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사람의 임종을 지켜보며
“나도 장래 어느 날 나와 일생을 함께 해온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게 되리라.”
프랑스의 철학자로 사르트르와 계약결혼을 하고 계속 연장시켜나갔던 시몬느 드 보봐르가 소녀시절 친척집에서 죽어가고 있는 친척과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그 부인을 바라보며 느꼈던 감정을 표현한 글이다.
보봐르는 고등사범 동창으로부터 사르트르를 소개 받았고, 사르트르에게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이제부터 내가 당신을 맡겠습니다.” 그날부터 60여 년간, ‘하루도 서로 상대방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고서 잠든 적이 없었고, 한 사람이 시작한 말을 다른 한 사람이 끝마쳐도 그것은 처음 사람들이 하려던 것과 똑 같은 말이었다.’고 말하는 완벽한 상호 이해를 통해 계약결혼을 이어갔다.
그 뒤 1980년 사르트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 10년 전부터 장례식까지의 순간들을 <작별의 예식>이라는 책에 담았다.
“....사르트르가 이제 절망적이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뇨독증은 흔히 참혹한 고통을 가져온다는 것을 나는 일고 있었다. 나는 흐느껴 울면서 우세 박사의 팔 안에 몸을 내던지며 외쳤다. ”자신이 죽는 것을 그가 모르게 해주세요, 불안을 갖지 않게, 고통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약속드리지요,”그가 나직하게 나에게 말했다. 잠시 후 사르트르의 방에 다시 갔을 때 우세가 나를 불렀다. 복도에서 그는 말했다.
“제가 공연한 약속을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
그는 나에게 물었다.“ 장례비용은 어떻게 하지” 나는 물론 그 말에 항의를 하며, 입원비로 화제를 돌려 의료보험으로 해결이 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러나 자신이 선고받은 사실을 그가 알고 있고, 그것으로 인해 충격을 느끼고 있지 안다는 것을 나는 알아챘다.
다만 최근 몇 년간 동안 그를 괴롭혀 온 문제, 돈의 부족을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건강에 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눈을 감은 채. 그는 내 손목을 잡고 말했다. “당신을 무척 사랑해. 나의 까스또르(보봐르의 애칭)
4월 14일, 내가 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잠에서 깨어 나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고는 나에게 입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입과 뺨에 키스를 했다,
그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말들, 그 몸짓들,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그것들은 분명 그의 죽음의 전망 속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몇 달 후, 내가 만나길 원했던 우세박사는 당시 사르트르가 가끔,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지요., 어떻게 끝장이 나는 거지요?” 나는 질문을 했다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를 불안에 떨게 한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뇌였다. 죽음을 그는 예견하고 있었으나., 불안은 없었다. 그는 체념해 있었다. 아니 자신감을 되찾았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4월 15일 수요일 아침, 내가 늘 하던 대로 사르트르가 잠을 잘 잤는지 물었을 때 간호원은 “네, 그런데 ....”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리로 곧 갔다. 그는 가쁜 숨을 쉬며 잠들어 있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전날 밤부터 그런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여섯 시간 동안 그를 바라보며 거기 머물러 있었다. 여섯 시 경, 아를레뜨에게 자리를 내주며 나는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해달라고 부탁했다. 9시에 전화벨리 울렸다. 그녀는 말했다.“ 숨이 멎었어요.” 라고, 나는 실비와 함께 그곳으로 갔다. 그는 언제나 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실비가 랑즈만, 보스뜨, 뿌이요., 오르스뜨에게 연락을 했고, 그들은 달려왔다. 병원 측은 우리가 새벽 다섯 시까지 방안에 남아 있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내가 실비에게 위스키를 가져 오라고 해서 그것을 마시면서 사르트르의 마지막 날들, 구보다 더 옛날 일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뻬르 라세즈에 있는 어머니와 의부 사이에 묻히지 않고 싶다고 사르트르는 나에게 가끔 말했었다. 그는 화장되길 원했다. 우선 임시로 몽빠르스나스 묘지에 매장할 것이 결정되었다. 거기서 뻬르 라세즈로 옮겨 호장을 할 것이었다. 그의 유해는 몽빠르스나스의 묘지의 한 무덤에 마지막으로 안치 될 것이었다.
우리가 밤샘을 하고 있는 동안, 신문기자들은 그 병동을 에워싸고 있었다. 보스뜨의 랑즈만이 그들에게로 가서 떠나가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몸을 숨겨 버렸다. 그러나 들어오는데 성공하진 못했다. 입원할 때에도 그들은 사진을 찍으려 애썼었다. 그들 중의 두 명은 남자간호원으로 분장하고 병실 안으로 몰래 들어오려고 했었으나 쫓겨나고 말았다, 간호원들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블라인드를 내리고 입구에 칸막이를 해주었다. 그랬는데도 아마도 옆 건물에서 짝은 듯한, 잠들어 있는 사르트르를 보여주는 사진이 파리 마치지에 실렸다.
잠깐 동안, 나는 사르트르와 단둘이 있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는 시트 밑에서 그이 곁에 눕고 싶었다. 한 간호원이 나를 말렸다. “안돼요, 조ㅓ심하세요.”..괴저가...“ 그 때서야 나는 그의 욕창이 무엇이었나를 알 수 있었다. 나는 시트 위에 잠깐 잠이 들었다. 다섯 시에 남자 간호원들이 왔다. 그들은 사르트르의 시신 위에 시트 한 장과 모포 같은 것 한 장을 덮고 그를 운반해갔다.(...)
“토요일 아침, 우리는 원형강당에 모였다. 그곳에 사르트르는 얼굴을 드러낸 채 그의 아름다운 옷 속에서 뻣뻣하고 차가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내 요청으로 뺑고가 그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사르트르의 얼굴 위에 시트를 다시 덮고는 관을 닫았고, 그리고 그것을 운반해갔다.
나는 실비, 내 여동생, 아했레뜨오 함께 영구차에 올랐다. 우리들 앞에는 화려한 꽃다발과 화한으로 덮인 자동차 한 대가 있었다. 마이크로버스 같은 차 한 대는 나이가 많거나 너무 오래 걷기 힘든 친구들을 태워 가고 있었다. 굉장한 인파가, 약 5만이 되는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영구차의 유리창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이 나의 모습을 잡기 위해 사진기를 들이대고 있는 사진기자들이었다.
<현대> 지의 동료들이 자동차 뒤에서 바리케이트를 만들어 주었고 둘ㄹ에에서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꺼이 손에 손을 잡고 방패막이를 해주었다.
행렬이 계속되는 동안 대체로 군중들은 질서 있었고,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마지막 68 데모군요.” 랑즈만이 말했다.
나는 아무 굿도 보이는 게 없었다. 나는 바륨으로 약간 혼수상채에 있었고, 허물어지지 않으려는 의지로 인해 굳어 있었다. 사르트르가 원했던 장례식이 이런 것이라는, 그런데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구차에서 내렸을 때는 관은 이미 무덤 속에 있었다. 나는 의자를 하나 부탁해서 머릿속이 텅 빈 채 묘지 구덩이 옆에 앉아 있었다. 담 벽 위에 무덤 위에 올라선 사람들이 보였다. (...)사르트르의 유해는 몽빠르나스의 묘지로 옮겨졌다. 날마다 미지의 손길들이 그의 무덤에 작은 싱싱한 꽃다발들을 가져다 놓는다.
사실 이제껏 제기해보지 못했던 의문이 하나 있다. 독자들도 그런 의문을 품을지 모르겠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사르트르에게 알려주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그가 아무런 구제의 방도도 없이, 쇠진한 몸으로 병원에 있을 때, 나는 오직 그의 상태의 심각성을 숨기기에만 급급했었다. 그는 언제나 암, 혹은 어떤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는 ‘알 것’을 원했었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애매했다. 그는 ‘위험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소망대로 10년을 더 견딜 것인가? 아니면 1.2 년 내로 모든 게 끝나버릴 것인가.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에겐 아무런 방도가 없었으므로 그랬다고 해서 자신을 더 잘 추스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생을 사랑하고 있었다. 실명과 불구를 견디는 것도 벌써 그에겐 무척 힘드는 일이었다. 그를 짓눌러 오던 그 위협을 그가 좀 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질없이 그의 마지막 몇 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뿐인 것이었다.
어쨌든 나 자신도 그처럼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고 있다. 나의 죽음이 우리를 결합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법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다지도 오랫동안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만도 벌써 아름다운 일이리라.“
저마다 우주인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만나 함께 살아가기로 맹세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 사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다.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두 사람이 똑 같은 날, 동시에 생을 마감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정된 삶을 살다가 한 사람이 먼저 죽게 된다.
그때 이, 생에 남은 사람의 마음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계약결혼으로 전 세계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 그들의 삶도 사랑도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난관을 조화로운 사랑으로 이겨낸 뒤에 사르트르의 임종을 지켜보며 쓴 이글을 읽다가 보면 절제 된 문장으로 표현한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고도 넓은 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동성이나 이성을 떠나서 서로 진실 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느끼는 가장 아름다운 표상인 것을 나이가 들수록 실감하게 된다.
“내가 두려워하고 있던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죽거나 내가 그 보다 먼저 죽는 것이었다.” 고 말한 보바르에게 후세가 있다면 다시 사르트르를 만나서 또 다른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인가?
갑오년 칠월 초이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