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서울시내 답사기

초보산꾼과 함께 걷는 곳 : 동망봉(東望峯) - 단종의 못다 이룬 꿈을 그리워하다

산중산담 2014. 12. 5. 23:34

 

초보산꾼과 함께 걷는 곳 : 동망봉(東望峯)과 채석장

 

초보산꾼의 산행기 : http://blog.daum.net/kmhcshh/2202와 함께 합니다

 

조선 최초로 간택으로 왕비가 되신 분이 정순왕후인데 권력에 눈이 멀었던 수양대군이

당시 이렇다할 권력이 없었던 친구인 송현수의 여식을 왕비로 간택한 것은 외척의 간섭없는 왕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결혼도 안한 왕을 쫒아낸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빨리 결혼시켜 상왕이라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치밀한 계획아래

속전속결로 이루어지고 힘이 없던 단종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1455년 7월, 왕이 된지 불과 3년만에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말았다

어린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웠을 정치적 싸움에 양위하면서

조금이라도 마음졸이며 살지 않기를 바랐을 단종과 정순왕후의 생각과 달리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死六臣)과 연루자 70여명이 모조리 처형당하는 피비바람을 몰고 왔으니...

우리가 대간길이나 정맥길에서 만난 단종에 대한 민초들의 생각을 만날 수 있었던게

이런 역사적인 아픔이 있었기에 더욱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소중함을 느끼에 된다

노산군 부인으로 강등돼 궁궐에서 쫓겨난 정순왕후의 삶이 우리를 더욱 가슴 미어지게 한다

친정 아버지인 송현수를 비롯한 남자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고

조용히 살고자 했던 바람은 거센 바람앞에서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는 영도교(永渡橋)에서

단종과 기약없는 이별로 역사는 진행되고 있었으니 짧은 만남과 긴이별이 서리어 있다

한 나라의 국모였던 그녀가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채 평민보다 못한 삶을 살게 된다

그때 나이가 불과 18세 꽃다운 나이에 내몰린 삶은 어떠했을지...

지금도 사인이 명확하지 않은 단종의 영월에서의 죽음 소식에 통곡하며

이떄부터 한평생을 이 동망봉에 올라 눈물지으며 단종을 그리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으로만 끝났다면 동망봉의 의미가 그저 한여인의 슬픈 望夫歌로 들렸겠지만

그리움으로 끝나지 않고 국모로서의 새로운 삶의 본보기로 여생을 살았기에

이 동망봉이 더욱 가슴으로 와 닿는 것이리라

60여년을 더 살면서도 서렵고 고된 삶을 지탱할 수 있었던 힘은 아마 단종에 대한 못다 이룬 꿈일 것이다

짧은 제위 기간동안 마음졸이며 살았을 단종에 대한 애석함, 뜻을 펴기도 전에 죽임을 당한 단종에 대한 아쉬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더욱 흐르는 눈물을 감싸안고 국망봉에서 다짐했으리라

 

어린 단종이어서가 아니라 임금 단종이 꼭 이루어야 했을 꿈을 생각했기에

왕비로써의 채통을 지키면서도 민초들과 당당하게 삶의 교감을 이루며 살아갔던 이유는 아닐련지...

후대 사람들이 숱한 왕실의 여성들 중에서도 정순왕후의 삶을 기억하고 기리는 것은

단종의 못다 이룬 꿈을 중생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진정한 국모로 거듭났던 삶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정순왕후의 행적을 찾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것은 애틋함만은 아닐 것이다

홀로 지낸 60여년의 세월이 주는 무게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때문이다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기구한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민초들과 어울려 살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어려울 때마다 또 얼마나 단종이 그리웠을 련지... 남몰래 흘렸을 눈물이 그려진다

              

                                                                     초보산꾼 여행기중에서 

 

 

**** 미타사에서 동망봉까지 *******************************

 

미타사에서 동망봉 이정석있는 곳으로 올라와 동망봉쉼터로 올라

 

 

계속 올라가면 E편한 세상아파트 보문단지 정문을 나와 좌틀

 

 

아남아파트가 보이면서 동망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망봉 삼거리

 

 

체육시설이 있는 동망봉이 보인다

 

 

 

체육시설 옆에 동망봉(東望峯) 이정석

 

 

 

 

동망봉 정상에서 본 채석장

채석장

동망봉의 왼쪽 아래편으로 나 있는 길을 걷다보면 '채석장 길'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표지판은 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 쓸 화강암을 떼어 갔다고 한다.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역사의 아픔이 있는 현장이다

서울 내사산중의 하나인 낙산의 반절이 사라져 가버렸으니...

영조 47년에, 그 친필로 이 암벽 위에 '동망봉'이라는 글씨를 새겨 추모했다고 한다. 채석장이 되면서 그마저도 떨어져 나갔으니...

동대문운동장에 이어 일제시대의 아픔을 생각해  본다

 

 

내림길

 

 

 

 

 

 

 

채석장

 

 

 

 

 

 

 

 

 

 

 

 

                            초보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