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유형원과 허균의 발자취가 살이 있는 부안 우동리 우반동
자료를 찾아 올린다
갈 곳 없는 허균과 낙향한 유형원이 살았던 곳, 우반동(愚磻洞)
http://blog.daum.net/gbbae56/11806925
허균과 매창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이매창> 가곡원류]
1590년 쯤, 이매창(1573~1610)이 부안을 찾아 온 유희경(1545~ 1636)과 이별하고 지은 시조입니다.
18살의 여자가 36살의 남자를 그리며 지은 시죠.
요즘이라면 원조교제겠죠.
매창!
시골 아전 첩의 딸로 태어남이 기생의 삶을 살게 했겠죠.
이 시대엔 기생의 삶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릅니다.
교육을 받을 기회도 박탈당하고 가부장 사회에서 출산과 노동만 강요받았습니다.
칠거지악의 족쇄를 채워 여성의 삶이 무시당했던 시대였습니다.
기생은 예술을 익히고, 글을 읽고 시를 쓰고 노래와 사랑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대부의 노리개라는 신분의 한계는 있지만......
임진란으로 세상이 어수선한 시대에 매창은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살았답니다.
허균은 전라관찰사이던 형(허성) 빽으로 해운판관이 되었을 때 부안에서 매창을 만났습니다.(1601)
그뒤 공주목사에서 파직된 허균은 부안을 찾아와 우반동에 옵니다.(1608.8)
친구(김청)의 정사암(靜思庵)에서 12월까지 머무르다 한양으로 돌아갑니다.
그 기간 동안 매창과 시를 주고받고 거문고 연주와 술에 취해 살았겠죠.
바람둥이 허균도 매창과 동침하진 못했습니다.
헤어진 뒤에도 매창은 허균의 문화적 동지였다고나 할까요.
허균은 전라도 함열에서의 유배가 풀리자(1611) 11월에 우반동으로 다시 옵니다.
1613년까지 이곳에 살며 <홍길동전>을 지은 곳으로 보입니다.
허균이 살았던 곳은 어디일까요?
흔적은 어디에도 없지만 언덕에 올라 우반동을 바라볼까요?
야당인 東人이었던 아버지.
따랐던 형 허봉과 누나 허초희(난설헌)의 죽음......
학문과 세상을 가르쳐준 서얼 출신의 이달선생......
허균의 삶이 왜 자유분방했을까요?
왜 홍길동전을 썼을까요?
광해군은 왜 허균을 처참하게 죽였을까요?
유형원과 반계수록
1653년, 허균이 살았던 우반동에 32살의 젊은이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선대가 마련한 터전을 은둔지로 찾아옵니다.
모든 벼슬을 사양했습니다.
중농주의를 바탕에 둔 삶을 실천하고 방법을 써 두었습니다.
그의 기록이 영조 때 발간된 <반계수록>입니다.
반계서당.
유형원의 정자가 있던 곳은 아닐지......
우반동에 조용히 사는 유형원은 이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썼겠죠.
눈이 답답하면 우반동을 내려 보았겠죠.
고요가 머물던 이곳에 아이들이 찾아오면 글 읽는 소리가 돌담을 넘었을 겁니다.
유형원은 우반동 기슭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호가 '반계(磻溪)'가 된 거죠.
그의 집은 세월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의 흔적을 담은 낡은 함석집 한 채가 그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돌담 밖 모퉁이에는 안채 마당에 있었을 우물이 있습니다.
우물 옆 넓은 터에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만든 지 얼마되지 않아 어설프기만 합니다.
실학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재조명을 받으니 유형원의 삶도 다시 평가되었겠죠.
그는 책은 내지도 못하고 기록만 남겨두었습니다.
영조시대에야 그 기록을 모아 책으로 냅니다.
그게 <반계수록>이죠.
후세의 역사하는 사람들이 그를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하죠.
조선이 망할 때까지 허균은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그의 모든 것은 잊혀지고 지워져야 했습니다.
우반동에도 허균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진의 큰 산 앞 계곡에 정사암이 있었다는데......
http://blog.hani.co.kr/astrodome/16171
조선사상사의 르네상스를 열다 - 실학의 태동
조선후기의 사상적 변화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역저 <역사의 한 연구>에서 역사란 도전과 응전에 대한 기록이라고 했다.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시대와 사상가의 관계는 사상가가 시대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가 선각자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말하게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소가 살던 그 시대의 지적 분위기가 루소로 하여금 사회계약론을 쓰게 했다. 따라서 사상가는 시대의 산물이지 시대가 사상가의 산물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역사에서 패배한 사람들의 존재는 죽거나 묻혀지고, 현실의 벽에 막혀 은둔상태에서 자기 사상을 저술하는 것이 고작이다.
조선조에 있어서도 현실을 개혁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의지는 전통과 기득권에 집착한 보수주의자과의 수구적 다툼 속에서 결국 보수주의자들의 득세로 귀결되어졌다. 여러 개혁사상가들이 비참하게 죽거나 은둔생활 속에 저술활동으로 현실에 대한 미약한 반발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 개혁에 대한 성공과 실패의 가늠자는 방향성과 깊이 그리고 속도와 방법 등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여기서 조선후기의 사상적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 고려시대를 지배한 사상은 불교이고 조선시대를 지배한 것은 주자학(성리학)이다. 이 유교적 문화유산의 정수는 바로 역(易)의 논리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를 아무리 독립적인 입장에서 이해한다 할지라도 중국문화권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역의 본질은 중국 개혁사상으로서 우주의 지속적인 변화를 전제한다. 거기에 이원론적 입장에서 우주질서를 대립적 존재보다는 조화의 과정으로 보며, 인간은 그러한 우주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역의 이원론은 평등개념은 아니다. 이러한 역의 논리가 조선조 개국명분인 역성(易姓)혁명론으로 나타나고 조선조를 받쳐주는 근간이론이 된다. 즉 창업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며 정의로운 사명이므로 개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학은 너무 예(禮)에 치우쳐 탁상공론의 담론으로 비생산적 당쟁을 낳는 필연적 조건을 안고 있었다. 조선조, 이러한 성리학 중심의 사회에서 중종 때 조광조의 개혁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주자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명리에 지나치게 집착함으로써 현실과 이상의 괴리, 무조건적인 공맹의 논리 그리고 경륜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개혁은 37세의 나이에 저자거리에서 육신이 찢기는 비극적 종말과 함께 물거품이 되었다.
이어 선조대인 1589년, 정여립-조선의 크롬웰이라 불리는 그는 ‘왕도 백성이 뽑자’라고 주장하며 왕정의 비생산성과 비합리성을 타파하고자 했다-과 허균 등도 시대적 관념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고려를 뛰어넘는 개혁 의지가 주역(周易)이었고 이 역의 논리가 홀씨가 되어 조선개국의 명분을 제공했지만, 가치배분이 불공평했기 때문에 지배계층에겐 역성혁명, 민중에겐 점이나 택일 등 무속적인 상태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역(易)의 논리를 넘어서는 17세기 중반 한국 조선사상사에 르네상스를 연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이 등장하는 것이다. 18세기 실학자 성호 이익은 “국조 이래로 시무를 알았던 분으로는 오직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 선생 두 분이 있을 뿐이다. 율곡의 주장 태반이 시행할만하고 반계의 주장은 그 근원이 궁구하고 일체를 새롭게 하여 왕정에 시초를 삼으려 했다”고 하면서 반계 유형원을 탁월한 경세가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고향의 아들에게 유형원의 저서 <반계수록>을 읽을 것을 간곡히 권하고 있고 연암 박지원은 허생전을 통해 당대의 경세가로 반계 유형원을 주목했다. 위당 정인보는 조선후기 실학의 제 일조(祖)가 반계 유형원, 제 이조가 성호 이익, 제 삼조가 다산 정약용이라 규정했다. 다산 정약용은 반계 유형원을 회고하기를 “정성스럽고 간절하다던 경세의 뜻, 홀로 반계 선생께 보겠네”라고 썼다.
사가들이 이와 같이 평가한 조선의 개혁가이자 사상가인 반계 유형원! 그가 저술한 반계수록을 통해 토지, 교육, 과거, 관직 제도 등 시대 고민을 배경삼아 치밀하게 사회경제 문제를 고민하고 대책을 제시했던 사람, 반계 유형원! 스스로 쓴 발문(跋文)에서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현실을 강조하고 과거 위주의 공부보다는 실제 현실에 필요한 정책을 제시하고자 했던 사람. 훗날 반계 유형원의 꿈과 개혁안은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을 거쳐 개화파까지 전승되었고, 시폐(時弊)에 대한 지적은 갑오경장의 지표로, 토지에 대한 개혁안은 갑오농민 혁명으로, 이후 3백년 동안 조선후기 사상사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반계 유형원, 삶의 족적을 따라서
유형원은 조선중기의 중농주의 학자이자 실학자이다. 본관은 문화, 자는 덕부, 호는 반계이다. 서울 정릉 외가에서 출생했고 2세 때 북인이었던 부친 유흠은 28세 나이로 광해군 복위 모의사건인 어유당 유목인의 모사에 연루되어 장살되었다. 5세 때 외숙 이원진(유형원의 어머니는 참찬을 지낸 여주 이씨 이지완의 따님이다)과 고모부 김세렴에게 글을 배웠다. 외숙 이원진은 성호 이익의 당숙으로 하멜 표류사건 당시 제주 목사로 있었고 고모부 김세렴은 함경도와 평안도 감사를 역임하고 대사헌까지 지낸 고관대작이다. 일찌기 부친을 여의었지만 조부 유성민(정랑, 참판을 지냄)의 보살핌 아래 명문사대부 가문의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인척들의 지도로 학문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15세 되던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을 피해 강원도 원주로 피난을 갔고 다음 해에 양평 땅 지평(砥平) 화곡리로 이사하였다. 18세에 영의정 심수경의 증손녀와 결혼했고 다시 이듬해인 22세 때 경기도 여주 백양동으로 이사가 살았다. 함경감사로 나간 고모부 김세렴을 찾아가 함경도 일대를 유람했고 얼마 뒤 그가 평양감사로 전출되자 평안도 일대를 여행하면서 역사적인 옛터와 국토를 유람했다. 23세에 조모상을 치루고 27세에 모친상을 치루는 가운데, 명이 완전히 쇠하고 청이득세한 정세 속에서 경상도를 여행하였고, 29세에 충청도를 여행하는 한편 30세 때에 처음으로 금강산에 올랐다.
조부의 명령을 따라 한 두 차례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한 채 조부 유성민이 세상을 떠난다. 그는 연이어 9년 상을 치룬 가운데 31세 <반계수록>의 초안을 잡고 32세 때에(1653년 효종 4년)에 조부의 농장이 있던 보안현 우반동에 내려온다. 우반동의 대부분 땅은 그의 9대조 유관이 세종대왕에게 받은 사패지였다.
낙향한 그는 반계서당에서 글을 읽고 책을 쓰면서 때때로 서울과 지방을 여행했는데 이는 세상을 제대로 읽으려는 그의 노력이었다. 그는 31세에 시작해 49세 까지 19년 간에 걸쳐 반계서당에서 조선 최고의 명저인 <반계수록>을 집필하게 된다.
33세, 34세 연이어 상경해 진사시에 응시했고, 35세에는 <여지지(與地誌)>라는 지리책을 저술하였고, 36세 호남지방 여행, 38세 정동직, 배상유 등 학자들과 성리학에 관한 토론을 통해서 그의 철학을 정립했다. 38세 또다시 호남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풍토와 문물에 대해 두루 살피고, 39세 딸을 시집보내러 서울에 왔고, 40세 영남지방을 두루 여행했다. 41세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나라를 부국강병할 방책인 <중흥위략(中興偉略)>이란 책을 저술했으나 미완성이었고, 실제로 효종대왕의 북벌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을 실전에 옮기고자 우반동 벌판에 준마를 기르고 마을사람들에게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해 주며 말을 타고 하루 3백리 달리기 연습을 하는 등 군사 훈련을 시켰다.
그는 45세에 외숙이자 스승인 이원진의 장례 참석차 서울에 왔고 근기학파의 영수인 미수 허목 선생을 뵈러 연천에 갔다. 그것은 1665년의 일로, 71세의 대학자 허목과 44세 반계의 만남은 근기학파와 실학파의 첫 만남이자 연결점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허목 선생은 반계가 임금을 도와 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는 인재임을 칭찬하였고 세상을 개혁할 뜻에 의견이 모아졌다.
다음 해에도 그는 연천을 찾았고, 49세 1670년에 마침내 <반계수록> 26권 13책을 완성하였다. 그는 이 책이 미쳐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채 52세인 1673년 3월 19일 새벽 아까운 나이로 우반동 반계서당에서 눈을 감는다.
조선 후기 사회가 낳은 개혁사상가-꿈과 좌절 속에서
그러면 실학의 비조이자 조선의 개혁사상가인 반계 유형원을 낳게 했던 조선의 17세기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1592년(임진왜란) 1598년(정유재란)에 걸친 7년간의 임진대전쟁 그리고 1627년(정묘호란) 1636년(병자호란) 인조가 청 태종에게 맨발로 무릎 꿇고 3배를 올린 삼전도의 굴욕 등 50여년 간의 전쟁은 조선을 황폐화시켰다.
조선조 봉건지배 하에서 백성들은 소위 입안(立案), 궁방전(宮房田), 둔전(屯田) 등 전국의 토지가 왕실, 국가기관, 서원, 중앙귀족 대관들 심지어 지방 양반 관리들에게 대부분 점유되어, 정작 농민들은 경작해야 할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노비로 전락하였다.
봉건국가의 통치는 전세(田稅)를 비롯 가렴 잡세의 명목은 수십 종이고, 그나마 양인 농민들도 막대한 군포(軍布)의 부담 속에서 수탈과 병란을 겪어야 했다. 국가는 아무런 대책 마련도 못하고,지도층은 백성들에 대한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었다
반계는 그의 저서 <반계수록> 발문(跋文)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벼슬을 하는 양반들은 과거를 보아 출세를 하고, 현행 악습들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으로 확신하며, 벼슬을 하지 않은 양반들은 혹 독선주의의 도덕을 운운하기는 하나, 국가사회에 대한 고려는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정치는 날로 어지러워지고 백성의 생활은 날로 파탄되어가고 있다.” 반계 유형원! 이 모순된 사회체제와 상황에 증오와 분노로 떨면서도 기존의 사회체제의 벽을 넘을 수 없는 좌절감에 빠진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행동할 수 없는 지성, 그는 그것의 한계를 느끼고 수 만 권의 장서와 함께 우반동으로 내려온다.
글=김경민(본보 상임이사)
바디재 정상에서 바라본 우반동. 멀리 안개 속에 곰소 만이 보인다. 옥녀봉과 매봉이 좌청룡 우백호로 우반동을 감싸 안고 멀리 천마산을 안산으로 하여 한 눈에 보기에도 길지 중의 길지다. <황형준 기자>
부안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활성화를 위해 매창별곡 연작에 이어 반계 유형원에 관한 글 ‘우반동의 꿈’을 세 차례에 걸쳐 보내드립니다. <편집자 드림>
아름다운 포구와 절경의 산수 우반동
변산은 병란과 기근을 피하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땅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당이 우반동이다. 즉 반계 유형원이 기거하던 반계골이다.
우반동을 살펴보면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바디재에서 바라본 마을 앞은 툭 틔여 있어 들고 나는 조수간만을 볼 수 있으며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를 장천(長天)이라 불렀다.
옥녀봉(432.7미터) 아래에 형성된 우반동은 상여봉(390미터)으로 연결되어 있고, 상여봉에서 내려온 물줄기가 남포리와 경계를 형성해 좌청룡을 이루고, 옥녀봉에서 내려온 한 줄기가 매봉(263. 8미터)을 만들어 우백호를 이루고 한편, 남쪽엔 안산으로 천마산이 있다. 천마산과 남포리 산 사이의 낮은 부분이 실개천을 이루는데 위에서 말한 장천이다. 주변의 산들에 둘러쌓인 분지는 풍수적으로 아주 길지(吉地)를 이루어 산수가 수려하고 비옥한 감춰진 땅으로 신비와 기적이 숨겨져 있는 듯한 형세를 취하고 있다.
우반동의 산수가 낳은 사상과 문화
산과 바다와 기암절벽, 폭포, 강이 어우러진 선경(仙景) 속에서 허균은 그의 이념과 사상을 홍길동으로, 반계 유형원은 반계수록으로, 박지원은 허생전으로 시대의 철학과 사상을 이곳 우반동에서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17세기 중엽 조선후기 사상의 조류를 만들어낸 심오한 철학과 사상 그리고 그 실천적 모델로써 우반동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부안의 여류 가객 이매창과 허균의 이루지 못할 사랑이야기가 있었고, 임진·정유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의 거듭된 병란 속에서 변산을 중심으로 도적들이 할거했다. 명종 때에는 민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서얼 차별 등으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다. 이에 더해 관리들의 가렴주구와 도탄에 빠진 국정의 난맥상은 체제에 대한 불만을 분출시켜 마침내 열혈남아이자 개혁사상가인 허균으로 하여금 홍길동전을 쓰게 했던 곳이다.
그리고 49세(1618년)로 처형당한 허균이 가고 35년이 흐른 뒤 1653년 반계 유형원이 이곳 우반동을 찾아든 것은 이 땅의 기운과 필연적인 뜻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배태한 땅 우반동을 살펴보면 바다에 인접해 있어 왜적의 침입을 수없이 받았을 것이고 이에 대한 마을 평안을 비는 유명한 우동리 당산제가 있다.
그리고 장천 상류까지 배가 닿을 수 있어 한양으로 실어나를 수 있는 수송이 편해서인지 도자기를 만드는 수십 기의 도요지가 발달해 있어 유명한 분청사기를 탄생시킨 땅이기도 하다. 또한 변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인 선계사가 있었고 이곳에서 시작하는 선계폭포가 또한 웅장한 자태로 장천에 맑은 물을 흘러보내고 있다. 또한 군사상 요충지로써 배를 만들고 해군을 훈련시키던 검모포진(지금의 구진마을)이 있다. 그리고 우반동 부안 김씨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종중 문고가 보관되어 있고, 또한 가까운 거리에 내소사와 월명암 등 종교적 성지들이 있는 곳이다.
선조들이 말하는 우반동의 그 때 그 모습
그러면 우반동에 대한 옛 기록을 살펴봄으로써 17세기 중엽 우반동의 실제 모습을 더듬어 보자.
조선후기 동국여지지(東國與地誌)에 의하면 “변산(邊山)의 동남쪽에 있는 우반동은 산으로 빙 둘러싸여 있으며 가운데는 평평한 들판이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고 봄마다 복사꽃이 시내를 따라 만발한다”라고 했다.
조선중기 학자 권극중(1560~1614)도 “변산의 남쪽에 우반이란 마을이 있는데 아름다운 포구와 산수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라고 찬탄하고 있다. 실제로 우반동에 거주했던‘홍길동전’의 작자 허균(許筠 1569~1618)은 ‘중수정사암기(重修靜思菴記)’에서 우반동의 수려한 경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자세히 서술한다. “포구에 있는 꼬불꼬불한 작을 길을 따라 우반동으로 들어가자 시냇물이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 속으로 쏟아진다. 시내를 따라 채 몇 리도 가지 않아서 곧 산으로 막혔던 시야가 탁 트이면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깍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마치 봉황과 산새가 날아오르는 듯 치솟아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동쪽 등성이에는 소나무와 회나무들이 울창하여 하늘을 가리었다. 걸어서 시내를 따라가다 동쪽으로 건너 늙은 당산나무를 지나 정사암에 이르렀다.
암자는 겨우 네 칸이고 깍아지른 듯한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앞쪽으로는 맑은 물이 내려다 보이고 세 봉우리가 우뚝 마주 서 있다. 폭포가 푸른 절벽에서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가 물을 마시러 시내로 온 것 같았다.”
또한 선대로부터 받은 우반동 토지를 농장으로 일구었던 반계의 조부 유성민이 후일 우반동 김씨의 시조인 김홍원(金弘遠)에게 준 매매문서에 우반동의 경치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대저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나 앞은 탁 트여있고 조수(潮水)가 흘러들어 포(浦)를 이룬다. (...)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마치 두 손을 공손히 마주잡고 있거나 혹은 고개를 숙여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혹은 나오고 혹은 물러나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다. 아침의 구름과 저녁의 노을이 자태를 드러내면 진실로 선인(仙人)만이 살 곳이요 속객(俗客)이 와서 머물 곳은 아니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장천(長川)이 북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향하니 이로 말미암아 동서가 자연히 나뉘는데 이 장천이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근대화에 망가져 가는 역사적 유산
그런데 개혁사상의 산실이자 신비의 땅인 우반동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바디재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뚫려 멀리서 바라본 옥녀봉, 매봉의 모습이 흉물스럽다. 또한 농사짓기 위한 우동저수지 축조로 아름답던 장천의 맥은 끊어지고 여기저기 잡스런 시설물이 들어서 있는가 하면, 산중턱에 자리잡은 반계서당은 그야말로 처참하다. 반계 선생이 마시던 우물터, 돌아가신 뒤 가매장했던 묘자리가 전혀 보존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고, 요즘엔 농촌체험마을 시설들이 들어서서 옛것에 대한 느낌이 전혀 없다. 한쪽으로 밀려나 있는 듯한 반계 유허비를 보면서 우반동 역사에 대한 죄스런 마음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성 싶다.
들여다 본 반계수록 26권 13책
이제 반계 유형원이 쓴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대해 알아보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유형원 그는 왜 농촌생활을 택하여 우반동으로 왔고 그가 개혁하고자 했던 당시 봉건사회와 양반사회에 대한 그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반계수록 전편에 걸쳐 그의 사상과 실천 목록이 있다. 26권 13책으로 구성된 이 책은 권 1~8은 전제(田制), 권 9~12는 교선(敎選), 권 13~14는 임관(任官), 권 15~18은 직관(職官), 권 19~20은 록제(綠制), 권 21~24는 병제(兵制), 권 25~26은 속편(續篇)이다. 속편으로는 의예(儀禮). 풍속(風俗). 도량형도로(度量衡道路). 노예(奴隸). 양노(養老)에 관하여 언급했다. 각 주제별로 절반은 중국, 한국의 사례를 모아서 반계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고설(攷說)로 실제로는 13권이다.
말미에 보유(補遺)를 붙였는데 군현제(郡縣制)에 대한 내용이고 그밖에 이미, 오광운 등의 서문, 발문 그리고 반계 자신의 간단한 발문이 붙어 있다.
1652년 효종 3년에 쓰기 시작, 1670년 헌종 11년에 마친 19년 간의 걸친 대 역작 반계수록은 반계 사후 100년이 지난 뒤에야 빛을 보게된다. 1770년(영조 46년)에 양득중(梁得中), 홍계희(洪啓禧) 등의 추천으로 왕명에 의해 경상감영 관철사 이미가 목판본 26권 13책을 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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