽 세 번째 기둥은 굵은 칡덩쿨로 만든 것으로 노인들이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죽을 때까지 고통을 면하게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절 명부전의 문 양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가 없는 인왕상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칼을 들고 서있고 지장보살을 가운데 두고 명부시왕은 ‘어서오게’하고 손을 내밀 듯이 인자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양옆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목조상들이 서있다. 또한 웅진전에는 거조암의 나한들처럼 생각에 잠겨 턱을 괴고 있는 모습 마음씨 좋게 웃고 있는 모습 등 제각각의 모습의 나한상들이 들르는 사람을 맞고 있다.
64년간 백제의 두번 째 도읍지였던 공주시에는 아름다운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비롯 문화유산들이 즐비하고, 백범 김구가 머물렀던 마곡사, 동학사, 갑사 등 불교문화재의 보고다. 동학농민혁명의 격전지인 우금치와 세세 천년을 흐르는 금강 변에 펼쳐진 이야기가 산재해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가 서린 동학사
1700년 이곳 동학사를 찾았던 송상기는 동학사 문루에 앉아 다음 같은 글을 남겼다.
처음 골짜기 어귀로 들어서자 한 줄기 시내가 바위와 숲 사이로부터 쏟아져 나오는데, 때로는 거세게 부딪쳐 가볍게 내뿜고 때로는 낮게 깔려 졸졸 흐른다. 물빛이 푸르러 허공 같고 바위 빛도 푸르고 해쓱하여 사랑할 만하다. 좌우로 단풍과 푸르른 솔이 점을 찍은 것처럼 띄엄띄엄 흩어져 있어 마치 그림과 같다. 절에 들어서는데 계룡의 산봉우리들이 땅을 뽑은 양 가득하고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이 쭉 늘어서 때로는 짐승이 웅크린 듯 때로는 사람이 서 있는 듯하다.
절이 뭇 봉우리 사이에 있는 데다 보이는 곳의 흐름이 좁고 험하여 절 앞의 물이며 바위가 더욱 아름답다. 거꾸로 매달린 것은 작은 폭포고 물이 빙 돌아나가는 곳은 맑은 못이다.
하지만 이렇듯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절 동학사를 두고 숙종 때의 학자였던 남하정은《동소집》에 이렇게 썼다.
아침에 동학사를 찾았다. 동학사는 북쪽 기슭에 있는 옛 절인데 양쪽 봉우리에 바위가 층층으로 뛰어나고 산이 깊어 골짜기가 많으며 소나무와 단풍나무와 칠절목이 많았다. 지금은 절이 절반쯤 무너지고 중이 6~명뿐인데 그나마 몹시 상하고 추레하여 산중의 옛일을 물으니, “왕실의 부역으로 피폐하여 우리들 가운데 한두 해 이상을 머무는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아! 누가 승려들은 번뇌가 없다고 일컬었던가?
남하정의 글을 읽다 보면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불합리하고 흥망성쇠가 어디나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여행자를 위한 도시 인문학, 공주, 부여>에서
사월 초파일 논산의 관촉사, 쌍계사, 그리고 공주의 동학사의 아름다움을 함께할 사람들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