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마곡사 솔바람 길과 공주 공산성을 거닐다.
추석이 마무리 된 9월 13일(토요일) 역사의 고장 공주를 갑니다. 마곡사의 솔바람길 3코스(송림숲길, 마곡사, 천연송림욕장, 은적암, 백련암, 아들 바우, 나발봉, 장군샘, 군왕대)를 지나 마곡사에 이르는 길을 곧고, 오후엔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인 공주의 공산성을 걸을 예정입니다. 공산성을 지나 동학농민군이 천추의 한을 남긴 곰나루에 이르고 공주국립박물관 답사를 마친 뒤 동학농민군이 대패한 우금치 전적지에서 마무리 될 이번 여정은 <길 위의 인문학>의 백미가 될 것입니다.
“마곡사는 충청남도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다. 이곳 유구천과 마곡천이 합류하는 사곡면 호계리 일대(현 홍계초등학교) 물과 산의 형세가 태극형이라고 하여 《택리지》와 《정감록》 등의 여러 비기(秘記)에서는 전란을 피해 ‘수 만인이 살 수 있다’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이 절의 창건 및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 설은 640년(선덕여왕 9년)에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慈藏)이 선덕여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전 2백 결로 절을 창건하기 위한 터를 물색하다가 통도사․월정사와 함께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절로 자장의 법문을 듣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들이 ‘삼대와 같이 무성했다’ 하여 ‘마(麻)’자를 넣어 마곡사라고 하였다는 설이 첫 번째이다. 두 번째 설은 신라의 승 무선(無禪)이 당나라로부터 돌아와서 이 절을 지을 때 스승이었던 마곡보살(麻谷菩撒)을 사모하는 뜻에서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과, 절을 세우기 전에 이곳에 마씨(麻氏)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에 마곡사라 하였다는 설도 있다. 두 가지 설 중에서 현재 첫 번째 설을 많이 따르고 있다. 창건 이후 신라 말부터 고려 초기까지 약 2백년 동안 폐사가 된 채 도둑떼의 소굴로 이용되었던 것을 1172년(명종 2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충6-5마곡사
보조가 처음 절을 중창하려고 할 때 도둑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하였으나 도둑들은 오히려 국사를 해치려 하였다. 이에 보조가 공중으로 몸을 날리며 신술(神術)로써 많은 호랑이를 만들어서 도둑에게 달려들게 했더니 도둑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거나 착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도둑들로부터 절을 되찾은 보조는 왕으로부터 전답 2백 결을 하사받아 대가람을 이룩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지금의 배가 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뒤 다시 60여 년 동안 폐사가 되었다가 1651년(효종 2년)에 각순(覺淳)이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 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本山)의 하나로 도내 1백여 사찰을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또 이 절은 대한민국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백범 김구와 인연이 깊다. 김구는 동학 신도였는데, 구한말 민비 시해에 가담한 일본인 장교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죽인 김구는 인천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탈옥한 뒤 마곡사에 숨어서 승려로 가장한 채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대광보전 앞에는 김구가 심은 향나무가 있는데, 그 옆에 “김구는 위명(僞名)이요, 법명은 원종(圓宗)이다”라고 쓰인 푯말이 꽂혀 있다.
김구선생이 숨어지낸 절
김구가 방랑했던 시절 3년 동안을 이 절에서 사미(沙彌)로 일했는데, 그때의 상황이 ?백범일지(白凡逸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어디로 가는 길이냐를 묻기로 나는 개성에서 생장하여 장사를 업으로 삼다가 실패하여 홧김에 강산 구경을 떠나서 삼남으로 돌아다닌 지가 1년이 되어가노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마곡사가 40리 밖에 아니 되니 같이 가서 구경하자고 하였다. 마곡사라면 내가 어려서 ?동국명현록(東國明賢錄)?을 읽을 때에 서화담 경덕(徐化潭 敬德)이 마곡사 팥죽가마에 중이 빠져 죽는 것을 대궐 안에 동지하례를 하면서 보았다는 말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나는 이서방과 같이 마곡사를 향하여 계룡산을 떠났다. … 마곡사 앞 고개에 올라선 때는 벌써 황혼이었다. 산에 가득 단풍이 누릇불긋하여 … 감회를 갖게 하였다. 마곡사는 저녁 안개에 잠겨 있어서 풍진에 더럽힌 우리의 눈을 피하는 듯하였다. 뎅, 뎅 인경이 울려온다. 저녁 예불을 아뢰는 소리다. 일체 번뇌를 버리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이서방이 다시 다진다.
“김형 어찌하시려오?” 김구는 말을 받아 “중이 되려는 자와 중을 만드는 자와 마주 대한 자리에서 작정합시다.”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일어나서 안개를 헤치며 마곡사를 향해 나아갔다.
김구는 이곳에서 하은(荷隱)스님의 상좌가 되어 입산하였고 그 다음날 득도식(得度式)을 마치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머리를 깎았다. 그 뒤 부목(負木)을 맡은 그는 나무도 하고 종노릇까지 하였으며, 수도승이 된 다음에는 운수승(雲水僧)으로 떠돌았던 것이다.(...)
.공주 시내에서 무령왕릉으로 좌회전하기 전 우측에 위치한 야산에 계곡을 둘러싼 산성이 공산성(公山城)이다. 사적 제12호로 지정된 공산성의 축성 연대는 24대 동성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21대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하자 왕자가 22대 문주왕이 되어 웅진으로 천도를 하는데, 공산성에 궁궐을 축성하고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웅진 천도 이전에 이미 성책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 당시 명칭이 웅진성이었고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 조선시대에는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 성은 석축이 약 1.8미터, 토축은 약 390미터로 2.2킬로미터에 이르며 성벽은 2중으로 쌓여 있다. 들어가는 초입에 성의 서문인 공북루(拱北樓)와 성의 남문인 진남루(鎭南樓)가 있으며, 진남루 앞의 넓은 터를 백제 때의 궁궐터로 추정하고 있다. 공복루 못미처에 임류각(臨流閣)터가 있는데 ?삼국사기? ‘동성왕 22년조’에 “왕궁의 동쪽에 높이 5척이나 되는 임류각이란 누각을 세웠고, 연못을 파서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고 되어 있다.
백제가 멸망한 직후 의자왕이 공산성에 잠시 거처하기도 하였고, 이곳을 거점으로 나당 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 부흥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신라 헌덕왕 14년(828)에 일어난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되었고, 1623년에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인조가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택리지?의 기록을 보자.
“성 북쪽에 있는 공북루는 대단히 웅장하고 강가에 임하여 경치가 좋은 곳이다. 선조 때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충청감사로 와서 이 누에 올랐다가 시 한 수를 지었다.
소동파(蘇東坡)는 적벽강(赤碧江)에 놀았으나 나는 지금 창벽(蒼碧)에 놀고,
유양(庾亮)은 남루(南樓)에 올랐지만 나는 여기 북루에 올랐노라.”
창벽은 금강 상류의 청벽산 아래에 있는 절벽이다.
〈훈요십조〉의 진실
공주를 휘감아 도는 금강의 곰나루 건너편의 연미산에서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신라의 문무왕과 의자왕의 아들 융(隆)을 앞에 세우고 하늘에 제사 지내며 회맹문(會盟文)을 읊조렸다.
“지난번에 백제의 전왕(백제왕)이 반역과 순종의 이치에 어두워 이웃과 평화를 두터이 하지 않고 인척과 화목히 지내지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인포악한 짓을 했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성을 겁탈하고 백성들을 무찔러 죽이므로 신라는 거의 편할 때가 없었다. 중국의 천자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산 곳을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들의 죄 없음을 가엾게 여겨 자주 사신을 보내어 그들이 사이좋게 지내기를 달래었으나 백제는 지세가 험함에 힘입고 거리가 먼 것을 믿어 천도(天道)를 오만하게도 업신여겼다. 이에 황제께서 크게 노하시어 삼가 정법을 행하니 그 깃발이 향한 곳에 한번 싸워서 평정하셨다.
(공주사대 백제문화연구소 안승주 옮김)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삼국이 들어섰고 후백제의 견훤(甄萱 지금은 진훤)과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여 승리한 태조 왕건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겼는데, 그 여덟째 조는 이러했다.
“차령 남쪽과 금강 아래 지역은 산의 모양과 형세가 거슬리게 뻗어서 인심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그 아래 지역 사람들이 조정에 들어와서 왕가나 왕의 친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권세를 잡으면 나라를 어지럽게 하거나 백제 통합의 원망을 품고서 임금을 범하기도 하고 난을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또 그 전에 관가에 매여 있던 노비나 잡직의 천한 무리들이 권세가에 기대서 빠져나가려 하거나 또는 왕가에 붙어 간교한 말로 권세를 농락하고 정사를 어지럽혀서 재앙을 불러오는 놈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니 비록 양민일지라도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정사를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위의 말은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도선(道詵)국사의 주장을 국정의 지표로 해서 만든 것이었다고 하고 또 한편에선 의문점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 말 이후 고려조 내내 호남 사람들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전주를 관향(貫鄕)으로 한 태조 이성계 덕택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조선 선조 때 전주 사람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인하여 반역의 땅이 되었다.
정여립 모반사건, 즉 기축옥사(己丑獄事) 이후 호남 출신 사대부들의 벼슬길이 막히게 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1894년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게 되었으나 그 약조가 지켜지지 앉아 그해 9월 삼례에서 재기포(再起包)를 하였다. 논산을 거쳐 북상한 농민군은 무장한 일본군, 관군과 한판 싸움을 벌였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우금치(牛金峙) 전투였다.
우금치는 이 나라 어느 산이나 있음직한 야트막한 산이다. 소만한 금이 묻혔다고 해서 우금치라고도 하고, 소를 몰고 넘지 못한다고 해서 우금고개라고도 부른다. 지금은 이 고개에 포장도로가 뚫려 공주와 부여를 오가는 자동차들의 행렬이 끊일 날이 없다.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결전장인 이 우금치에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관군의 선봉장 이규태(李圭泰)는 처절했던 우금치 전투에 대해 정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아, 몇만의 비류 무리가 4, 50리에 걸쳐 두루 둘러싸고 길이 있으면 쟁탈하고 고봉을 점거하여 동에서 소리치면 서에서 따르고 좌에서 번쩍하면 우에서 나타나고 기를 흔들고 북을 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기어오르니 그들은 어떠한 의리와 담략을 지녔기에 저러할 수 있는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하다.”
또한 <갑오관보(甲午官報)>에는 “일군과 관군이 산능선에 둘러서서 일시에 총탄을 퍼붓고 다시 안쪽으로 몸을 숨기고 적이 고개를 넘고자 하면 또 산능선에 올라 총탄을 퍼붓는다. 이렇게 하기가 4, 50 차례가 되니 시체 쌓인 것이 산에 가득하다”고 적고 있다. 결국 적게는 30만 많게는 50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를 낸 후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돌아가고 조선왕조는 급격하게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충청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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