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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울진 십이령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4. 9. 19. 22:56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울진 십이령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걷는다.

 

814(금요일)에서 16(토요일)까지 연휴기간에 23일에 걸쳐 울진 십이령과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찾아갑니다. 보부상들의 애환이 서린 울진 십이령 즉 열두 고개 길은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길입니다. 특히 소나무가 아름다운 소광리는 눈부신 조선 소나무를 실컷 볼 수 있는 곳이고 근처에 있는 불영사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곳입니다.

십이령, 불영사. 조지훈 생가. 서석지, 남이포, 이문열 생가. 그리고 영양의 외씨 버선길을 걸으며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을 체험하게 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울진군 북면 두천 1리는 울진중에서도 가장 궁벽 진 산골이다. 민가 몇 채가 드문드문 들어서 있는 이곳 두천 1리는 열두재를 지나 소천 거쳐 서울로 가던 중요한 길목이라서 서울 나들이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선질꾼들은 이곳 십이령을 대개 사흘 만에 넘어 소천에 도착했는데, 그들의 출발이 울진이나 흥부에서 출발할지라도 이곳 두천리를 경과하지 않고는 바릿재를 지나서 가는 십이령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런 연유로 선질꾼들이 한창 많았을 때는 50여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으로 흥청거렸다.

마을 동쪽을 흐르는 외두천 건너에 <울진내성행상불망비蔚珍乃城行商不忘碑>가 세워져 있다. 문화재 자료 제 310호인 이 비는 1890 년 경에 울진과 봉화를 왕래하면서 어염해조류를 물물교환하며 상행위를 하던 선질꾼들이 세운 비다. 당시 봉화 내성에 살고 있던 그들의 최고 지위격인 접장인 봉화사람인 정한조鄭韓祚와 반수班首인 안동출신 권재만權在萬이 그들의을 도와준데 대해 그 은공을 기리고자 세운 영세불망비라서 이 비를 이 지역 사람들은 선질꾼비라고도 부른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이 비는 그렇게 흔하지 않은 철비鐵碑로 만들었는데 일제의 철재동원령 때에는 땅 속에 묻어두었다가 해방 이후 골기와로 비각을 세웠다. 그 뒤 1965년 경에 대구에 살고 있다는 후손이 찾아와 양기와로 비각을 보수하였다.

무쇠로 주조된 이 비는 2기로, 1기는 부러진 것을 이어 세웠다. 선질꾼들은 2.7장인 울진장과 3.8장인 흥부장에서 주로 해산물인 소금, 건어물, 미역 등을 구매하여 쪽지게에 지고 열두재라고도 부르는 12 을 넘었는데 울진에서 봉화까지 대략 그 길이가 13십리 길이었다. 선질꾼들은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있는 인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로 밥을 지어먹고 가기도 했다. (...)

이 샛재는 한나무정이 서쪽에서 전곡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고개 마루가 넓다고 한다.그 다음 고개가 큰 넓재다. 꼬채비재는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자마리에서 울진군 서면 광회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높은 곳에서 낮게 날아가는 형국이라고 한다.

멧재를 지나고 낙동강 변의 배나들나루가 있는 배나들재를 넘으면 마지막 고개인 노릇재가에 이르고 그 고개가 열두 고개의 마지막 고개였다.

선질꾼들은 그 무거운 등짐을 지고서 사흘쯤을 뻑 세게 걸어 봉화장으로 가 그 주위에 있는 내성장, 춘양장, 법전장, 장동장, 재산장에서 잡화와 약품 및, 양곡, 포목 등을 그들이 가진 것과 교환하여 되돌아왔다고 한다. 다시 되돌아오는 데에는 대체로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십이령 들목인 두천리가 번성했을 때는 5.6십 명의 행상들이 몰려들어 주막과 마방이 흥청댔다고 한다. 울진에서 봉화까지 130리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외딴 주막이나 어쩌다가 눈에 띄는 민가에서 머물면서 지게에 지고 가던 솥단지를 가지고 밥을 해먹고 가야 했는데, 그 때 선질꾼들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부르던 노랫말이 <십이령 바지게꾼 노래>.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 평생을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 구나, 서울 가는 선비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꼬불 열 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대마 담배 곡물지고 흥부장을 언제 가노, 오나 가나 바지게는 한 평생에 내 지겐가, 오고 가는 원님들도 이 고개를 쉬어 넘고, 꼬불 꼬불 열두 고개 언제 넘어 고향 가나.“

선질꾼이나 마상은 다른 지역의 보부상들과 같이 완전한 조직을 갖춘 단체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지역 출신들이 한 곳에 모여서 무리를 지어 출발했다가 무리를 지어 돌아왔던 것이 보부상 즉 선질꾼들의 생활이었다.(...)

소조동과 광천동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 울진군 서면 소광리召光里이다. 이곳에 나라 안의 이름난 소나무 군락지가 있다. 소광리 소나무 숲, 그 주인공은 바로 금강송이다. 나무 줄기가 붉어서 적송(赤松)’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고 여송(女松)’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로부터 나라에서는 왕실 또는 귀족들의 관재로 삼기 위해서 소나무숲을 보호했었다. 굵게 자라서 안쪽의 심재가 황장색을 띈 고급재로 관재棺材로서 유용한 것을 황장목黃腸木이라고 하였다. 1420년 예조禮曹에서 천자와 제후의 곽은 반드시 황장으로 만들며, 황장이란 송심松心이며, 그 황심黃心은 단단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썩지 아니합니다.” 백변白邊은 수습에 견디지 못하고 속이 썩습니다.“고 보고 한 것을 보면 소나무의 심재가 관재로 많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사명당 유정은 소나무를 주제로 청송사靑松辭라는 시를 지었다.

소나무 푸르구나. 초목의 군자로다. 눈서리 이겨내고 비오고 이슬 내린다 해도 웃음을 t숨긴다.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변함이 없구나. 겨울 여름 항상 푸르구나. 소나무에 달이 오르면 잎 사이로 금모래를 체질하고 바람 불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이곳 소나무 숲에 500년 된 소나무가 있다. 조선 성종 때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강산이 50번을 바뀌었는데도 그 푸르디 푸른 솔잎과 그 붉음 자태를 자랑하며 서 있는 금강송 아래에서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작고 가녀린가?

신정일의 <걷고 싶은 길>

신라 초에 이곳 영양 일대에는 고은현古隱縣(영양읍)과 청기현靑杞縣(청기면)이 되었다가 경덕왕 때 유린현有隣縣의 속현으로 되었다. 고려 초에 영양군으로 개명되어 예주禮州의 속읍이 되었다가 조선 전기에는 영해부에 소속되었다.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그 당시 영양현이 40호에 1026명이었고, 청기현은 29호에 462명으로 실려 있다.

현종 5년인 1664년과 숙종 1년인 1675년에 영해부로부터 독립을 해줄 것을 요구하는 상소에 힘입어 1682년에 영양현으로 독립하였지만 석보면은 영해도호부에 속하였다.

1895년 영양군으로 승격하여 안동부에 속하였고, 1914년 군면 통폐합시에 행정구역이 조정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지훈의 고향 영양

?영양읍지?이곳이 교통이 불편하고 흉년이 잦아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목숨을 이을 때가 많았으나 조선 숙종 때 현이 부활된 뒤에 이웃인 안동과 예안의 유학의 영향을 받아 점차로 글을 숭상하게 되었고 주민의 성질이 착하면서도 인내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영양에는 당대에 타관에서 들어오면 돈을 벌 수 있으나 당대에 다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근거 없는 말이 돌기도 했다.

2-9조지훈 생가

봉화군 경계에는 일월산과 오십봉, 주산수산 등의 높은 산들이 펼쳐져 있어 영양에서 울진으로 가려면 여러 산을 넘어가야 했다. 그 중 백암산(白岩山)을 넘어 동해로 가는 고개 이름이 울릿재였다. 가을마다 곡식을 관청에 바치려고 넘어갈 때 고갯길에 도사리고 있던 호랑이와 도둑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연유로 울면서 넘어갔기 때문에 울릿재 또는 읍령(泣嶺)으로 불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영해도호부편 산천조에 서읍령은 부의 동쪽 40리에 있어서 온 고을에 전송하고 영접하는 곳이 되어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크고 작은 사신의 행차가 만약 처음으로 재를 넘으면 반드시 흉한 일이 있다하여, 사람들이 다 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양군 청기면 청기리에서 영양읍 서부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예우름재는 행곡령 또는 여림현으로 높이 579미터의 고개이다. 조선시대 청기고을 사람들이 영해부로 부역하러 다닐 때 너무 험준해서 넘어 다니기 어려우므로 그 괴로움을 한탄하며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에서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알려진 조지훈(趙芝薰)의 옛집이 있다.

본명은 동탁東卓이며 호가 지훈인 그는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고, 3년간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1939년 혜화전문학교(지금의 동국대학교) 문과에 입학해 백지동인으로 참여했고, 조연현 등과 친하게 지낸 조지훈은 1941년 대학을 졸업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있었다. 그때 WQJ했던 책들이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화엄경등의 불교서적과 노장사상, 당시(唐詩)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 큰사전편찬위원으로 참여했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8·15해방 이후 동국대학교 강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교수가 된 조지훈은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기획위원장으로 중부전선에서 종군했다.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역임한 조지훈은 1968년 토혈로 사망하여 경기도 양주군 마석리에 안장되었는데 그의 나이 48세였는데 그가 지은 <지조론志操論>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숨 쉬고 있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까지 하다. 지조가 교양인의 위의(威儀)

를 위하여 얼마나 값지고, 그것이 국민의 교화에 미치는 힘이 얼마나 크며, 따라

서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가를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

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중략) 

지조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기의 신념에 어긋날 때면 목숨을 걸

어 항거하여 타협하지 않고, 부정과 불의한 권력 앞에는 최저의 생활 최악의 곤

욕을 무릅쓸 각오가 없으면, 섣불리 지조를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정신의 자

존 자시(自恃)를 위해서는 자학과도 같은 생활을 견디는 힘이 없이는 지조는 지

켜지지 않는다. (중략)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

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철이 들어서 세워놓은 주

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

는 변절은 개과천선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

절을 변절이라 한다. (중략)

차돌에 바람이 들면 백 리를 날아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거니와, 늦바람이란 참으

로 무서운 일이다. 아직 지조를 깨뜨린 적이 없는 이는 만년을 더욱 힘쓸 것이

, 사람이란 늙으면 더러워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직 철이 안 든 탓으로 바

람이 났던 이들은 스스로의 후반을 위하여 번연(飜然)히 깨우치라.

한편 이곳 영양군에서 태어난 소설가가 <사람의 아들> <젊은 날의 초상>등의 소설을 지은 이문열(李文烈)이다.

그가 태어나 태를 묻은 영양에서 영덕군 창수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창수령인데, 이문열은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서 창수령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창수령 해발 7백 미터, 아아, 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았다. 창수령을 넘는 동안의 세 시간을 나는 아마도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세계의 어떤 지방 어느 봉우리에서도 나는 지금의 감동을 다시 느끼지는 못하리라.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완성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을 나는 바로 거기서 보았다. , 그 아름다워서 위대하고 아름다워서 숭고하고 아름다워서 신성하던 그 모든 것들……

 

영덕길과 울진 십이령 길을 가고자 하는 분은 속히 신청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