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없고, 어리숙하며 서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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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제자였던 황상黃裳이 지은 <임술기壬戌記>에
스승과 만나서 나눈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산을 만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황상이 다산에게 말했다.
“저는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하고,
둘째는 꽉 막혔고, 셋째는 미욱합니다.”
이 말을 들은 다산이 황상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을 너는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구나.!
기억력이 뛰어난 자들은 공부를 소홀히 하고,
글 짓는 재주가 좋은 자들은 허황한데 흐르는 폐단이 있고,
이해력이 빠른 사람은 거친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사람은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사람은 빛이 난다.”
타고난 것 보다는 모자란 것을 알고서 노력하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다.
동학에서 말하는 우리 민족의 심성이 있다.
“말이 없고, 어리숙하며 서툴다.”
오늘날 같이 말이 찬란하고 유치해야 빛나고,
노련하고, 능수능란해야 살아갈 수 있고,
익숙한 것에만 길들여진 시대에
다산이 살고 있다면 황상 같은 사람의 질문에 뭐라고 답할까.
하지만 인간의 근원은 고금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인간의 본성은 근본이며 처음이요, 아무것도 손대지 않은 소박함 그대로이다.
인위적인 것(예를 말함)은 수식이요, 조리요, 융성함 바로 그것이다.
만일 인간의 본성이 없으면 인위적인 노력을 더할 바탕이 없고,
또 인위적인 노력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은 아름다워질 수가 없다.
본성과 인위적인 노력 두 가지가 하나가 된 뒤라야 만이
비로소 성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니
천하를 통일하는 위대한 공업功業도 이로부터 성취되는 것이다.“
순자의 <예론>에 실린 글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모자란다는 겸손이 있어야 하고
그 모자라는 것을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배가 있는데, 나는 언제나 그것을 보존하고 있다.
하나는 자애이고, 둘은 검약이며, 셋은 감히 세상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감히 세상에 나서지 않기에 만물의 으뜸이 될 수가 있다.“
<노자> 제 67장에 실려 있다.
노자가 살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숨어서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긴 하나.
너무 알려지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
그게 잘 사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조절하는 것이 어렵다.
삶은 항상 심연에 걸린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 위험한 것,
그래서 미래는 없고, 현재만 있는 것,
그 순간을 원도 끝도 없이 잘사는 것,
그래서 삶은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갑오년 칠월 초여드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