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여섯 번 째

산중산담 2014. 9. 9. 10:05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여섯 번 째. 보령 장인해수욕장에서 홍성 남당항까지

 

 

7월의 서해안 기행은 네 번째 주말이 아닌 두 번째 주에 실시됩니다. 보령 장인 해수욕장에서 무창포를 지나고 대천해수욕장과 오천항을 지나 홍성의 남당항까지 이어지는 여섯 번째 여정에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땅이 다함에 창망한 바다와 면하였고

 

이중환도 충청도에서는 보령의 산천이 가장 훌륭하다고 하였는데, ?택리지?를 쓰던 무렵 보령의 서쪽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군영이 있었으며 영 안에 영보정(永保亭)이 있었다. 이곳은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활짝 틔어 있기 때문에 명승지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중종 때의 학자였던 박은(朴誾)은 일찍이 보령을 일컬어, “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날으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樓亭)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돗대와도 같다고 하였으며, 정대(鄭帶)의 기문에는 땅이 협소하고 서해가에 위치해 있다고 기록하였다.

옛 이름이 신촌현(新村縣)인 보령시가 오천군남포군보령군을 통합하여 보령군으로 개편된 것은 1914년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라는 속담이 있다면 대천 바다도 짚어보고 건너라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바닷물이 얕으며 바다 밑이 고른 대천해수욕장은 머드 축제로도 소문이 난 서해안의 대표 해수욕장이다. 또한 모세의 기적처럼 매년 4월 초쯤 바닷길이 열리는 무창포해수욕장으로 이름이 난 보령시의 남포면을 고득종(高得宗)땅이 다함에 창망한 바다와 면하였고, 마루 창을 여니 푸른 산과 마주본다.”고 노래했다.

오서산 앞쪽에서 나온 한 맥이 남쪽으로 가서 성주산이 되었고, 그 산자락 아래 지금은 폐사지가 된 성주사지(聖住寺址)가 있다.

2-2보령 성주사 터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던 성주사는 보령시 미산면 성주리 성주산 아래에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 법왕 때 창건된 오합사(烏合寺)가 바로 성주사라는 사실이 1960년에 출토된 기와조각에서 확인되었으며,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이 절을 돌아다니면서 백제의 멸망을 예시했다고 전해진다. 신라 문성왕 때 당나라에서 귀국한 무염국사(無染國師)가 김양(金陽)의 전교에 따라 이 절을 중창하였고 주지가 되면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승암산 성주사 사적에 성주사의 규모가 불전 80칸에 행랑채가 800여 칸, 수각 7, 고사 50여 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체는 1천여 칸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주산파의 총 본산으로 크게 발전하였던 이 절에서 한때 2,500명쯤의 승려들이 도를 닦았다고 하는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중건하지 못하여 폐사지만이 사적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사가 번창하였을 때는 절에서 쌀 씻은 물이 성주천을 따라 10리나 흘렀다고 하는데, 오늘날 절터는 간 데 없고 석조물만이 절터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문이 남아 있는 성주사지

이절에는 최치원(崔致遠)의 사산비문(四山碑文) 중의 하나로 국보 제8호로 지정된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郎彗和尙白月寶光塔碑)가 있다. 낭혜화상의 깨달음은 깊고도 깊었다고 하는데, 당시 당나라의 여만선사((如滿禪師)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지만 이와 같은 신라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다. 뒷날 중국이 선풍(禪風)을 잃어버리는 날에는 중국 사람들이 신라로 가서 선법을 물어야 할 것이다라며 낭혜화상을 크게 칭찬했다고 한다.

낭혜화상의 비는 신라 진성왕 4년에 세워졌다. 전체 높이가 4.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 솜씨를 발휘하여 신라시대의 석비를 대표하는 이 비는 귀부(龜跌)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비신(碑身)은 성주가 주산지로 이름이 높은 남포오석(藍浦烏石)으로 되어 있으며, 낭혜화상의 행적이 모두 5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다. 글은 최치원이 지었고 글씨는 최치원의 사촌동생이었던 최인곤(崔仁滾)이 쓴 것으로, 고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나머지 사산비문은 하동 쌍계사의 진감선사부도비(眞鑑禪師浮屠碑),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大乘國師碑), 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비(智證大師浮屠)이다.

성주사지에는 이 탑비 외에도 신라 말에 건립한 4기의 석탑이 있다. 보물 19호인 성주사지 5층석탑과 보물 20호인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 조각수법이 뛰어난 보물 47호 성주사지 서3층석탑, 그리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40호인 성주사지 동3층석탑과 석불입상이 있다.

성주사지에서 물길을 따라 조금 내려간 보령시 미산면의 화개리(花開里)성주산의 목단(牧丹)이 이곳에 와서 꽃이 핀다고 해서 화개 또는 개화開花라고 부른다. 한 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던 성주 탄광이 있었던 곳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은 이름이 계화라고 바뀌어 계화초등학교가 서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들이 넓게 펼쳐진 그러한 곳들마다 여러 대를 이어 사는 부자들이 많았고. 그 곳들은 대부분이 여러 고을들과 가까이 자리 잡고 있었고 뱃길이 편리하여 서울과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중환 뿐 만이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이러한 지역들을 살만한 곳으로 보았던 것은 서울에 살고 있는 사대부 들이 모두 이러한 곳을 통하여 재물을 운반했고 보급 받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러한 곳들은 높고 깊은 산이 없어서 큰 골짜기는 없지만, 바닷가에 자리 잡은 한적한 지역이므로, 큰 난리 때 피해가므로 사람이 가장 살만한 곳으로 보았던 것이다.

?택리지?에서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는 토지가 아주 기름지고 서쪽으로 큰 바다로 이어져 생선과 소금 그리고 쌀을 거래하는 사람이 많으며” “충청도 안에서는 오직 보령의 산천이 가장 빼어나게 아름다우니 오서산과 성주산 사이가 오래도록 그 몸을 편안하게 보존할 만한 곳이다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져 있는 토정(土亭) 이지함(李芝含)과 조선 중기의 문신 이산보(李山甫) 이산해李山海등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지번의 아들인 이산해는 5세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났었다. 겨우 포데기를 떼었을 때에 이미 글자와 발음을 이해했다. 이웃 하나가 집우 L로 귤을 버여 주며 물었다.“ 무엇이냐?” 하자, 대답하시를 자입니다.” 또 농부가 농기구를 가지고 지나가느,S 것을 보고는, “자입니다.” 했다. 작은 아버지인 토정 이지함이 태극도 한 마디를 가르치니, 문득 천지음양의 이치를 깨닫고 그림을 가리키며 설명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글을 읽으면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지함이 글 읽기를 그만두고 식사를 하도록 명령하니, 시를 지어 노래하기를, “ 밥이 늦어지는 것도 가엾거늘

하물며 배움이 늦어짐에랴.

배가 고픈 것도 가엾거늘 하물며 마음이 고픔에랴.

가난한 집안에 마음을 다스리는 약이 있으니,

영대靈臺에 달이 떠오를 때를 기다리리.“

 

그의 집에 동해옹東海翁의 초서가 있었다. 유모乳母에게안겨 흘깃 보고는 어렵지 않게 손가락으로 써내었다. 6세 때에는 서까래처럼 큰 붓으로 큰 글씨를 썼는데, 마치 용과 호랑이가 서로 붙들고 다투는 것과 같았다. 그의 글씨를 구하려고 온 한 때의 이름난 인물들로 집안이 북적대어 마루바닥이 눌려 휘어질 정도였다. 퇴계 이황李滉과 임형수林亨秀가 동호에 있는 독서당에서 배를 타고 동작진으로 이산해에게 글씨를 부탁하러 왔다. 그 때 <동호독서당 도가봉래산東胡讀書堂 道家蓬萊山>이라는 큰 글씨 10자로 병풍을 만드니, 지그까지 전해와 독서당의 유서 깊은 사연이 되고 있다. 11세에 향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는데, 시험관들이 서로 답안지를 칼로 베어 나누어 가지고 갔다.

명종 113년인 1558년에 20세의 나이로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다.

그 무렵 서울에서 떠도는 노래가 있었다. ‘서소문에 신동神童이 났다네. 함께 과거에 합격했던 잚은 관리가 꿈을 꾸었는데, 대궐문에 걸린 과거 합격자 명단에 이 산해의 이름이 큰 글씨로 쓰여 있고 그 아래에 조선 사람들이 이 사람에 힘입어 편안하게 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온 사신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이 이산해를 만나보곤, 감탄했으며, 이 때 이후로는 우리나라 사신들을 만날 때마다 이산해의 안부를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윤대輪對에 참석한 어떤 관리가 이산해를 나무란 적이 있었다. 선조가 성을 내며 말하기를, “ 너는 이조판서기 나와 사직을 위하는 신하라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하고는 몸소 승정원에 다음과 같은 비망기를 내려 보냈다.

 

말은 입으로 나오지 않는듯하고, 몸은 옷을 걸치지 않은듯하다. 한 덩어리의 바르고 참된 기운이 온전하게 마음속에 가득 쌓여 한 점의 겉치레나 궤변도 없는 모습이다. 사나운 자라도 공손하고 예쁘게 만들기에 충분하고, 거짓된 자라도 참되고 옳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는 바로 아주 오랜 옛날에나 있었던 인물이지 우리 조선의 인물이 아니다. 내 일찍이 그 가 임금에게 존경스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본적이 없다. 내 일찍이 그가 임금에게 존졍스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본적이 없다. 치우치지 않은 마음으로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며 암암리에 강화되니 진실로 군자중의 군자라고 할만하다.”

<여지도서> 에 실린 글이다.

 

이안우李安愚의 시에 북녘을 돌아보니 구름이 깊은 구렁에서 생겨나오고, 남쪽으로 굽어보니 바다 물결이 하늘과 접했구나. 좋은 바람 때 마침 이르니, 마음도 쾌하여 변방의 일을 주획籌劃하는 다락에 앉아 있네.” 하였다. 또한 이승소는 만고에 외로운 옛 성이 있는데, 바깥 바다와 안의 산이 웅장하도다. 산 아지랭이 깊어 항상 비를 지어내고, 바다가 가까우니 바람 많은 것이 괴롭다. 소금 굽는 가마에선 불 때는 연기 하얗게 오르고, 어부의 마을은 반조返照로 붉게 물들어 있다. 대나무 숲 속을 뚫고 지나가니, 푸른 눈 조각이 분분히 길 가운데 흩어지네.” 하였던 남포가 그 옛날의 남포가 아니듯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도 옛날의 그 사람들이 아니다.

남쪽 바닷가에 자리 잡은 옛 고을

뛰어나구나, 강산이며 땅의 형세.

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비도 잘 지어내고

강가에 선 나무, 바람도 쉬어 만들어 내네.

포도에 물들어 푸르른 물

연꽃을 찌어 불그레한 안개.

누런 대나무 숲길에 깔린 모래

한 폭의 그림에 빠진 이내 몸.“

 

서거정이 노래한 이곳 남포의 옛날을 회고해보지만 옛날은 이미 가버린 지 오래이다. 특산물로 남포 오석烏石과 은어가 실려 있다. 우리나라에서 비를 세우는 돌로는 첫손에 꼽히는 남포오석으로 만든 비가 성주사지에 있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이고, 파고다 공원의 삼일 독립선언비, 동작동 국립묘지에 잇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무덤이 세워진 비도 남포 오석이다.

보령시 남포면의 남포가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는 것과 달리 은어는 이 지역의 냇가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다. 어디 그것뿐일까? 나날이 다르게 변모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그 변화의 모습을 연작소설인 <관촌수필. 보령시 대관동 갈머리 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남긴 작가가 이문구였다.

 

보령이 시가 되면서 한산 이씨들의 5백년 세거지였던 관촌마을은 대관동으로 바뀌고 그 마을에서 서로 미운정 고운 정 나무며 살았던 이웃들은 저마다의 길로 사라져 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천大川이라는 이름을 낳은 한내도 도시 계획에 의해 물줄기를 바꾸고 말았다.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 이루어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지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촌부락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시간이란 강물과 같은 것이다. 만상의 끝없는 흐름이다. 하나의 사물이 눈에 띠었는가 하면 그것은 서둘러 사라지는 것이며 또 하나 사물이 뒤 따라 오는가 하면 그것도 차례로 흘러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흘러가는 것들과 세월 속에서 변해가는 것들을 연연해 할 때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우리의 국토가 자꾸 검증도 없이 변하고 사라져 갈 때 더욱 그렇다. ,

이곳 남포를 고향으로 두었던 사람이 고려 때의 백문절白文節이라는 사람이다. 고종 때 벼슬에 합격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에 이르렀는데, 글 솜씨가 넉넉하여 붓만 대면 순식간에 문장을 이루어서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한편 대천항에서 푸른 파도를 헤치며 원산도 삽시도를 거쳐 두 시간 쯤 가면 도착하는 섬이 있다. 육지에서 하도 멀리 떨어져 있어 연기에 가린 듯 까마득하게 보인다고 해서 외연도外煙島라는 이름이 붙은 섬인데 대천항에서도 53km쯤 떨어져 있다. 이 섬은 여러 번의 변천을 거듭하면서 1914년 횡견도리를 병합하여 보령군 오천면 외연도리에 속하게 되었다.

서해 복판에 자리 잡고 있고, 동쪽 끝에 봉화산, 서쪽 끝에 망재산이 솟아 있으며, 가운데는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과 가까워 중국에서 우는 닭의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우스개소리가 전해오는 이 섬은 푸른 바다와 상록수림이 조화를 이루어 여름철 피서지로 알려져 있다.

이 섬은 1300여 년 전에 중국의 제나라가 망하자 전횡이라는 장군이 그를 따르는 제나라 사람 500여명을 데리고 들어와 정착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 섬 사람들은 전횡 장군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지금도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거나 아기를 낳을 때 이 섬사람들은 전횡 장군의 도움을 받아야 탈이 없다고 믿고 있다.

한편 이 섬 중앙에 있는 외연도상록수림에는 후박나무. 치자나무. 동백나무. 왕 보리수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서 천연기념물 제 1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산도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삽시도는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훈련을 했다는 곳이라고 하고,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고도는 홍길동이 부하들을 데리고 풍악을 울리며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충청도 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