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백두대간 산행기

대간 10구간 10차 : 황악산 구간 - 국제적인 바람잡이 미군의 속성을 보다

산중산담 2014. 9. 14. 14:56

 

3450온누리 산악회  백두대간 10차  우두령에서 추풍령까지

 

언제 : 갑오년(14년) 열매달  스물엿새 쇠날 밤  ~  스물이레 흙날 (무박2일) 
누구랑 : 대간5기 산우님들         

어딜 :  우두령 ~ 바람재 ~ 황악산 ~ 괘방령 ~ 가성산 ~ 추풍령

                           21.7 km (상황봉 대장님 공지내용)

                                                     (산행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이제 전국이 폭풍의 전야처럼 알게모르게 서서히 찾아오는 가을손님의 발걸음에

반팔은 이제 어색의 단계를 지나 긴팔에 살짝 가벼운 외투 하나 정도는 걸처야 하는

맘에 앞서 먼저 몸이 느끼는 가운데 감기환자 또한 늘어나고 있다

또 외곽으로 약간만 눈을 돌리면 누렇게 변해버린 벼이삭들의 황금물결이 

풍성한 가을의 잔치를 위한 축제의 장을 마련하고 거기에 억세의 하늘거림이 분위기를 띄우는

가을에 이미 접어든 대간길, 가을에 어울리는 이름 추풍령엔 어떤 사연들로 우릴 기다리고 있을까?

어서 대간길로 달려가보자. 사당에서 그리운 대간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10차 대간길 등로

 

 

대간을 처음 시작하고 철지난 철쭉밭에서 긴팔이 약간은 어색했는데

이제는 아홉수를 넘어 두자릿숫자인 열번째 대간길에는 오희려 반팔이 어색한 계절로 바뀌어 가고

지리산 덕유산을 넘어 구름도 잠시 쉬어 넘는다는 추풍령을 목표로 달려간다하니...

이러다 금방 중산제도 지내고 대간 졸업의 남은 숫자를 세어가면서..

어찌됐든 그날이야 가다보면 돌아 올 것이고 이번 열번째 대간길에는 어떤 사연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초보산꾼과 함께 떠나봅니다

 

산행기 주자료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351  프레시안

 

도착한 우두령 - 언제나 우두령은 소가 먼저 반긴다

牛頭領  720m  901번 지장도

이제는 동물생태통로가 만들어져 질매의 형상을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또 일제시대에는 주변이 금광개발로 그 당시로는 드물게 통행량이 많았던 고개였다.

소의 등에 수레를 끌기 위해 올려 묶는 기구가 "질매"(멍애의 방언)인데 질매같아 "질매재"라 했다는데,

행정 구역상 거창군에 속하는 우두령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우두령마을이 있다.

김천 구성면과 영동 상촌면을 잇는 고개인 우두령은 추풍령과 괘방령보다는 키가 훨씬 크다. 해발 720m에 이른다.

 

동물 생태 통로

우두령 주변은 황악산, 삼도봉, 석기봉, 민주지산, 각호산 등 1,000m가 넘는 높은 산들이 둘러싸 심산유곡을 이룬다.

우두령 기슭은 깊은 산골의 오지였다. 그래서 우두령은 궁벽한 통로인 것이다. 대동여지도도 우두령 주변의 지리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우두령이 얼마나 오지였길래 영동 상촌의 흥덕리라는 마을 이름이 ‘설보름 마을’이다. 설에 들어오면 보름에 나갈 정도로 오지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두령의 깊음은 전쟁 때 피난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고려 말 왜구의 노략질이 심할 때 임시 관아가 있었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중요 은신처였다.

우두령은 옛길의 원형이 대부분 남아 있다. 오지 덕을 본 셈이다. 

1592년 7월 17일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김면이 의병 2,000명을 매복시켜 왜군을 물리친 우두령 전투의 현장이기도 하다

 

삼각점이 있는 삼성산

삼성산(三聖山 985봉)  삼성암

산경표에는 "三聖山 - 黃潤南六十里"라고 나와 있다. 삼성산 아래에는 직지사 삼성암이 있다. 산 이름이 천덕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라말 고승인 도선국사가 지리산에 조성된 약사여래 삼불을 모실 명당을 물색하다 금오산과 수도산, 천덕산(삼성산)을 택한 후

약사암, 수도암, 삼성암을 각각 짓고 세 분 약사여래를 봉안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삼성암은 직지사의 말사로 현판에 "千德山 三聖庵"라 쓰여 있다.

 

유래를 알 수 없는 여정봉을 지나

 

바림재

바람재 810m

바람이 불 때면 사람이 날아갈듯 많이 분다 해서 바람재.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새로운 무전기의 교신 거리와 성능을 실험하기 위해 종종 찾는 곳이다.

50W 정도의 출력을 내는 무전기로도 일본과 교신이 될 만큼 전파가 잘 터지는 곳인 바람재는 과거 주한미군이 주둔하기도 했다.

자동차 2∼3대가 겨우 올라 설 수 있는 꼭대기까지 길을 낸 것도 그들이었다.

발을 들여놓기 곤란할 만큼 망가진 데다 쓰레기투성이가 된 콘크리트 방카를 유산으로 남겨놓기까지 했다.

그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 산을 올라와 몇 시간씩 머물고 돌아간다고 한다.

특히 미군이 개입하는 국제전쟁이 치러질 때면 봉우리에는 어김없이 미군들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유고 내전이 한창이던 때에는 아예 며칠씩 상주하기도 했다. 그들의 성능 좋은 무전기로 유럽까지 교신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바람재를 지나 이제 직지사를 품고 있는 황악산의 신선봉 갈림봉

바람재는 아마추어 무선사들만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종주해 본 산꾼들에게도 유명한 곳이다.

남으로 우두령에서 북으로 괘방령까지 긴 산길에서 유일하게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인 데다 목장까지 있어 산꾼들에게는 좋은 쉼터가 돼 온 탓이다.

해발 870m의 21만여 평의 목장은 1994년에 모습을 갖추었다.

겉으로 낭만적으로 보이기까지 하지만 목장에서 한국 축산업의 현주소를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목장에는 한 마리의 소도 없다.

마지막 14마리의 소까지 팔아치우면서, 이제 목장의 주인은 소가 아니라 흑염소다.

바람재에 있는 군사시설물을 철거하고 산림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20일 밝혔다.(2010년 언론보도)

 

황악산

황악산 1,111m. 황학산?

비록 '악(岳)' 자가 붙었긴 했지만 산세는 지극히 순한 육산이다. 그래서인지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황학산(黃鶴山)으로 표기돼 있다.

예로부터 학이 많이 찾아와 황학산(黃鶴山)으로 불렀다고 하며, 지도상에도 흔히 그렇게 표기되어 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여지도> <택리지> 같은 문헌 및 직지사의 현판에 '황악산'으로 적혀 있는 걸 보면 황학산은 분명 오기인 듯하다.
굳이 '岳'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자면, 북에서부터 내려오는 대간의 줄기가 속리산에서부터 이렇다 할 산을 솟구치지 못하던 차에

(속리산에서 황악산 사이에 1,000m가 넘는 산은 하나도 없다) 1,111m나 되는 산을 만나고 보니 당연히 그런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또한 이 산 이름의 첫 글자인 황(黃)은 오방색(五方色) 중 가운데를 나타내는 색인데, 옛 사람들도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명명했을 것 같다.

실제로 황악산은 삼면 바다를 기준으로 봤을 때 한가운데에 있다

 

황악산에서 단체사진 - 잡스님 작품

황악하면 岳소리나게 기암괴석이 솟아 있어야 하는데 민둥 흙산이라 요즘은 김천시 공식 홈페이지에는 "黃岳山" 대신 "黃鶴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바위보다는 鶴이 더 많고 모양이 부더럽고 아름다운 학에 더 가까워 붙여진 이라고 하는데... 앞 글에서 유래를 찾는게 더 설들력이 있는 것 같다

 

헬기장이 있는 곤천산 갈림길

곤천산 坤天山  1,032m         충북 영동군 매곡면 강진리

곤천산은 건천계곡(乾川溪谷)에 위치하며 영축사가 북쪽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건천계곡아래 건천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추해 봐야 할 듯하다.

 

헬기장에서 약간 내려와 마루금은 우측이다

 

경승지인 능여계곡이 가장 잘 관찰되는 전망암이 있는 백운봉

 

권력자들과 많은 인연을 안고 있는 직지사 방향

직지사

황악산(黃岳山)의 황자는 청(靑), 황(黃), 적(赤), 백(白), 흑(黑)의 5색(色) 중에서도 중앙색을 상징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황악산에 자리 잡은 직지사는 예로부터 해동(海東)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으뜸가는 가람이라는 뜻에서 동국제일가람(東國第一伽藍)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김천까지는 12km이고, 다시 김천에서 서울까지는 230km, 부산까지는 218km로서 남한의 중앙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신선봉 방향

신라 눌지왕 2년(418) 아도 화상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아도 화상이 일선군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여 직지사라 이름 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초보산꾼 직지사 산행기  http://blog.daum.net/kmhcshh/846

 

식후경

 

직지사 갈림길

 

이정석이 세워져 있는 운수봉

운수봉(雲水峰) 680m.

직지사의 부속 암자인 운수암의 북쪽 봉우리다. 직지사가 있는 능여계곡의 행정구역이 대항면 운수리이므로 마을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황악산 자락에 딸려 있는 조그만 봉우리인데 각종 이름에 차용된 것이 의아스럽다. 산 이름에 '물 수(水)'자를 쓰는 특이한 곳이다. 정상은 암장이다.

운수봉(雲水峰)은 언제나 구름이 머물고 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여시굴을 지나

 

이정석이 있는 여시골산

여시골산 620m.

현재 대간꾼들 사이에 여시골산(620m)이라 불리는 산은 운수봉과 괘방령 사이의 대간 상에 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오른쪽 가지줄기의 385.4m를 여시골산이라 표기하고 있다. 현지 조사를 통해 진위가 가려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여시골산이라는 이름은 '여우'의 경상도 사투리에서 비롯된 듯한데, 과거 이 산에 여우가 많이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대간 등마루 위 오름길의 시작 부분에 여우굴 같은 동굴이 있다.  옛날에 금광개발 하던 곳의 하나는 아닐지?

 

임도를 만나 임도를 따라 내려오면

 

가성산이 보이기 시작하고

 

괘방령 도로에서 마루금은 우측에 있다

괘방령(掛榜嶺) 357m 

이웃한 추풍령이 관로라면 괘방령은 한성과 호서에서 영남을 왕래하는 보부상, 괴나리봇짐 장수들이 들이 관원들의 간섭을 피해 다니던 상로(商路)였다.

또 조선시대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갈 때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때문에 마음 약한 유생들은

지름길인 추풍령 대신 괘방령을 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근 고을에 부임하던 관리들까지도 한사코 이 고개를 넘어 다녔다고 하는데... ㅋㅋ
괘방령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면 급제를 알리는 방에 붙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방’(榜)자가 과거의 합격자를 발표할 때 붙이는 방과 같은 글자라는 사실이 조선의 유생들을 괘방령으로 유혹(?)하지 않았을까?

 

잠시 괘방령산장이 있는 좌측에 들러,  괘방령 안내판에서

실제 괘방령 아래 마전마을은 전의 이씨(全義 李氏) 집성촌이다.

조선 정조 때 경남 의령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가던 전의 이씨 이춘영·은영 형제가 괘방령 길목에 이르러 직지천의 아름다운 풍광과 마을 인심에 반해

터를 잡고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미뤄 괘방령에 과거 유생들의 드나들었음이 적잖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추측도 후대의 의미 부여이기가 쉽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괘방(卦方)'으로 적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의 지명 표기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 掛榜이든 卦方이든 한글 표기는 '괘방'이어야 하는데

'궤방'으로 적혀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오기로 보인다

 

괘방령산장

괘방령산장

전원생활을 그리워하던 산장 부부가 가정집으로 지으려다가 산꾼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장 아닌 산장이 되었다 한다.

부부가 손수 3년여 공사 끝에 2007년 11월에 완공. 아직 대간길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아 산꾼들의 발걸음은 적은 편이지만

한번 다녀간 사람은 산장 부부의 넉넉한 인심에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한다.

대간 상에 많은 산장이 있지만 대간길에서 많이 벗어나 있어 이용하기가 힘든데 괘방령산장은 대간길과 접하고 있어 이용하기 편리하다.

아들 백두산이와, 젊은 시절 언더그라운드 기타리스트였던 괘방령 산장 주인과 부인이 산다.

 

가성산 들머리 앞에 있는 괘방령 이정석

괘방령 일대는 옛날 전쟁터이기도 했다. 마전마을의 유래도 전쟁과 관계 있다. 임진왜란 당시 괘방령 마을 인근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목숨을 잃은 조선군과 왜군의 말들을 들판 한가운데 묻어주고 돌을 쌓아 말무덤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마을 이름도 ‘말무덤이 있는 들’이란 뜻으로 ‘마전(馬田)’이라 했다 한다. 괘방령 고갯길은 대항면 삼거리에서 시작해 정상까지 5㎞ 정도 된다.

괘방령 일대는 임진왜란 때 박이룡 장군이 왜군을 상대로 격렬한 전투를 벌여 승전을 거둔 격전지로서

북쪽으로 1km 떨어진 도로변에는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418봉을 우회하고

 

안부도 지나고

 

오늘은 구절초가 별 특징 없는 대갈길을 사이사이 눈의 피로도 풀어주고 발길도 가볍게 해준다

 

가을이 오길 기다렸단 피어나 가을을 보내고 지는 가을의 욕심쟁이 구절초

선모초 구일초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구절초는 아홉번 꺽이는 풀 또는 음력 9월9일에 꺽는 풀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순수라는 꽃말 답게 너무나 아름답고 정갈하고 자연스러움을 간직한 꽃으로 이곳 대간길에도 가을임을 알려주고

오늘은 많지 않은 가을바람중에서도 조금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며 불러주는 구절초의 가을노래소리

늬그리워 핀 꽃이더냐 그저 스처가는 산객들의 콧노래와 함께 장단을 맞추면 되는 것을

아홉변 꺽인들 어떠리 아홉번을 품어주면 되지 가을이 깊어지는데...

 

가성산 직전 바라본 김천 봉천면 방향

김천시 봉계마을 :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신리

가성산 정상 우측으로 봉계마을이 조망되는데 鳳鷄마을은 풍수지리가들이 꼽는 명단자리로 유명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봉계는 들이 큰데다 嶺과 가까워서 평시나 난시 가릴것 없이 여러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라 쓰고 있다는데

실제 이마을에서 장군 6~7명이 나왔다고 한다

 

이정석과 삼각점이 있는 가성산

柯城山 : 인근 주민들은 '가재산'이라 불렀다

아랫마을에 김천시봉안면 신암리에 가성산이 마을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가성마을이 있는데 가성산 중턱에는 옛 성터가 있다.교통의 요지인 추풍령이 있고 눌의산 정상에 봉수대가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으로 보아 유추가 가능하다

 

장군봉

 

장군봉의 산까치님

 

헬기장을 지나면 바로 삼각점과 이정석이 있는 눌의산에서 단체사진 - 잡스님 작품

눌의산 訥誼山 734.9m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사부리

訥伊項山 또는 누리산이라고도 한다. 눌訥은 말을 더듬다, 어눌하다, 더디다의 뜻이고 의誼는 옳다,의논하다, 情등을 의미한다

情誼가 눌하다는 의미이니 충청도 경상도의 양쪽 사람들의 교류가 뜸했다는 의미라는 설명이라고도 한다  - 한국산하 -

 

추풍령역 방향

 

우리가 호수에 던진 돌맹이 하나에 파문은 크게 일어난다

우리 삶이 다 그렇게 반응하고 속을 썪이고 파문의 높이 만큼이나 파장의 길이도 길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요란 할 것 같았던 파문도 금새 사라진다

어느날 문득 나에게 그런 시런이 있었나 하고 느끼듯이

 

우측으로 추풍령저수지와 갑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저수지 우측으로 이어지고 있다

 

모든 것이 살고 죽고는 정해저 있고 파문 또한 그렇게 소멸되고

인생 또한 세월속에 묻히면 그만인 것을 왜 그리들 아둥바둥 살아 가는 것일까?

남이 뛰면 나도 덩달아 뛰어야 하고 쉼 자체가 사회에 낙오된다는 강박관념에 살아가는 우리

세상사 잠시 잊고파 찾은 산에서도 또한 만만치 않은 욕심들이 자리하고 있다

 

헬기장을 지나 이정표를 만나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지녀야 하는 숙명같은 것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인데

바람이 문풍지를 흔들고 지나가 듯 휙 지나가는 세월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그 세월을 만들어 내는 계절의 변화 또한 오고 감을 숙명으로 여기고

지금 다시 우리에게 가을이라는 계절을 선물하고 있다

 

임도를 계속 따르면 반대편의 아픔을 숨기고 있는 갑산이 상처를 숨기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렇게 소중하게 다가온 가을을 즐기느냐 그냥 보내느냐는 우리 맘속에 있다

파문은 내맘속에 던저진 돌맹이에 있으므로 돌맹이를 만지지 않으면 될 것이고

쉼 자체가 인생의 후퇴가 아니고 겨울을 이기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낙엽의 계절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값진 교훈인 것을...

 

눌의산 안내판 임도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해서 계속 내려오다 수렛길에서 우틀

 

뜨거운 불길을 타고 이렇게 우리 앞에 다가선 가을이 주는 하루의 시간은 너무도 짧다

강렬했던 여름의 시간들은 우리에게 잔잔한 일상을 선물하지만

오색빛깔로 곱게 타오른 잎새의 황혼이 만들어내는  향연에 우리는 다시 열광하게 될 것이다 

짧게 찾아와 짧게 사라질 가을, 우리들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굴다리 통과

 

시멘트길을 좌측으로 계속 걷다보면 철도의 지하도를 통과 햐야 한다

 

마침 추풍령역 방향에서 열차가 달려오고 있다

추풍령역은 경부선에 위치한 역 중 가장 높은 해발 230m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때 채석장 운영에 따른 자갈선 설치로 12명의 직원이 근무했으나

채석장의 폐쇄와 화물취급 중지에 따라 하루 2명의 역무원이 상하행선 13번 정차하는 역을 지키고 있다.

 

특히 역내에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 47호 급수탑이 우뚝 서있다.

추풍령역 급수탑은 높이 15m, 용량 40t으로 표준화된 급수탑의 유형이 정해지기 이전의 1939년 건축된 과도기적 급수탑으로 현재 남아 있는 철도 급수탑 중

유일하게 평면이 사각형이며 경부선을 운행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39년부터 1960년대 말까지 30여년 동안 운용됐다.

이 급수탑 안 기계실은 당시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워싱턴 펌프와 급수에 필요한 물을 끌어들인 연못 및 배관시설 등

급수시설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상태이며 6.25전쟁시 총탄의 흔적등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데일리 뉴스 14.09  http://www.ccdail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10335

 

철길 지하도를 나와 삼거리에서 식당방향으로 우틀

 

고개인지 착각이 드는 추풍령고개

추풍령(秋風嶺) : 

명색이 백두대간의 고개지만 추풍령은 그리 높지않은 탓에 가다보면 어느 틈에 그만 평지처럼 슬그머니 재릉 넘는다.

구름도 자고 넘는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에나 있다.  지금은 옛고개 자체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금산군편에 `경상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곳에있어 일본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사신이 청주를 경유할 때는

반드시 이 곳을 지나감으로 관에서 접대하는 번거로움이 상주와 맞먹는 실로 왕래의 요충`이라 한다.

부산과 한양을 연결하는 일반적인 고개길은 아니었던 듯.

 

 

조선의 같은 영남 3대 관문인 영남대로의 맏형역활을 하던 문경새재보다는 규모나 명성에선 뒤졌지만

일제강점기 때는 문경새재의 명성과 규모를 뛰어넘었고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지나면서 추풍령은 문경새재는 물론 소백산의 죽령과 이화령을 넘던 사람과 경제까지 물려받은 명실상부 최대의 소통처였던 것이다.

한양을 오가던 선비들이 이곳에 하룻밤 묵어야 할만클 도로사정이 나빴던 옛날에는 주막거리로 흥청거렸고,

전국에서 유일하게 충북만 통행금지가 없을 때 통행금지시간이 되면 경북쪽에서 추풍령으로 술마시러 오는 술 꾼들이 많았다는 역사속의 이야기다.

추풍령은 나라가 관리하는 관로라 예전부터 길이 잘 닦여 있었는데,

과거길 선비들은 秋風落葉을 연상시키는 추풍령보다는 합겨자발표떄 붙이는 榜자르 가진 궤방령을 주로 이용했다.

 

임지왜란 떄는 군사적 요충이 되어 의병장 장지현이 의병 2,000면을 이끌고 왜군 2만과 1차전투에서는 물리쳤지만

다시 밀려온 4만 왜군에게 패하여 장렬히 전사한 곳이다

추풍령은 일제강점기 철도로 우편물을 수시로 서울로 운송했다.그러나 서울 부산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우편물이 중간지점인 추풍령에서 1박을 해야 했으며 그 결과 추풍령 우체국은 우리나라 제 1호 우체국으로 불리우고 있다.

 

울산에서 생산한 소금의 길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영천과 안동을 지나 죽령을 넘는 ‘영남좌로’와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서 가는 ‘영남우로’, 대구에서 문경새재를 넘는 ‘영남대로’ 등의 길로 충청지역까지 울산 소금은 유통됐다고 한다

초보산꾼 고개이야기 http://blog.daum.net/kmhcshh/1972

 

뒷풀이 장소

 

소수의 인원으로 이렇게 피로를 풀어 본다

 

 

옛날에는 문경새재를 넘는 영남대로에 비해 규모도 명성도 작고 해서 영남 우로로 불리었던 추풍령

하지만 경부선 철도의 개설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거기에 경부고속도로까지

한국경제의 대동맥의 역활을 수행하는 중요한 골목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이제는 속도로 따지면 더욱 빠른 ktx가 과거 관로를 피해 다니는 역활을 수행했던 자그만 고개였던 괘방령을 달리고 있다

세월의 무상함,  대간속에 이렇게 촘촘이 살아 있다

누가 알았으랴 이렇게까지 세상이 변할 줄을...

 

또 3450온누리 산악회의 근간이라 자랑스러워 하던

대간팀의 숙명적인 秋風속 가엽은 낙엽이 될 줄을... 또한 그누가 알았으랴?

나무의 숙명은 겨울을 나기 위한 과정이 가을속에 남아 있 듯이

우리 대간팀이 살아남기 위한 선택도 역시 나무의 숙명과 같다는 생각을 해보면

보이지도 않는 허상을 추풍의 낙엽에 묻어버리고

인고의 겨울을 보내고 따뜻한 봄에 다시 소생할 수 있기를 기다려 봐야겠다

 

생존의 방법

그누구도 해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우리 없는 중에서도 힘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기를...

 

수고했습니다

 

 

                       초보산꾼   도   덕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