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백두대간 산행기

추억기 - 불꺼진 대간 방 - 도덕산의 옛 추억하나

산중산담 2012. 3. 28. 14:41

군대 생활하며 보았던 풍경들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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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년 11월에 입대하여 12월 제주도로 근무지를 명 받고,  85년 12월 모슬포의 산이수동이라는 초소에서 제대 할 때 까지 머물렀던 곳. 그 곳에서 바다를 보면서 좌로는 산방산이요 우로는 송악산을 끼고 언제나 바라보았던 형제섬30여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는 산방산은 잘 알려졌지만 송악산은 레이더 기지가 있어 거의 사람이 찾지 않던 곳이었는데...대간 산행날도 아직 멀었고, 대간방은 굳게 잠겨있고.....누가 걸어 잠근 것도 아닌데....이럴때 이런건 어떤가요????저와 옛 추억을 찾아 제주도로 떠나 보시죠.

 

 

 

옛 추억속으로

 

30년전 찍은 형제섬과 타고간 배 - 고기 딱 한마리 잡았습니다. ^^^^^^

 

 

형제섬의 추억

 

 

 

 

송악산의 추억 - 형제섬이 보이나요

 

 

 

 

 

 

군대에서 생활하며 담아본 글 - 도덕산

 

 

兄弟섬을 다녀와서

 

형제섬, 여기가 형제섬이구나

발바닥으로 傳해오는 끈적끈적한 感觸을 느끼며 첫발을 디딘 瞬間, 때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아랑곳 않고 모래沙場을 달려 나갔다.

灣이 形成되어 있는 이 곳 地形上 한 中央에 紅一点처럼 떠있는 섬,

 

바람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흔들리는 모습을 감출 수 없고, 가난하지만 굳세게 살아가는 듯한 兄弟의 友情의 모습을 듬뿍 담으며, 어느 섬에서나 느낄 수 있는 외로움과 孤獨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사람들의 발이 그리 많지 않은 철새의 搖籃 형제섬.

가냘픈 흔들림으로 뭇 사람들의 憧憬을 받으며 내 맘까지 앗아간 섬에 나는 오늘 첫 발을 디딘 것이다.

 

20일 轉役하는 同期의 沙溪마을 한 住民이 1.95톤의 배를 利用하여 暴風注意報라는 氣象의 惡條件에서도 敢行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기에 막상 형제섬에 대한 若干의 失望에도 不具하고 意味있는 일 이었다.

 

그칠 줄 모르던 漁夫님들의 삶의 振動이 얼마나 큰 것이었나를 거친 파도를 따라 흔들리는 배 위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카페리호를 利用해서 볼 수 있었던 바다와의 共感帶와는 次元이 다른 또 다른 바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機會가 된 것 같다.

옛 先人들로부터 섬에 대한 愛着은 유달랐고 憧憬의 對象이기도 했다.

故鄕에 대한鄕愁도 엿볼 수 있고 神秘한 바다의 神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重要한 건 거친 파도 歷史와 함께 해온 바다의 산 證人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섬을 노래하며 섬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心象은 歷史의 한 主人公을 自負하고 싶은 衝動에 依한 것일 게다.

러기에 人間들은 누구나 純粹하고 淸純한 存在物인 것이다.

 

사랑에 쫒기는 사람들, 天理나 道理에 懷疑를 품은 사람들, 自記省察을 推究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섬을 생각해 본다.

어느 特別한 人間만이 가질 수 없는, 줄 수도 없는 우리의 神, 무릇 凡人의 한 사람임을 자랑하는 나는 오늘 이 자그만 섬을 찾은 것이다.

 

地歸島

, 문섬, 쑥섬, 범섬, 형제섬, 

내가 지금까지 濟州島에 와서 接해온 섬들이다.

決코 華麗하지도 크지도 않은 작은 共感을 주는 섬들이었지만 나의 人間이 많은 變化를 强力히 强要하는 듯 하던 섬들의 모습이

 一瞬 크린처럼 映像化되어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특히 濟州島 어디를 가나 쉽게 接할 수 있는 것이 窟인 것 같다.

형제섬에서 생각지도 않은 窟을 發見할 수 있었다. 중턱을 가로질로 連結 돼 있는 窟이 꽤 印象的이었다

挾才窟 이나 萬丈窟처럼 길지도 크지도 雄壯한 모습도 불 수 없었지만 벌어진 이빨 틈새로 發音이 새는 듯한 窟의 모습에서 한 여름의 시원한 움막을 聯想하게 하기도 했었다.

 

섬 두개 중에서 어느 것이 형이고 어느 것이 아우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家庭의 支柱요 대들보임을 勘案할 때, 밋밋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餘韻을 남기는 듯한 꼬리도 없이 無條件 우뚝 솟아 있는 섬이 兄일 것이라 判斷해 버렸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그 섬은 지금까지 누구도 밟아 보지 못했으리라 推測을 불러 일으키게 할 程度여서 밟아 보지 못한 점이다.

社會가 發展하고 多種多樣하고 複雜해져 가면서 人間性은 이미 찾아 볼 수 없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人間들의 모습에서도 混濁한 都市의 空氣와 걸 맞는 차가운 視線마저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좀더 奇異하고 珍奇하고 珍貴함을 推究하다 보니 自然이 自然은 毁損되고 망가지고 不均衡을 이룰 수 밖에 없다.

"自然은 사람保護, 사람은 自然保護"  좋은 口號를 잊은 채,  自己가 自然을 毁損한 만큼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理致를 잊은채, 형제섬과 같은 아름다운 우리의 모습을 망치는 사람들에게 良心宣言을 勸하고 싶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형제섬 만은 우리가 지킬 것이다라고.  

형제섬에는 오늘도 많은 철새들이 날아 다니고 있었다. 그 모습 또한 雄壯하기 이를데 없었다. 사람의 발길이 전혀 닿지 않아 그 모습 그대로 自然을 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모습을 본다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님을 생각할 때, 무릇 凡人이라 自處하는 人間들의 無知에 웃음 지울 뿐이다.

出發할 때 본 형제섬의 모습에서 잔디가 많이 보였는데 막상 가 보니 珍奇한 돌과 岩壁으로 形成 되어 있었다.

누구나 이 섬에 들른 사람들은 돌 하나 씩 들고 나온다고 하던데

우린 가져온 것 하나 없고 오직 두고 온 마음만이 살아 움직일 뿐이다. 지금 형제섬의 바닷바람이 두고 온 마음을 실려 보내고 있는 듯 하기만 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찍는 것이 남는 것이라고 寫眞을 찍는데 熱心이다 보니 돌 하나 하나에 살아 숨쉬는  眞情한 삶의 숨소리를 저버린 것 같아 若干은 서운하다.

거친 波濤를 노래하든 뱃놀이를 노래하든 하던 노래들

거친 波濤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따라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게도 노래에 洗腦되었나를 알 수 있었다.

 

2톤 程度 밖에 안 되는 작은 배로 한 家庭의 幸福과 生活을 責任지고서 바다와 접하고 함께 살아 온 한 平生, 나는 오늘 그 분과 同樂하면서 그 분의 참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哨所에서 바다로 나가자 바닷바람은 역시 매섭기만 했다. 그 분은 장갑도 모자도 쓰지 않은 채 재대로 막지도 않은 우비만을 입은 채 出發을 알리는 통통소리를 내면서 偸薄한 웃음을 우리에게 膳賜했다.

그분이 偸薄한 말투와는 달리 오늘만큼은 바다가 順하질 않았다.

뱃전에 부딪쳐 부서지는 波濤가 2톤 밖에 안 되는 작은 배를 안개처럼 덮었다.

손으로 목덜미로 파고드는 바닷물로 인해 손은 이미 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마침 불어 제키는 바다 바람으로 얼마나 손이 시럽던지그런데도 그분은 전혀 內色을 안 한 채 默默히 運轉에만 熱中하고 있었다.

퍽이나 지금까지 그분의 印象이 지금까지 나의 腦에 남아 있는 것은 지금까지 바다와 共生하며 살아온 삶의 含蓄된 모습인 것 같아 더욱 아이니컬한 氣分을 자아내게 했던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오늘 내 스스로 確認한 바다는 그분을 그렇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波濤 따라 左右로 심하게 흔들릴 때 마다 삶의 苦痛마저 느끼고 있었는데 막상 건져낸 고기는 단 한 마리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배가 들어 올 때 浦口의 모습은 市場을 방불케 하는 複雜함을 준다. 우리는 車 안에서 生鮮 냄새가 나면 누구나 찌푸리던 追憶들이 있다.

그러나 浦口에서 漁夫의 거친 손을 대하고 그들의 삶을 대해본다면 좀 더 理解하는立場에서 새로운 角度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을 알아야 나를 안다는 格言이 擴大되어 가는 느낌이 있다.

누구나 農村을 空氣 맑고 世上物情을 잊은 채 살기 좋은 곳이라 여기면서, 막상 살아 보려 하면 農夫의 受苦를 느낄 수 있는 理致와 같을까?

 

작년 9월 달에 불던 颱風 키드의 그 狂亂적인 바다의 모습이 떠오른다. 波高는 높아지고,

때마침 불어주는 바람에 부서지면서 무지개를 만들면서,  200톤쯤 되는 貨物船마저도 波高에 가려 보이다 안보이다 하는 모습이 나의 맘을 애타게 했었는데,

오늘 直接 經驗해 보니 내가 앞으로 어떤 삶을 이룰지는 모르지만 좋은 經驗이었던 것 같다.  

 

出發할 때는 뒤에서 바람이 불어주어 그리 심한 障碍 없이 형제섬에 닿을 수 있었으나 올 때는 갑자기 汽罐 故障으로 停止된 狀態에서 繼續 밀려오는 波濤 부디 치면서 左右로 심하게 흔들리면서 나의 온 맘을 뒤흔들어 놓았다. 

뱃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가장 安全한 交通 手段이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가끔 大型船舶의 事故 消息에 接해 國民들을 애타게 했던 事件이 있었다. 배를 탈 때 重要視되는 安全守則을 지키지 않은 탓에 더 많은 犧牲者를 내고 말았다는 것은 우리가 한번쯤 되돌아 볼 必要性도 있다고 본다.

停止된 狀態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 沈着함으로 배의 흔들림에 順應하면서 다시 통통거리는 엔진의 始動의 소리가 들리면서 바람에 逆行해서 出發했다.

이때부터 波濤에 부딪치는 感觸은 確然히 느낄 程度로 부딪치며 뱃전에서 부서지는 波濤의 물거품이 2톤 밖에 안 되는 배를 온통 휩싸곤 했다.

그때 마다 外出할 때만 입는 옷은 짠물로 흠뻑 적시여 놓아 버렸다. 이렇게 反復하다 보니 갈수록 손이 시럽고 온몸이 찬바람에 떨리기 始作했다.

그 와중에서도 멀어지는 형제섬의 모습이 안타깝게 멀리서 손 짓을 하고 있었다..

형제섬아 잘 있거라 우리 다시 만나는 날 까지

期約없는 離別을 하는 戀人의 아픔을 느껐다.

뱃고동의 소리가 나의 곁에서 멀어져 갔다.

형제섬의 모습까지 ……

 

                   86.02.15   제주초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