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산중산담 2013. 8. 4. 22:50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천삼백 리 한강 다섯 번 째를 걷는다.

- 단양읍에서 충주댐 거쳐 원주 부론면까지-

 

한강 천 삼백리 도보답사의 여정이 다섯 번째로 실시됩니다. 단양군 단양읍에서 출발하여 충주댐의 상류에 있는 장회나루에서 충주호 유람선을 타고 충주댐에 닿을 예정입니다.

탄금대를 지나고 충주호 조정지댐에 있는 중원탑과 고구려비를 돌아보고 목계나루에 이릅니다. 신경림 시인의 절창인 <목계나루>를 지나며 아름답게 펼쳐진 남한강변의 유서 깊은 폐사지들을 찾아갈 예정입니다. 청룡사, 거돈사, 법천사지에 있는 국보와 보물들을 보고 여정은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에 이를 예정입니다. 남한강과 섬강, 그리고 청미천이 만나는 이 곳까지 이어질 다섯 번째 여정은 남한ㄱ상의 물길이 얼마나 도도하고 양양한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도전리가 신단양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84년 8월 이후였다. 32만 평의 대지 위에 단양읍 중도리 시루섬의 모래, 자갈, 조약돌을 옮겨다 군청 소재지를 거의 옮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 대이동 공사에 투입된 공사비는 총 1천억원이었다. 강을 끼고 있는 산촌마을에 불과했던 도전리는 겨울이면 눈이 제일 먼저 녹고 325가구쯤의 농민들이 고추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곳이었는데 충주댐이 조성되는 과정에서 신단양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물이 줄어 삭막해 보이는 남한강가의 장미꽃길을 지나며 강물 소리를 듣는다. 조용하다. 사람 소리도 차 소리도 그 어느 소리도 허락하지 않고 오직 흐르는 강물 소리만 들릴 뿐이다. 아침부터 날이 저물도록 찻길을 따라 걸으며 들었던 그 소음에서 벗어나 이토록 호젓한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 여느 때 같으면 강폭 가득히 강물이 흘렀을 텐데, 그랬더라면 도담삼봉에서부터 배를 타고 충주나루까지 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듯 줄어들 대로 줄어든 강물이 힘없이 흐고 있을 뿐이다.

오월 말에서 유월 초의 어느 날 단양에 다시 오리라. 그래서 신단양읍의 수변공원길을 다시 걸어볼 것이다. 떨어진 장미꽃잎을 밟으며 장미가시에 찔려서 죽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떠올리며 "올 때는 문득 오고 갈 때는 문득 간다"는 게송 한 구절을 읊어볼 것이다. “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저 푸른 초원이 펼쳐진 곳의 행정구역상의 지명은 단양군 단양면 중도리 시루섬이었다. 모양이 시루처럼 생겼고 시루떡처럼 모래자갈 등이 켜켜이 쌓여진 8만여 평쯤이 되는 시루섬은 퇴적호가 쌓이고 쌓여 단양에서 비옥하다고 소문난 땅이었다. 그런데 72년 8월 19일 이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날 며칠간 비가 퍼붓더니 오후 3시쯤에 물에 완전히 잠기고 말았다. 그때의 상황을 박동중(55세) 씨에게서 듣는다.

"잠종사업소에 근무하던 아가씨가 40여 명이 있었고 35가구 190여 명이 있었는데 방법이 없잖아요. 우선 잠종사업소 물탱크 우로 사람들을 올려보냈어요. 다 올려보내고 나니까 더이상 올라갈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남은 젊은 사람들은 소나무 우에로 올라갔지요. 동생하고 나하고 팬티바람에 같은 소나무에 올라가 '오늘 우리 죽는갑다' 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매달린 소나무는 떠내려가지 않고 다른 소나무들은 떠내려가 버려 그날 밤 8명이 죽었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다른 짐승들은 다 떠내려갔는데 소들은 섬 주위를 맴돌면서 한 마리도 안 떠내려갔어요. 그래서 소는 영물이다 생각했죠. 그 다음날 물이 빠지고 보니까 물탱크 우에 어린 아이 하나가 깔려서 죽어 있더라고요. 다음 날 도지사가 오고 내무부장관이 오고 해서 그 근방에다 집을 지었지요. 그런데 몇 달 후에 나이든 노신사가 찾아온 거예요. 누가 이곳에 집을 지으라고 했느냐 물어서 전후 이야기를 했더니 '당신들하고는 상관이 없구만' 하고 가더니 그 다음날 바로 단양 군수가 온 거예요. 그 사람이 땅 주인인데 남의 땅에 집을 지었으니 당신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거예요. 밝은 대낮에 날벼락이라더니, 그래서 마을 몇 사람이 청와대를 찾아갔지요. 하여간 호랭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예요.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떠나간 사람들 많았어요."

나는 박동중 씨의 말을 들으며 섬진강댐을 막으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운암·정읍 사람들을 떠올렸고 동시에 용담댐의 보상 문제를 떠올렸다. 영악할 대로 영악해진 몇 사람들과 그 담당부서 직원들이 짜고 치는 화투로 A마을로 실사를 나간다 하는 정보가 돌면 B와 C마을 농기구들과 소, 돼지, 심지어 개들까지 A마을로 원정을 나갔다고 한다. 뿔이 괴상하게 구부러진 아무개네 집 소는 다섯 번에 걸쳐 보상을 받았다는데 더 이상 말해 무엇하랴.“

 

1978 년 1월 6일 단국대 조사단이 적성산성을 조사하던 중 비 하나를 발견했다. 높이는 1m가 채 안 되고 윗너비 1m 가량, 아랫너비가 0.5m 남짓한 역사다리꼴 화강암 비는 발견 당시 지붕돌이나 받침돌 없이 비석만 땅에 묻혀 있었다. 예서에서 해서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국 남북조 초기의 글씨로 비문은 모두 440자 가량으로 추정되지만 288자가 남아 있었다. 그 내용은 진흥왕이 이사부, 이간, 내예부, 대야간, 무력 등 10여 명의 고관에게 일러 야이차의 공을 표창하여 앞으로도 야이차와같이 신라에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을 내리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비문에 씌어진 바로는 진흥왕 6년에서 11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남아 있는 비문에선 적성이라는 말이 세 번쯤 나오는데 그 당시 적성은 고구려 땅이었다. 그것을 보면 진흥왕 때에 적성현을 빼앗고 본격적인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적성산성은 사적 제265호로 지정되어 있고 적성비는 국보 198호로 지정되어 있다.

적성산성을 바라본 우리들은 다시 내려와 단성향교를 지난다. 단양군수 지종원, 군수 박초양, 관찰사 이아무개의 비가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우리는 다시 포장도로에 접어들어 우화교羽化橋를 지난다. 중방과 하방리를 이어주었던 단양천의 대표적인 우화교는 당초 돌다리였다가 수해를 입고 콘크리트로 모습을 바꾼 다리이다.“

 

이곳 장회에는 조선 영조 때의 구두쇠였던 조륵에 관한 얘기가 남아 있다. 음성에서 살던 자린고비가 어느 날 장독 뚜껑을 벗겨 햇볕을 쬐고 있던 중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장을 빨아먹고 날아갔다. 이를 본 자린고비는 파리 다리에 묻은 장이 아까와 파리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충주를 지나 단양까지 쫓아온 자린고비는 남한강을 건너는 도중 그만 파리를 놓치고 말았다. 자린고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장외 장외'라고 소리치며 분해했다. 그후부터 사람들은 파리를 놓친 이 곳을 장외라고 불렀고, 세월이 흐르면서 장회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곳의 장회여울은 남한강 줄기에서도 급류가 심한 곳이라 노를 저어도 배가 잘 나아가지 않고 노에서 손만 떼면 금세 도로 흘러 내려가므로 오가던 배와 뗏목이 무진 애를 써야 했던 곳이다. 적성면 성곡리 석지로 건너가는 나루가 장회나루였고 장회여울 남쪽에 있는 삿갓여울은 기암절벽이 흐르는 물을 막고 있어서 삿갓여울이라고 불렀다.

장회탄 아래에 있는 구담봉龜潭峰은 소 가운데에 있는 바위가 모두 거북 무늬로 되어 있고 절벽의 돌이 모두 거북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거울같이 맑은 물이 소를 이루어서 봄꽃, 가을 단풍 때 아름다운 경치가 물 속에 비치니 배를 띄우고 놀면 아래위로 꽃 속이 되어 그야말로 신선놀이가 따로 없었다고 한다. 퇴계 이황, 급제 황준량, 율곡 이이 등이 이곳의 경치를 시를 지어 극구 찬양하였다. 옥순봉玉筍峰은 희고 푸른 암봉들이 비온 후 죽순이 솟듯이 미끈하고 우뚝하게 줄지어 있으며 소금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강 건너가 교리이고 배는 "갈수록 물은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인데 약간의 민가는 그림 속이로다"라고 신개라는 사람이 노래했던 청풍나루에 닿는다. 청풍나루에서 북진나루로 건너던 나루터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 채 옅은 운무 속에 잠겨 있을 뿐이다. 청풍명월의 고장 제천군 청풍면은 1985년 충주 다목적댐이 완공되면서 27개 마을 가운데 겨우 두 마을만이 온전히 남고 나머지는 충주호에 잠기고 말았다. 조선시대까지 제천 지역의 중심역할을 했던 청풍은 악성 우륵의 고향이었고 조선 현종 때는 왕후의 관향이라고 하여 충청도에서 유일한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하였다.

청풍면의 중심지였던 읍리의 강가에 있는 한벽루가 시인 묵객들을 불러들였고 남한강가 북진나루에 서던 청풍장은 제천 지역을 주무르던 가장 큰 시장이었다. 소금을 비롯한 각종 해산물과 비누, 석유, 성냥 등 온갖 농산물이 거래되었던 청풍장의 북진나루에는 서울에서 오는 돛단배들이 가지고 오는 여러 물품들을 받는 봇짐장수들의 발길이 부산했다고 한다. 번성했던 읍내와 북창진 그리고 북진나루를 지키던 느티나무도 물에 잠겨버리고 수몰지구에 서 있던 문화재들은 물태리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에 옮겨지게 되었다.“

 

충주시 종민동과 중원군 동량면 조동리 사이의 남한강에 '중부지방의 지도를 바꾼' 충주다목적댐의 착공식을 가졌던 것은 1980년 1월 10일이었다. 높이가 97.5m 길이가 464m로 국내 최대규모의 콘크리트 중력댐인 충주다목적댐은 총저수량이 27억 5,000만 톤이며 댐의 연평균 유입량은 44억 8200만 톤이며 만수위 때의 수면 면적은 97km2로 우리나라 최대의 담수호라고 할 수 있다. 1985년에 완공된 충주다목적댐으로 인하여 충주시와 중원군, 제원군, 단양군의 101개 마을의 8,217가구가 물에 잠겼고 66.48km2가 수몰되었으며 수몰주민 49,627명을 위하여 곳곳에 수몰이주단지 및 단양신도시가 건설되었다. 댐의 건설로 13억 톤의 생활용수와 12억 톤의 관개용수, 8억 톤의 공업용수를 공급하게 되었고 홍수 조절량은 6억 톤이다. 시설발전용량은 40만kw로 연간 5천만 달러의 유류대체 효과를 얻게 되었다.

이 댐의 건설은 서울과 인천을 포함한 한강 유역권에 사는 사람들의 물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그 혜택은 외지 사람들이 더 많이 입었다고 볼 수 있다. 강 건너 봉골의 만마루마을은 아침 안개 속에 고즈넉하다. 그렇다. 흐르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이 행복감은, 강길을 따라 걸어가 보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고적 ‘조에 “탄금대는 견문산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가 져서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 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에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고 실려 있는 탄금대는 임진왜란 때에 신립 장군이 휘하에 8,000여 병사를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서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참패하자 천추의 한을 품고 투신 자결한 유적지이기도 하다.

임진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었는데, 그들은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내어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서야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넘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바로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조선의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탑평리에 이르러 칠층석탑을 마주한다. 중앙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이 칠층석탑은 높이가 14.5m나 된다. 중앙탑은 신라의 문성왕 때에 나라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신라 땅의 남쪽과 북쪽 끝에서 같은 시각에 출발한 두 사람이 어김없이 똑같은 시간에 이 탑에 당도했다고 한다. 신라 석탑 중에서 가장 높은 탑인 이 중앙탑은 이 고장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는 곳이 우리나라의 중심지라는 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큰 몫을 하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충주, 영주, 풍기, 단양, 제천 일대의 문화권을 중원문화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탑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고구려 탑이라는 설도 만만치 않다.“

 

서울 마포에서 소금 30가마를 싣고서 일주일 만에 이곳 목계에 이르면 그 소금 가격이 다섯 배나 뛰기도 했다는 이곳 목계에 소금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하면 사흘에서 이레씩이었다고 한다. 보통은 한 달에 한 번쯤 목계장이 섰는데, 날이 가물어 물길이 시원치 않거나 날이 얼어붙어 배가 오지 않을 때에는 두 달에 한 번씩도 섰다고 한다. 음성이나 괴산 등 충청도 지역과 경상도 북부 및 강원도 남부의 여러 읍인 영월이나 평창 등지에서 장꾼들이 몰려와 성시를 이뤘고, 장삿배에서 내려진 소금이나 해산물은 반드시 중개 상인인 도가都家를 통해 팔려나갔다.

목계나루가 번성하면서 이 고장에서는 뱃길이 무사하고 장사도 잘 되게 해달라는 기원을 담은 매년 정월 보름날부터 시작하여 2월 초순경까지 별신제別神祭를 올렸다. 제사는 부용 산신과 남한강 용신을 모셔 오는 강신降神굿으로 시작되고 굿과 함께 난장을 열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 아기 줄다리기를 하다가 나중에 어른줄다리기로 이어지는데, 줄다리기는 강을 경계로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길이가 100M나 되는 줄을 당겼다. 동편은 수줄이고 서편은 암줄이다. 교통이 편리하고 큰 나루터였으므로 구경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조금 부풀려진 말이겠지만 동쪽으로는 대관령 너머 강릉에서, 서쪽으로는 서울에서까지 줄꾼이 동원되어 수백 명의 사람들이 줄을 당길 만큼 규모가 컸다고 한다. “

 

강 건너 가흥창은 그 옛날의 번영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한가로이 남아 있다. 가흥리는 현재 200가구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로 쇠퇴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창고로 119칸에 달했던 창고가 있던 가흥창이 설치되어 충청북도 북부와 강원 남부 그리고 경상도 60개 읍과 에서 현물세로 거두어들인 쌀, 베, 특산물 같은 것을 모아 강물이 풀리는 3월과 5월 사이에 서울로 싣고 가는 항구였고, 배에서 일하는 수부만도 4,500명이 머물러 있던 곳이었다. '창倉'이란 나라의 세금을 한데 모으는 중심지가 되는 곳을 일컫는다. 그러나 가흥창은 남한강의 물길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의 선창나루 앞에 흐르는 남한강 기슭에는 아무런 탈없이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고 용왕에게 제사지내던 제단인 비원불과, 가흥창터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이 크게 번성했던 내륙 항구였을 텐데 이 터에는 지금 주춧돌 몇 개와 깨진 기왓장만이 뒹굴고 있다.“

 

남한강으로 섬강이 접어들다

남한강과 섬강이 만나 여주 쪽으로 흘러가는 흥호리에는 조선 전기 강원도 원주군 법천리에 설치되었던 조창인 흥원창이 있었다.

소양강창, 가흥창과 함께 좌수참에 소속되어 인근 고을 세곡을 운송하였던 흥원창에는 51척의 참선이 소속되어 있었다. 흥원창은 원주, 평창, 영월, 정선, 횡성 등 강원도 영서지방 남부 4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 보관하였다가 일정한 기일 안에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그 운송항로는 한강의 물길을 따라 서울의 용산강변에 이르는 것이었다. 소양강창과 마찬가지로 그 기능이 크지 않아서 조선 후기에 관선 조운이 쇠퇴하고 사선업자에 의한 임대운창이 널리 행해지면서 흥원창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고 지금은 1796년 정수영이 그린 『한임강명승도감』 중 흥원창 부분이 중앙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을 뿐이다.

한편 이곳 흥호리 부근을 사람들은 삼합지점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겨울철 강물이 얼면 담배 한 대 필 참에 3도 땅을 다 밟아볼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3도의 물이 한데로 모인다 해서 합수머리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모여지는 것이 물뿐만은 아니었다. 3도의 물산과 세미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어 남한강 뱃길을 따라 서울로 내려갔던 곳이었다.

 

아름다운 남한강의 물길과 역사문화유산이 만나는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