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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돌 대장님 : 한강기맥 8구간 - 이율곡과 이효석의 발자취를 걷다

산중산담 2013. 8. 6. 22:28

한돌 대장님과 함께한 한강기맥 8구간 - 청량봉에서 운두령까지(남진)

                              

날짜 : 계사년 하늘연달 아흐레  물날 한글날

누구랑 : 한돌대장님과 지맥 식구들

어딜 : 운두령 - 보래령 - 자운치 - 불발현 - 청량봉 - 미약골(홍천강) 

         거리 :  22.7km, gps상 기맥15km+접속 7.7km (한돌대장님 예상)

 

더 많은 사진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1262 에 있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한글날 휴일인데 갑자기 한강기맥 7구간에 못한 구간을 하자고 하니...

낙동정맥에 집중하기 위한다고는 하나 한돌대장님의 열정에 두손 들고 만다.

그것도 이번에는 평창군 진부에서 하룻밤을 자고 새벽에 출발하잔다.

처음부터 호강하자 시작한 한강기맥길이 아니었기에 어쩔수 없는 경우도 있으니....

 

한강기맥 8구간 

 

 

드레곤님과 상큼님, 그리고 한돌대장님, 그리고 우리 부부

그러나 이번 구간은 한돌대장님과 드레곤님, 셋이서 출발한다.

늘상 붙어 다니다가 셋이서 진부에서 맛본 삼겹살에 쇠주 한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술이 술을 마시듯 여유가 여유를 낳는가? 여유가 한잔 더?

다음날 오전 산행내내 목이 말라 고생좀 했으니... 산행시 술은 조금만 마시는 지혜가 필요할 듯

 

홍청군과 평창군의 경계인 운두령

雲頭嶺. 해발 1089m

강원도 홍천군 내면 자운리와 평창군 용평면 노동리 경계에 있는 운두령.

해발 1089m로 남한에서 차로 넘나드는 고개 중 만항재(해발 1330m) 다음으로 높은 고개다.

항상 운무(雲霧)가 넘나든다는 데서 지명이 유래했고 계방산을 오르는 기점의 하나다.

 

생태관리 센터가 있는 곳으로 부터 남진은 시작된다

 

조금 오르면 산불감시 초소

 

삼각점봉인 1273봉 - 평창군 용평면에서 봉평면으로 갈라지는 능선이 좌측으로 이어진다

 

표준지 19번 번호가 나무에 붙어 있는 곳에서 아침식사

 

헬기장인 1380봉

 

1247.9봉 갈림길 - 우측은 홍천군 내면 청계동으로 하산길

 

역시 강원도인가? 고도가 높은 만큼 벌써 단풍이..

 

아래로 도로가 지나가고 있는 보래령

보래령 터널

평창군 봉평면 덕거리와 홍천군 내면면 자운리를 연결하는 지방도 424호선 보래령 터널이 특히 폭설에 대비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그 동안 짧은 직선거리에도 불구하고 도로가 개설되지 않아 국도 31호선 운두령과 국도 6호선을 이용하여 41.8km를 돌아다녀야 했다.

이번 개통으로 거리가 33.44km가 단축되고 운행 시간은 50→10분으로 약 40분 단축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이보다 더 소통의 길이 어디에 있으리

 

보래봉

보래봉[ 寶來峰 , Boraebong ] 보래령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 위치한 산이다(고도:1,324m). 보래령(1,090m) · 회령봉(1,309m) 등과 능선이 연결되어 있다.

진한(辰韓)의 태기왕(泰岐王)이 신라의 침입을 받아 태기산으로 갈 때 보물을 가지고 이 산을 넘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보래령홍천군 내면에서 봉평으로 드나들던 고갯길이었다. 운두령 고갯길이 차도로 이용되면서부터는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 보래령 남쪽에는 산이름을 딴 보래동이 있었다. 이는 『조선지지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보랫골 또는 보래동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덕거리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덕거리 [Deokgeo-ri, 德巨里] (두산백과)

 

용수골 갈림봉의 역활도 하고 있다

용수골로 하산하면 보래령터널을 통과한 도로와 만나는데, 더 내려가면 평창군 봉평면 평촌리인데 그 곳 봉산서재에는 율곡선생과 華西 李恒老선생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율곡선생의 신주를 이곳에 모시게 된 유래는 바로 봉평이 율곡선생의 잉태지가 되기 때문이다.
일찌기 율곡선생의 아버지인 李元秀공이 인천지방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산수가 아름다운 이 봉평땅에 4년간 살았다고 한다.

인천에 있던 율곡선생의 아버지가 여가를 틈타 본가로 오던 중 평창군 대화면 반정(상안미)에 이르렀을 때 날이 저물고 피로에 지쳐

하룻밤을 쉬어 가려고 길가의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가 윺곡선생을 잉태하게 됐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글에서

 

용수골 갈림 안부

 

會靈峰 갈림봉 - 각 산의 영령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나?

 

삼각점이 있는 1091.8봉

 

자운치

紫雲치

자운리 도장골 과 평창 봉평 흥정리를 연결하는 고개인데 홍천군 내면 자운리 에는 아기장수 설화가 내려오는 곳이다.

어느 곳이나 아기장수 설화가 나오면 그만큼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든 그 기운을 죽여야 내가 살 수 있으니...

아래글에서....   설화는 설화일 뿐이지만 왜 설화가 설화로 끝나지 않는다는게 문제?

 

지도상 1076봉에 오르니 태기산의 풍차가 보이기 시작하고

 

고만고만한 봉우리 몇개를 넘으면 흥정산 갈림길이 나온다

흥정산 興亭山 1279m 갈림길  봉평면 흥정리에 있는 큰산

흥정계곡 평창군에서도 최상류지역에 있는 계곡으로 흥정산과 회령봉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여 형성된 곳이다.

이 곳에서 모인 물은 흥정천과 평창강을 따라 영월 동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 간다.

흥정계곡은 이러한 자연조건과 영동고속도로에서 15분거리 보광 휘닉스파크와 인접하고 있고,

흥정계곡 중간에는 허브나라가 위치하고 있어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고 한다.

 

불발현

불발현  불바래기

화명동. 흥정천 상류지역. 맥국과 예국이 전쟁을 할 때 봉화대가 설치되었던 곳

원래 횃불을 밝히면서 넘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학농민 항쟁때 동학군들이 최후의 격전지인 자작고개로 가기위해 이 고개를 넘어

우리가 7구간에서 걸었던 장곡현을 넘어 갔으나... 그곳에는 800여명의 영혼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고 한다.

 

요런 사연도

 

불발현에서 점심 후 도착한 청량봉

청량봉 淸凉峰

평창 봉평과 홍천 서석면의 경계이며 영춘지맥과 춘천지맥의 갈림봉으로 대단한 역활을 담당하고 있는 봉우리

신상경표 저자 박성태님이 이런 중요한 역활을 하는 무명봉에 서석면 청량리의 지명에서 청량봉을 붙였다고 한다.

 

저번 구간에 걸었던 구목령 방향 - 영춘지맥의 한강기맥 구간 출발점이다

영춘지맥

영춘지맥이란 영월지맥춘천지맥 두 지맥을 합하여 영춘지맥이라고 한다.

신산경표 저자 박성태님이 영월지맥과 춘천지맥을 종주한후 지맥이 갈리는 한강기맥의 청량봉~장곡현~구목령~삼계봉 구간 11km를 합하여 약 272km "영춘지맥"이라고 부르기로 했기에 우리도 영춘지맥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영춘지맥은 지맥중에서 가장 긴 지맥이다   http://www.baegdu.net/www/board.php?BID=recent&UID=156&mode=view

 

우리는 춘천지맥길로 저번구간에 이어 두번째로 들어선다.

춘천지맥

춘천지맥이란 한강기맥 상에 있는 청량봉(1,052m)에서 북쪽으로 분기한 산줄기가 하뱃재로 고도를 낮추다가 다시 솟구쳐

응복산(1,103 m), 백암산(1,099m), 가마봉(1,192m), 소뿔산(1,118m), 가마봉(925m), 매봉(800m), 가리산(1,051), 대룡산(899m),

연엽산(850m), 봉화산(515m), 새덕봉(488m)을 거쳐 춘천의 경강역 뒤편 북한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약 125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삼각점봉을 지나

 

춘천지맥과 미약골 갈림길 - 우틀하면 춘천지맥 우리는 좌틀하여 미약골로

 

미약골로 내려오면서 본 골짜기 숲

 

내려오는 길이 만만치 않다

 

드디어 두 계곡의 합수점이 나오면서 계곡산행은 시작되고

 

산길도 걷고

 

힘들게 내려오고

 

이런 아기자기한 암석폭포도 만나고

 

협곡같은 바위사이를 걷기도 하고

 

곰이라도 쉬어 감직한 요세?

 

잘못하면 그냥 지나칠뻔한 신선바위라 하고픈 거대한 바위

 

서서히 지는 석양에 비친 이 암봉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보여 주지 않는 봉인 것 같다.

그렇게 거대한 바위인데도 바위색이 너무 은은하여 꿈속에서나 본듯한 모습으로 그렇게 서 있었다.

그것도 서귀포의 외돌개처럼 홀로 그렇게 말없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 지금도 꿈속을 헤매고 있다.

물론 힘들게 내려오느라 잠깐의 착시현상일 수도 있겠지만.....

미약골 유래에 나오는 촛대바위 같기도 하고..

 

고도가 낮아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아 아쉽지만, 그래도 신록은 남아 있으니...

 

미약골 태마공원

 

미약골 유래

 

홍천 9경 중에 3경

 

홍천강 발원지

 

도로로 나왔지만? 버스를 탈 방법이 없다 - 하뱃재로 올라가는 방향

 

택시를 불러 서석까지

 

조금만 늦게 왔으면?

 

자작고개가 있는 서석 터미널에 있는 버스 시간표

 

서석에서 바로 5시 40분차로 나와 홍천에서 우등 직행으로 동서울에 도착 간단한 뒷풀이로 오늘의 여정을 마친다.

 

한강기맥은 오를수록 더 힘들어지고, 교통도 그렇고 모든게 악조건임에도

한돌대장님의 수고로 여기까지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 한구간만을 남기게 되니 마음이 가볍다.

운두령에서 출발할 때 보았던 단풍이 진작 필요한 미약골에서는 볼 수가 없어 약간 아쉬었지만

태고의 멋을 지닌 미약골에서 맛본 풍경은 작지만, 그래도 자연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구간임에 틀림없다.

청평호 직전 북한강과 합류하여 청평호로 사라지는 143km의 홍천강의 발원지를 걸어 봤다는데에 위안을 삼으면서....

 

모처럼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면서까지 끝낸 8구간  한돌대장님, 드래곤형님 정말 고생했습니다.

뒷풀이에서 응원해 주신 상큼님 고맙습니다.

 

                        초보산꾼        

 

 

      ------- 아 래 -------------

 

자작고개

 

고종 31(1894) 교조신원운동의 실패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포악한 정치가 원인이 되어, 동학접주인 전봉준이 나라 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게 하자는 내용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홍천 지방에서도 농민 운동이 크게 일어나 농민군의 일부가 관아를 공격하고자 산에서 내려와 장야촌까지 진군하였으나, 관군 총사령관 맹영재와 싸워 동학 30여 명이 전사하였다. 여기에서 패한 동학군은 풍암리에 집결하여 최후의 항전지인 자작고개에서 김숙현을 중심으로 관군과 싸웠으나 끝내 패하여 동학농민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1976년 자작고개에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유해 더미가 발견되었는데, 당시 사망자를 800여 명으로 추정하지만 부상자를 함께 묻었다고 하니 그 수는 더 많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지금도 풍암리 주민들은 전투에 동학교도로서 참가하였다가 전사한 사람들의 제사를 음력 10 20일부터 수일간 많은 집이 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동학군전적기념비가 있다.

서석면에서는 당시 전투에 참여했다 사망한 800여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유가족과 면민들이 사업비를 모으고 군의 지원을 받아 1977년 자작고개 1,220㎡의 부지에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건립했다.

 

홍천군 내면 자운리 아기장수 설화

옛날에 자운리에 김세훈이라는 사람의 막내동생이 서당에 다녔다. 이 아이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서당 앞에 있는 소나무에다 점심 그릇을 달아 매놓고 장난질을 치다 돌아오곤 했다. 그까짓 글은 배우나마나 하다고 하면서 소나무를 뿌리채 뽑아 거꾸로 심곤하는 힘센 장사였다.
하루는 동리 어른들이 모여 저 힘센 장사이니 나라의 임금이 알면 좋지 않다고 하면서 죽이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 아이는 원체 힘이 세어 죽일 방법이 없었다. 부모도 아들을 걱정하며 마을사람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아들이 차라리 없어져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눈치여서 이 장사는 자기 겨드랑이에 비늘이 두 개 박혀있는데 이것을 집게로 뽑아내면 죽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는 만약 내가 죽으면 강 건너에 있는 자기가 놀던 바위 옆에 묻어달라고 했다. 두 개 비늘은 힘센 장정에 의해 뽑혔고 이 장사는 죽었다. 묘를 유언대로 쓰고 나서 점을 쳐보니까 그곳은 귀신이 있어 좋지 못하므로 옮겨야 한다고 하기에 이장을 했다.
무덤을 옮긴지 얼마 안되어서 들판에 용마가 나타나 마구 울면서 날뛰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다.   http://www.oneclick.or.kr/contents/nativecult/area09.jsp?cid=70059

 

 

율곡선생 잉태지 이야기

 

봉평면 평촌리 봉산서재에는 율곡선생과 華西 李恒老선생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율곡선생의 신주를 이곳에 모시게 된 유래는 바로 봉평이 율곡선생의 잉태지가 되기 때문이다.
일찌기 율곡선생의 아버지인 李元秀공이 인천지방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에 산수가 아름다운 봉평에 4년간을 살았었다. 인천에 있던 율곡선생의 아버지가 여가를 틈타 본가로 오던 중 평창군 대화면 반정(상안미)에 이르렀을때 날이 저물고 피로에 지쳐 하루 밤을 쉬어 가려고 길가의 주막집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일찍기 혼자 몸이 되어 홀로 주막을 경영하던 주모의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므로 이상히 여겨 홀연 꿈을 깨고 일어나 앉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주모는 이것이 틀림없이 잉태할 꿈이며 비범한 인물을 하늘이 점지해 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을 얻을 기회가 왔구나 하였다. 주모는 자신의 처지를 돌이켜보니 혼자 몸이요, 그날 밤 대상이 될 사람은 주막에 묵고 있는 원수공 뿐이라 여러 모로 살핀 끝에 그 분이 예사 사람이 아니므로 여자의 수치심도 잊어버리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님 저를 물리치지 마십시오."하니 놀란 원수공이 "이 무슨 해괴한 짓이요, 내 그대를 행실 바른 여인으로 알고 묵으려 했는데 이러면 되겠오."하고 달래니 "손님 아무 말씀 마시고 하루밤만 정을 맺게 해 주십시오."하고 애걸 하였으나 원수공이 완강히 뿌리치고 말아 주모는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 부끄럽고도 서운한 마음으로 작별을 하는데 원수공의 얼굴에는 범할 수 없는 상서로운 기운이 어려 있는것을 보고 이는 도저히 내 운수가 아니구나 하며 체념하였다. 그 무렵 율곡선생의 어머니 師任堂 申氏는 강릉 오죽헌 언니집에 머물러 있었다. 역시 하루밤 꿈에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는 꿈을 꾸고 나서 즉시 귀가하려고 하였다. 언니는 며칠 더 머무르기를 간곡히 권하였으나 사임당 신씨는 이를 뿌리치고 그날로 140리 길을 걸어서 집에 돌아와 있던 중 마침 원수공이 도착했다.
신씨는 오랜만에 만난 남편을 대하여 반기기는 고사하고 말도 않고 표정에 변화도 없이 묵묵히 남편을 대하였다. 부인의 성품이 남다름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원수공 역시 아무 말 없이 그날 밤 잠자리를 같이 하였는데 율곡선생을 잉태하게 되었고, 그 후 9개월만에 강릉 오죽헌으로 이사하여 율곡선생을 낳았다 한다. 한편 원수공은 며칠을 이곳에서 머물다 임지로 돌아가던 길에 또 다시 반정 주막에 들게 되었다. 지난 일을 생각해 보니 사나이 대장부로서 아녀자의 청을 못 들어 준 것이 마음에 걸려 "여보시오 주모, 내 전날에는 대단히 미안하게 되었오. 오늘 밤 당신과 정을 맺을까 하오."하니 "어르신네의 말씀은 대단히 고마우나 지난번 하루 밤 모시고자 한 것은 홀로 사는 아낙네에게 하늘이 점시하신 비범한 영재를 얻고자 함이었는데 오늘 어르신네의 얼굴에는 전날의 상서로운 기운이 없어졌으므로 뜻을 받들 수 없습니다." 하며 말을 이어 "이번 길에 댁에서는 귀한 아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틀림없이 인시에 낳을 것이니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호랑이한테 해를 입을 것입니다. "하니 공이 당황하여"그 무슨 말이요,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앞일을 예견하는 당신께서는 그 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 것이니 제발 묘법을 가르켜 주시오." 했다. 그러자 주모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그러면 돌아가 사람을 천 명 살리는 셈치고 밤나무 천 그루를 심으십시오. 그랬다가 아이가 다섯살 되는 해 아무 날에 금강산에서 어떤 늙은 중이 와서 아기를 데려가겠다고 하면, 아기는 절대로 보이시지 말고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아기를 함부로 데리고 갈 수는 없다고 버티시고 덕을 쌓은 것을 보자고 하거든 밤나무 천 그루를 보여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아닌게 아니라 그 해 12 26일 인시에 사임당이 아들을 낳으니 원수공은 주모의 말이 맞았구나 싶어 강릉에서 남쪽으로 백리 쯤 되는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다.
그 후 율곡이 다섯 살이 되는 해 주막 여인이 말한 바로 그날 늙은 중 한 사람이 나타나 "금강산에서 살고 있는 중인데 이댁 아드님을 데려가려고 왔읍니다."하니 원수공이 "나도 덕을 쌓은 사람이니 우리 아들을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하자 중이 "무슨 덕을 쌓았다는 것입니까?"하고 반문했다. 이원수공이 "노추산에 밤나무 천 그루를 심었습니다." 하니 중이 "그렇다면 그것을 보여 주십시오."했다. 이원수공이 중을 데리고 산으로 가 밤나무를 하나하나 세는데 아무리 헤아려도 천 그루에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원수공의 얼굴이 사색이 되자 늙은 중이 "한 그루가 모자라니 기어코 아드님을 데려 가야겠읍니다."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갑자기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하고 소리치자 늙은 중이 혼비백산하여 큰 호랑이로 둔갑하여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한편 현종 3년 나라에서는 판관대가 이율곡선생을 잉태한 영지라고 하여 이 지역 산과 전답을 포함하여 사방 5리를 하사하고 감관을 파견하여 관리하고 제향을 드리도록 했으나 일제 후 잘 시행될 수 없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