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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산꾼과 함께한 구름산, 도덕산 연계산행 - 영회원(永懷圓)

산중산담 2014. 10. 25. 14:00

 

초보산꾼과 함께한 구름산, 도덕산 연계산행 - (永懷圓)

               

일시 : 갑오년(14년) 하늘연달 스물엿새 일요일          

인원 : 자수정님, 상큼님, 가을속님, 세석님, 썬학이님, 칠갑산 대장님 그리고 나

어딜 : 광명시 보건소 ~ 구름산 ~ 영회원 ~ 도덕산 ~ 광명사거리역

 

더 많은 사진 자료는 http://blog.daum.net/kmhcshh/2146 에 있습니다

 

예정에 없던 영회원을 들르기 위해 구름산 정상에서 영회원 이정표를 따라 내려온다

애기능을 자주 넘어 가면서도 말로만 듣던 영회원을 자수정님이 관심을 보여

영회원은 물론  금천강씨(衿川姜氏) 세장기(世葬記(藏紀))를 기록한 신도비(神道碑)도 만나보고

바로 옆에 있는 선영 46기의 묘를 모시고 있는 금천강씨(衿川姜氏) 세장지(世葬地)를 찾아가 본다

 

구름산 정상에 있는 운산정 바로 직전 우측으로 내려가면

 

가학광산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온다 - 우리는 가학광산 방향으로 좌틀

 

조금 더 진행하여 만나는 천연약수터에서 영희원까지는 500m으로 가장 짧은 거리로 갈 수 있고

조금 더 진행하여 진달래 약수터를 지나 새미 약수터에서는 영희원까지 730m이다 -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가을길의 멋있는 풍경이 계속 이어진다

 

군부대 후문 이정목에서 임도 따라 노온사저수지 방향으로 우틀

 

가을의 풍경은 계속 이어진다

 

운산농장을 지나 능촌갈림길을 지나면 임도 사거리에서 우틀

 

철문을 통과하여 농장안으로 들어간다

 

먼저 400년된 느티나무가 그날의 일을 기억하겠지만 말없는 세월의 풍파를 묵묵히 지켜보며 서있다

 

이정표따라 진행하면

 

역시 계속되는 가을 분위기에 취해 본다

 

영회원이 드디어 눈에 들어온다

永懷圓   1991년 10월 사적 제 357호로 지정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민회빈 (愍懷嬪) 姜씨(1611~1646)가 묻혀 있는 곳이다

 

자료는 이한성교수님의 옛 절터 가는길  http://weekly.cnbnews.com/news/article.html?no=109873 을 참조했습니다

 

일일 역사 선생님들

 

민회빈 (愍懷嬪) 姜씨는 우의정을 지낸 문정공 강석기의 딸로 인조5년(1627)년 소현세자와 백년가약을 맺으면서 17세에 세자빈으로 간택 된다

1637년 병자호란 때는 소현세자와 함께 국왕 인조를 대신해 청나라 볼모로 심양으로 가서 고생을 하고 귀국했다

민회빈 강씨는 조선의 왕실 여인중 조선 땅을 벗어난 유일한 인물이다.

조선조 가장 무능한 임금인 인조와 달리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국에 볼모로 있으면서도 남다른데가 있었다

모진 고초를 겪여내면서도 조선 세자 내외는 청나라와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한편 열심히 농장을 일구고

축적한 돈은 다른데 쓰는 것이 아니라 청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노예에서 벗어나게 하는데 썻다고 하니...

거기에 무역에도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며  외교자금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한다

세자빈의 사업가 기질과 외교관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이 청국에서 대단했던 모양이다

淸人들 조차 소현세자를 볼모자가 아닌 조선의 작은임금으로 모실 정도였다고 하니 두분의 성품은 역시 세자로서의 기품이었다 

 

 

이 모든 과정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열정이 있었기에 참고 견디는 힘이 되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결코 이 소현세자 부부의 고국에 대한 열정을 가만히 놓아 두지 않았으니 그게 바로 인조였다

세자부부의 이런 활동이 결코 인조로서는 반갑지 않았을 것이고

아들과 며느리가 아니고 청나라를 등에 업고 나중에 강력하게 등장할 정적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가장 조선조의 무능했던 인조의 됨됨이가 나타나게 되는 시각이 가까워 지고 있었으니...

 

 

9년의 인질 끝에 세자부부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1645년(인조 23년) 2월 귀국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은 인조의 냉대뿐이었다.

귀국 후 두 달 후 멀쩡하던 세자는 갑자기 병을 얻고 발병 한 지 사흘 만에 침 세 번 맞고 횡사했다.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오빠 문성(文星)을 귀양 보내더니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인조의 칼날이 며느리 강빈을 겨누었다.

평소에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안했던 인조의 후궁 조씨등이 세자빈을 소현세자를 독살했고 왕실을 계속 저주를 한다고

거짓으로 꾸며대어 인조 23년에 세자빈의 자리에서 쫒겨나고 그 다음에  시사약을 받았다. 이른바 '강빈의 옥' 이다

 

구름산에서 바로 내려오는 길도 보인다

 

엎친데 덮친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소현세자의 큰아들 석철을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 한 일이 있었다.

또 속좁은 인조가 생각하기를 만일에 석철이가 용골대의 보호 아래 청나라에서 장성한다면... 소현세자의 전철을 밟을까봐...

그들 외할머니마저 죽인 10여일 뒤, 인조는 드디어 자신의 손주 셋을 제주도로 귀양보내고 만다

두아들은 그곳 제주도에서 사망했고 막내(경안군)만이 현종6년까지 생존했다.

그들의 나이는 그때 첫째 석철이 12세, 둘째 석린이 8세, 셋째 석견이 4세였다. 한나라의 임금 맞아?

 

위에서 바라본 모습

 

그 후 숙종44년(1718년)에 세자빈의 결백함이 밝혀저 민회빈(愍懷嬪)이란 시호를 받고  복위되고 묘소도 민회원이 되었다

고종7년(1870년)에 소현세자의 묘도 소경원(昭慶圓)이 되어 서오릉에 묻혀 있고, 민회원도 영회원(永懷圓)이 되었다.

석철과 석린의 묘는 서오릉 군부대 지역에 묻혀 있다 한다.

 

 

여기서 인조에 대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조 재임때 병란 무려 3번에  이괄의 난때 공주까지 도망가고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에 짓밟히고 백성들의 삶의 피폐 그리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결국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왕권이 흔들리자 아들 소현세자 독살설까지...

지금도 이 초보산꾼이 걸었던 홍제천에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그 영혼들이 아직도 환양녀란 이름으로 남아있고

북한산 사모바위에도 아직도 망부가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성남 남한산성에서 만난 삼전도의 굴욕이 지금도 살아 있다. 서울와서 참 많이도 인조의 흔적을 만났다

홍제천 세검정에서 인조반정을 꿈꾸며 칼을 갈고

인왕산 창의문(북소문,자하문)을 열고 들어갔던 인조반정의 그 폐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조선의 가장 무능력 임금으로 남았는지...

 

슬픈 역사를 뒤로 하고 단체사진 한장을 남기고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 나온다

 

사거리가 나오면 우틀

 

사거리에 있는 이정표들

 

바로 영회원 500m 이정표 삼거리에서 농장 안쪽으로 우틀

 

구름산을 바라 보면서 진행한다

 

성민농원 표지판을 지나면 견공이 먼저 반기고 있는 금천강씨 세장지(世葬地: 선영姜碩期  묘가 나온다

금천강씨 세장지(世葬地: 선영姜碩期  묘

신도비에서 영회원 가는 길로 100여m 나아가면 ‘영회원 500m’ 안내판이 보이고

그 옆으로 구름산 방향 갈래길이 있다.

안쪽 100여m 되는 곳에 금천강씨 세장지(世葬地: 선영)가 있다.

모두 46기의 묘라 하는데 구름산 품에 안겨 편안하다.

 

세장지 전경

 

아방리(鵝房里), 아마도 거위의 품처럼 따듯해서 그렇게 이름붙였을 것이다.

요즈음 이 지역 이름을 기록한 한자를 보면 阿方里라 쓰고 있는데

신도비에는 분명 鵝房里로 기록되어 있으니 오류가 있었던 듯하다.

구름산을 일명 아왕봉(阿王峰 또는 阿王山)이라 하는데

이는 애기능을 한자화한 이름 (阿 王陵: 작은 왕릉)의 뒷산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즈음 쓰는 지명 阿方里는 아마도 阿王山이 빌미를 제공한 것 같다.

 

금천강씨 선영도와 계보가 적혀 있다

 

금천강씨 1세는 고려시대 강감찬 장군으로 알고 있다

 

빈(嬪)의 부친 문정공의 묘를 둘러 보고 돌아 나온다.

姜碩期  ( 선조13년(1580) ~ 인조21년(1643) 금천강씨 소헌세자의 장인

시조는 강이식(姜以式)이며 강감찬 장군은 인헌공파로 금천강씨의 1세이다

'강빈의 옥' 후 앞서 죽은 강석기는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의 부인은 처형되었으며

아들 강문성과 강문영은 장살 당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가문은 역적집안으로 멸문의 화를 당했다가 숙종 때 복관되었다

묘표, 상석, 향로석, 문인석, 망주석 등이 있다

 

묘표

호는 월당이고 사망 후 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문정공이며 (죽은 이의)이름은 석기라는 말이다.

 

다시 되돌아 나와 우틀하면

 

굽은 도로 언덕위에 신도비가 하나 서 있다

 

 

“大匡輔國 崇錄大夫 議政府 右議政 兼 領經筵事 監春秋館事 世子傅 諡 文貞 月塘 姜先生 神道碑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 시 문정 월당 강선생 신도비명)”.

 

소현세자의 장인이며 강빈의 아버지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의 졸기(卒記)와

금천강씨(衿川姜氏) 세장기(世葬記(藏紀))를 기록한 신도비(神道碑)이다.

 

뒷면

 

이곳 아방리는 고려 강감찬 장군을 중시조로 하는 금천(현 시흥) 강씨의 최대 집성촌이었다.

강빈의 아버지 문정공 강석기는 1643년(인조 21년) 사망하여 이곳 선영에 묻혔다.

비문을 지은 이는 신익성(申翊聖)으로 인조 때 사람이며,

글씨를 쓴 사람은 민병승(閔丙承)으로 고종 때 태어나 일제강점기를 보낸 이이다.

전서(篆書)를 쓴 김용진(金容鎭)도 일제강점기에 작품활동을 한 이이니

무슨 까닭으로 300년이란 시간을 격(隔)한 이들이 한 비석에 등장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아버지가 죽자 맏아들 문성(文星) 등이 오위도총부 도총관 신익성(申翊聖)에게 아버지의 비문을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이 비문인데 미처 비(碑)를 만들기도 전에 소현세자가 죽고

그 따님 강빈이 시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하는 참혹한 일이 벌어졌으며 강씨 일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니

비는 물론 그 묘도 돌보는 이 없는 폐묘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10세손의 주도로 1940년 무렵 이 비를 세웠다.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계속 길을 제촉하면 애기능낚시터를 지나 한치고개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 어디로 가든 도덕산으로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