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세조가 잠든 광릉과 회암사를 찾아서

산중산담 2014. 9. 9. 10:07

 

세조가 잠든 광릉과 회암사를 찾아서

 

 

7월의 첫째 주 토요일 남양주시 진전읍에 있는 세조가 잠든 광릉과 봉선사, 그리고 포천의 백사 이항복을 모신 화산서원과 이항복 묘, 회암사를 찾아갑니다.

세t세저가 살아생전에 이곳 숲과 산림에 반해 자신의 능으로 정한 광릉은 아름다운 수목들이 울창한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운악산은 예로부터 한국의 5대 명산 중에 한 곳으로 꼽혀왔습니다.

동 동에 금강산, 서에 구월산, 남에 지리산, 북에 묘향산, 그리고 동서남북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운악산이 그 산으로써 그 산자락 안에 봉선사가 있습니다.

봉봉선사는 고려 광종 20년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한 절로 세조의 아들인 예종 때 세조의 위업을 기리고 능침을 보호하기 위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89칸의 규모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봉 봉선사에 계시는 심진스님의 노래공연이 함께 할 이벙 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

 

조선의 진정한 선비 이항복

 

죽마고우였던 한음 이덕형과 어린 시절 재미난 일화들을 수없이 남긴 이항복은 백사(白沙)나 이항복이라는 이름보다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다. 1556년 포천에서 고려 때의 문장가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났다. 1575년 진사 초시에 오른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올랐다. 1617년에는 인목대비 김씨를 폐위하자는 주장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 관직이 삭탈된 후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이항복은 이때 유배지로 가는 도중 애틋한 시 한 편을 남겼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를 벗 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이항복은 적소에 위리안치 된 채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해에 관직이 회복되었고 시신은 고향 포천으로 이장되었으며 포천과 북청에 제향되었다. 이후 1659년 화산서원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그가 살았던 16세기에서 17세기 초엽의 조선은 동서분당과 임진정유재란이라는 국난으로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는 어느 한 파에 속하지 않고 중심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에 난처한 경우에 빠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항복은 의지가 곧고 강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명민하고 사리가 밝아 때로는 극히 타산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래도 의에서 살다가 의에서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죽은 뒤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의 한 사람이었던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그가 관작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으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완벽에 가까웠던 이항복의 기품과 높은 인격을 칭송하였다. 그는 기지와 해학이 뛰어났으며, 자신의 직책과 보신에 두려움 없이 강직하였고, 소신이 뚜렷하여 시비를 정확하게 가렸으며, 남을 자신처럼 사랑하였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에 있고, 가산면 방축리에 헛묘가 있다. 그것은 유림들이 묘에 제사를 지낼 때 노론과 남인의 뜻이 서로 맞지 않아 일부에서 헛무덤을 만들어 따로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의 주검을 놓고 이처럼 살아 있는 사람끼리 왈가왈부했던 것이 조선의 당쟁이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경기도 편에서

회암사는 성종 3(1471)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3년간에 걸쳐 중창하게 되었고 명종 때에 이르러 크게 중창하게 된다. 불심이 깊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가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 중흥을 기도한 것이다.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를 열고(156545) 그 이틀 뒤인 47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생들은 보우를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사월 초파일날 제주도로 유배당한 보우대사는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피살당하고 나옹화상 이후 이 백여 년간에 걸쳐 전국 제일의 도량이었던 회암사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며 불태워졌다. 순종 때인 1800년대에 폐사가 되었다고 알려진 회암사는 또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된다.

회암사터 북쪽 한쪽의 부도 전에 모셔져 있던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 유물이 광주의 토호 이응준에게 제거되고 만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그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예산 가야사라는 절터를 금당 터에다 부수고 모셨던 것처럼 당시 대부분의 지방토호들은 절을 빼앗아 자신들 선조의 묘택으로 삼고자 했다. 이응준은 그 당시의 이름난 풍수사 조대진이 삼화상의 부도와 부도비를 없애버린 후 그곳을 묘역으로 삼고 법당 터에다 묘지를 세우면 크게 길한다..”고 부추기자 이를 실행했다. 이 일은 7년 뒤에(순조 281828) 세상에 알려졌다. 이응준과 조대진은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갔고 경기 지방의 스님들의 모여 상의한 결과 현재의 절터에서 800m 떨어진 천보산 중턱에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이어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산 언덕배기에 세분의 부도와 부도비를 다시 세우고 흩어진 유물들을 수습했다는 기록이 무학대사의 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지공선사와 무학대사의 부도비의 몸돌은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회암사의 s마아 있는 문화유산으로는 무수한 석조유물들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1506년에 조성된 가로 54cm, 세로 30cm의 감지에 금물로 그린회암사 약사삼존도가 있을 뿐이다.

좌측에 서있는 공장과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지나 회암사지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질서도 정연하게 배치된 축단과 계단 치장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대웅전 터로 장려한 석축들과 위로 532개나 남아있는 주춧돌도 그렇지만 현재 발굴되고 있는 곳에 드러나는 절의 짜임새를 보면 전라도 지역의 미륵사터나 경주 황룡사지의 장엄함에만 길들여온 우리들의 정신을 놀라움으로 가득 채운다.

특히 맨 앞쪽 축대 정면 계단석엔 둥근 북 모양 안에다 태극 문양을 새겨 궁궐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절 곳곳에 들어서 있던 전각들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관음전, 미타전, 서승당, 동서파침, 고루, 사문루, 열중전, 향적전, 도사료, 자빈후, 양근방 등이다. 법당터 옆에는 사찰의 화장실 자리가 있었다.

발굴 중에 있는 회암사터, 석축과 계단을 차례로 올라가면 그 끝머리에 회암사의 흥망 을 지켜보았을 회암사터 부도가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부도탑은 8개의 널돌로 된 8각 기단 위에 4개로도 하대석에는 용마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위에 놓인 두 개로 된 8각 하대석, 중대석에도 각 면에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뒤에 다시 당초문을 두른 중대갑석이 있고 팔부신중을 조각했다.

중대석과 상대석 사이의 갑석엔 복련과 화려한 꽃무늬 양련으로 빈틈없이 돌리고 3단의 받침대를 놓은 다음 둥근 몸돌을 얹어 조선시대 부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모양새나 수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건립 연대와 부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는 보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1472년 회암사 중창 때에 이 절을 중창했던 처안(處安)대사의 공적을 기린 부도 탑으로 보는 설이 더 유력하다. “

신정일의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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