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다섯 번 째 -군산에서 서천을 지나 보령으로 가는 길-

산중산담 2014. 9. 9. 09:10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다섯 번 째군산에서 서천을 지나 보령으로 가는 길

목포에서 서해안을 따라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서해안 걷기 다섯 번째가 6월의 네 번째 주에 군산을 지나 서천지역을 걷게 됩니다.

일제시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군산의 근대문화유산들을 보고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장항에 이를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련소가 있는 장항을 지나 마서면 송석리에 이르고 장구만을 지나 비인을 거쳐 서면의 흥원항과 춘장대 해수욕장으로 이어질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군산에서 맛보게 될 이성당빵과 해산물이 풍부한 서천의 흥원항이 우리가 걸어가면서 만나게 될 지역입니다.

군산의 근대문화유산과 만나다.

<여지도서>풍속조에 실린 군산시 성산면의 금강을 굽어보고 있는 산이 오성산(五城山)이다. 오성산은 성산면 성덕리와 나포면 서포리 경계에 있는 높이 266미터의 산이다. 조선조 때 봉수대가 있었던 곳으로 동쪽으로는 불지산 봉수와 서쪽으로 옥구 화산 봉수에 응하였다. 이 오성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치러 왔다가 안개가 자욱하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를 못하였다. 이때 안개 속에서 다섯 노인이 나타나자 길을 몰라 당황했던 소정방이 그들에게 길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를 징벌하러 왔는데 어찌 우리들이 길을 가르쳐 주겠느냐하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화가 난 소정방은 그 자리에서 노인들의 목을 쳐서 죽였다. 그뒤 백제를 함락한 소정방은 그 노인들을 성인이라고 칭송한 뒤 제사를 지내주었고 그때부터 이 산이 오성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오성산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지금까지도 다섯 노인의 무덤인 오성묘五聖墓가 남아 있다고 실려 있다.

오성산 자락 금강변에 서시포(西施浦)에서 어느 때부턴가 서포리로 이름이 바뀐 마을이 있다. 서포리는 그 당시만 해도 배를 정박하는 곳으로서 강경황산과 함께 강가의 이름난 마을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옛날에 서시(西施 월나라 여자로 매우 아름다웠다고 하여 미인의 대명사가 됨)가 이곳에서 출생하였으므로 그대로 지명으로 삼았다는 말이 전해지지만 ?한국지명총람?에는 서쪽 갯가가 되므로 서포라 지었다고 전한다.

지금은 군산시에 딸린 하나의 면인 임피 서편에 있는 옥구읍은 만경강의 끝자락인 서해와 인접하였으며, 백제 때의 이름이 마서량현(馬西良縣)이다. 옥구읍 상평리 동문 밖의 옥구향교에는 자천대(自天臺)가 있다.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이 당나라에서 학문을 닦고 돌아왔을 때 세상이 몹시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하자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독서로 시름을 달랬다는 곳이다. 건평이 30평쯤 되는 이 건물은 원래는 지금의 군산 비행장 자리에 있었는데 식민지 시대 말기에 옥구군 유생들이 옥구읍 상평리 향교 옆으로 옮겼다. 옮기기 전의 자천대를 이곳 사람들은 원자천대라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자천대의 최치원이 앉았던 바위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멱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중환이 ?택리지?에 기록한 내용과는 조금 다르다.

최치원의 자취 서린 자천대

자천대라는 작은 산기슭이 바닷가로 쑥 들나왔고, 그 위에 돌로 된 두 개의 돌 농()이 있었다. 신라 때의 최고운(崔孤雲)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와서 농 속에다 비밀문서를 보관하였다는데, 농이란 것이 마치 큰 돌과 같았다. 산기슭에 버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열어보지 못하였고, 혹 이를 끌어 움직이면 바다로부터 바람과 비가 갑자기 왔다. 마을 백성은 이 농을 이롭게 여겨서, 날씨가 가물 때 수백 명이 모여 큰 밧줄로 끌어서 움직이면 바다에서 비가 갑자기 와서 밭고랑을 흡족하게 적시었다. 그런데 사객(使客 임금의 명을 전달하거나 시행하는 사람)이 옥구현에 올 때마다 번번이 가서 구경하게 되기 때문에 고을에 폐가 될까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는 이곳에 정자도 있었으나, 100년 전에 정자를 허물고 돌 농도 땅에 묻어 자취를 없애 버려서 지금은 가서 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

옥구군 임피에서 태어나 태평천하」 「레드메이드 인생등 수많은 작품 속에 풍자와 해학 그리고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한 소설가 채만식(蔡萬植)은 나라 안에서 이름이 가장 아름다운 강 금강을 그의 소설 탁류의 서두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금강...

이 강은 지도를 펴놓고 앉아 가만히 들여다보노라면 물줄기가 중등께서 남북으로 납작하니 째져가지고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게 벌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번 비행기라도 타고 강줄기를 따라가면서 내려다보면 또한 그럼 직할 것이다. 저 준험한 소백산맥이 제주도를 건너보고 뜀을 뛸 듯이, 전라도의 뒷덜미를 급하게 달리다가 우뚝또 한번 우뚝 높이 솟구친 갈재와 지리산, 두 산의 산협 물을 받아 가지고 장수로 진안으로 무주로 이렇게 역류하는 게 금강의 남쪽 줄기다.

.....

여기까지가 백마강이라고, 이를테면 금강의 색동이다. 여자로 치면 흐린 세태에 찌들지 않은 처녀 적이라고 하겠다.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웅진)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 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함창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의 꿈은 깨어진다.

물은 탁하다. 예서부터 옳게 금강이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시가지) 하나가 올라앉았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그렇다. 채만식은 소설 탁류에서 금강을 눈물의 강이라고 명명하였는데, 당시의 군산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급하게 경사진 강 언덕비탈에 게딱지 같은 초가집이며 다닥다닥 주어 박혀 언덕이거니 짐작이나 할 뿐이다. 이러한 몇 곳이 군산의 인구 칠만 명 가운데 육만 명쯤 되는 조선사람의 거의 대부분이 어깨를 비비면서 옴닥옴닥 모여 사는 곳이다.

대체 이 조그만 군산바닥이 이러한 바이면 조선 전체는 어떠한 것인고, 이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승재는 기가 딱 질렸다.”

189952일 부산원산제물포경흥목포진남포에 이어 조선에서 일곱 번째로 개항한 항구 군산은 외국인에게 개방되기 전까지만 해도 옥구군에 딸린 조그마한 포구였다. 백제 때의 군산은 마서량(馬西良)이었고 고려 공민왕 때인 1356년에는 금강 하구에 포구를 설치하여 개성으로 가는 배들을 머무르게 하면서 진포(鎭浦)라고 불렀다. 1397년에는 군산진이 되었다. “군산진, 관아의 북쪽 30 리에 있다. 첨사. 무관. 3품이다. 군관 10명이다. 지인 6명이다. 사령 7명이다.‘라고 영조 때 편찬 된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 군산은 191010월에 군산부로 승격되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

한산면의 건지산에는 1939년에 사적 제60호로 지정된 건지산성(乾至山城)이 있다. 고창의 모양성이나 전남의 낙안읍성, 서산의 해미읍성처럼 잘 정돈된 성은 아니지만, 백제 말기 부흥운동의 중요한 거점으로 보는 학설이 있는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성이다.

둘레가 2,061자에 샘이 일곱, 못이 하나에 군창이 있었던 이 성은 백제 초기 또는 통일신라 때에 쌓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는 이 성을 임존성과 함께 백제가 망한 뒤에 의자왕의 넷째아들 풍과 백제의 장군 복신 그리고 도침 등이 백제의 부흥운동을 벌였던 주류성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李道學) 교수는 오히려 부안의 우금산성(禹金山城)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건지산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로 빚는 청주인 한산 소곡주는 진도 홍주선산 약주서산 두견주안동 소주동래산성 막걸리와 함께 임금에게 올리는 진상주였다. 하루 종일 앉아서 마시다가 다음날 봇짐까지 잃었다고 하여 앉은뱅이 술이라고 불릴 만큼 감칠맛 나는 소곡주를 빚으며 방아야 방아야 소곡주 방아야 이 소곡주 먹고서 노래나 불러보세라고 노래했다고 하는데, 이곳 한산에서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자주독립운동을 펼친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이 태어났다.

한편 그 유명한 전어축제가 열리는 곳이 서천의 흥원항이다. 전어는 빛깔은 푸른빛이 짙으며 누런빛을 띄고 있으며 등에는 갈색반점으로 된 세로줄이 여러 줄 있다. 옆구리에는 큰 흑색반점이 있고, 배 쪽은 희며 주둥이는 아래턱의 끝보다 좀 나와 있다.

고대 중국의 화폐모양과 유사하다 하여 전어(錢魚)라 불리는 이 전어(錢魚)의 참맛은 9월 말 부터 11월초까지가 최고인데, 전어 회와, 회 무침, 그리고 구이 등의 다양한 요리방법이 있다. 예로부터 집나간 며느리도 전어錢魚 굽는 냄새 맡으면 집으로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냄새와 맛이 뛰어나다.

어슴푸레 펼쳐진 큰 바다 은은하게 비치는 작은 섬” <여지도서>에 실린 비인庇仁현의 형승이다. “토지는 메마르고 백성들은 검소하다. 고기잡이와 농사에 힘을 다한다.”라고 실려 있는 비인을 두고 이승소李承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 조각 높은 성이 바닷가를 굽어보고 있는데, 푸른 하늘은 물과 같고, 물은 하늘과 같구나. 바람 불어오니 끌어 밀려오는 조수소리 장하고, 해 뜨면 청홍 빛 신기와 임한다. 작은 섬에 뜬 구름은 암담暗淡한 연기요. 큰고래 물거품을 희롱하니 눈 더미가 무너지는 듯, 금자라 등 위에 신선의 반려들이 홍진紅塵 속에 세어 빠진 살쩍 보고 웃으리라.“

비인의 원래 이름은 비중현庇衆縣이었다.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서림군의 속현으로 두었다가 조선 태종때 현감을 두었고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서천군에 편입시켰다.

마침내 우리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게으름을 부린다 해도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지 않는다.” 라고 권터 아이히<두더지>들에서 얘기 하고 있는데, 시간이 가는 것인지 정지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가고 있다고 믿는 것인지 모르지만 시간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게 사라져 간 것들 중에서 두고두고 아쉬움을 주는 것이 잃어버린 왕국 백제일 것이다.

<잃어버린 왕국>이라고 표현되는 백제의 땅에서 아름다운 백제탑을 찾기란 쉽지가 않은데 그것은 그만큼 백제의 멸망이후 백제의 문화재들이 수난을 받아 사라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남아 있는 것은 부여 정림사지에서 만나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나 왕궁리 오층석탑, 은선리 삼층석탑, 장하리 삼층석탑과 미륵사지 석탑 등 몇 개가 남아 있을 뿐인데 그 중 하나를 이곳 비인에서 만날 수가 있다. 서천군 비인면 성북리 마을 한 귀퉁이에 우뚝서있는 비인 오층석탑은 서천군에 있는 단 하나뿐인 보물(224)이다. 높이가 6.2m인 이 탑은 백제탑의 전형을 이룬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세부양식을 가장 충실하게 모방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기단이 협소하고 2층 이상의 탑신석들이 지나치게 감축되었으며 각층의 옥개석들이 지나치게 커서 안정감을 잃고 있다. 조성연대가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현재 마을 귀퉁이에서 쓸쓸히 서 있지만 백제의 여인처럼 바라볼수록 아름답다.

무라야마 지준이 지은 <조선의 풍수>에는 종천면 신검리의 뒷산은 웅대한 내룡來龍과 청룡靑龍. 백호白虎 및 주작朱雀의 산수로 둘러싸인 풍수상 형승形勝의 산이어서 조선 제일의 명당이라고 알려졌다. 그래서 이 지방의 유력자는 물론 각지의 부호들이 모두 군침을 삼키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산에 묘를 쓰면 자기들이 유리걸식遊離乞食해야 할 액운에 빠지게 된다고 믿고 묘지 매매를 극력으로 반대했기 때문에 아직껏 그대로 있다고 하였다. 천하의 길지吉地란 어떠한 곳인가? 천지의 정기精氣가 모였다가 생기를 발하는 곳이다. 풍광명미風光明媚해 상탄賞歎해 마지않을 만한 형승形勝의 땅이며. 영초이수靈草異獸가 나타나는 곳이며, 생활의 발달 신장을 축복할만한 땅이라고 한다. 그런 땅을 찾는 것이 소원이었던 사람들도 일제 때였는데도 지역 사람들의 집단 반발에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때나 지금이나 묘를 잘 쓰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던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비인만의 맨 끝자락에 천 오백년 전에 세웠던 정자인 동백정이 여러 번의 변천과정을 이어오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 마량리에는 마량진터가 있는데 원래 남포에 있던 것을 효종 7년인 1656년에 이곳으로 옮겼다, 첨사가 1사람, 싸움배 1, 방비를 하는 배가, 1척 짐배가 1척 기다림 배가 3척이 있었다.

마량포구를 감싸고 있는 해안 언덕에 500여년 동백나무 80여 그루가 있는 동백 숲이 있고

동백정에 올라 바다를 보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와 조그만 무인도가 하나 눈에 들어온다. 동백정에서 바라보는 겨울바다는 나름대로 운치가 있어 겨울인데도 찾는 사람이 많다.

동백나무는 남해안에 자생하는 난대성 상록활엽수인데 군락을 이루게 된 내력이 재미있다.

500여년 전 마량의 수군첨사가 꿈에 바닷가에 있는 꽃뭉치를 많이 증식시키면 마을에 항상 웃음꽃이 피고 번영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고 바닷가에 가보니 동백이 있어 그것을 증식하여 심었더니 이렇게 멋진 동백나무 숲을 이루고 동네에 웃음꽃이 피게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서쪽은 추워서 동백나무가 거의 없고 동쪽사면으로 주로 남아 방풍림 구실을 하고 있다.

마량리 포구는 한국 최초의 성경 전래지가 있고, 월남 이상재 선생의 고향이기도 하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충청도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