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과 함께 걷는 곳 : 청룡사와 정업원 구기터 - 정순왕후의 거처
초보산꾼의 산행기 : http://blog.daum.net/kmhcshh/2202와 함께 합니다
청룡사 - 정순왕후의 거처
청룡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명으로 창건되어 비구니 혜원을 주석하게 하였다.
단종과 생이별을 한 후 정순왕후는 청룡사에서 세 명의 여종과 함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세조는 정선왕후를 위해 영빈정(英嬪亭)을 지어주고 식량과 생필품을 보냈으나 왕궁에서 보내온 모든 물품을 거절하고 정업원에서 살았다.
화가 난 세조는 그들에게 일체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청룡사는 이곳에 단종비의 사당을 모시고 매년 다례재를 봉행하며 그녀의 넋을 기리고 있다
정업원(淨業院) 자료 http://cafe.daum.net/millennium7/5P2o/38?docid
정업은 청정하고 깨끗한 행위로서 선업(善業)을 뜻하며, 정토왕생을 위해 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는 행위의 불교용어다.
그 뜻을 살린 정업원은 고려 왕실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유생들이 혁파의 대상으로 여겨 논란을 거듭하다가 1505년 연산군에 의해 폐지되었다.
그 후 중종이 다시 설치하려 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1550년(명종 5년)에 다시 설치했으나
1612년(선조 40년)에 비구니들을 내쫓으며 혁파한 후 영원히 복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771년 (영조 47년)에 영조가 청용사를 들러 정순왕후의 이야기를 물어 확인한 후 정업원 구기비를 세우고
동망봉이라는 친필 표석을 세워 단종을 애도하였는데, 이때부터 절 이름인 청용사를 정업원이라 불렀다.
채석장에서 보았듯이 일제에 의해 동망봉이라는 친필 표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1823년(순조 23)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병세가 깊어지자 부원군인 김조순(金祖淳)이 이 절에서 기도를 올렸는데,
왕후의 병이 나은 뒤 김조순이 절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럼 임금이 죽으면 후궁들의 삶이 궁금하다
조선시대의 후궁들은 임금이 죽으면 궁 밖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이들의 일부는 불교에 귀의하여 임금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내기도 하고 일부는 정업원에서 보냈다.
초기에는 당당한 실세들의 궁내 종교행위였는데 후기에는 후궁들이 여생을 보내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 한물간 여인들의 한풀이 장소쯤으로 여기던 정업원은 조선 여인의 심금을 울린 단종비 정순왕후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 더 애절하다.지금도 가슴 찡하게 전해오는 정순왕후의 이야기는 권좌에서 밀린 현대판 정치인들의 최후를 보는 것 같아 더 실감있는 이야기로 살아난다.
그러나 여기 스님의 말씀으로는 여기에 들어오면 역적으로 취급되어 함부러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 창신역에서 정업원터까지 등로 **************************
창신역 4번출구 정류장 표시 있는 곳으로 내려와
이 길로 올라오면
정업원 구기터 이정표가 있다
청룡사 앞에서
삼각산청룡사라 쓰여있는 문을 지나면 대웅전이 보인다
우화루
귀양길에 나선 단종과 왕비가 마지막 밤을 보냈다고 전해지는 우화루(雨花樓)가 있다.
‘꽃이 비처럼 흩날리듯 쏟아졌다’는 뜻의 우화루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영원히 이별한 장소라는 의미로 ‘영리정(永離亭)’으로 불렸다.
이후 영원한 아름다움을 간직했다는 뜻의 ‘영미정(永美亭)’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면으로 동망봉이 보이는 장소라면서 명당자리라고 스님이 말씀하신다
정업원구기비가 있는 터로 들어가는 쪽문이 잠겨 있다
지금은 비구니절이라고 하시면서 스님으로 부터 절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받고 정업원구기비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전하자
나름대로 절을 관리할려면 돈이 필요한데 관리가 쉽지 않다고 하시면서 미안해 하신다
영도교가 마지막 코스라고 했더니 불분명한 이름인 영도교라 붙여진 이름에 대해 아쉬음을 전하면서 영미교로 불러야 한다고 다짐을 두신다.
절에 대한 역사는 물론 정순왕후의 역사적 배경까지 역사선생님같은 강의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합장
절문을 나와 올라 왔던 길로 다시 조금 내려오면 정업원터 이정표가 있다
비문은 볼 수 없지만 현판은 볼 수 있다
영조의 역사관 자료 : http://blog.daum.net/kanggiok/6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후 정순왕후가 겪은 고난이 영조에게는 남의 일같이 않게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무술이 소생으로서 왕위에 오르기까지 위태로운 고난을 겪은 영조는 자신의 아픔이 정순왕후의 아픔에 오버랩되어 북바쳐오는 슬픔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왕의 체통도 잊고 눈물을 삼키며 썼다는 음체서(飮涕書)의 기록을 남겼다.
여기에는 영조의 올바른 역사관을 엿볼 수 있다.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부끄러운 역사도 영원히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제왕으로서의 역사인식을 피력했다.
현판의 ‘前峰後巖 於千萬年’이 그것이다.
이를 왕의 입장에서 보면 ‘앞의 산봉우리여, 뒤 언덕의 바위여, 천만년 영원하라.’는 명령형 해석이 가능하고,
문학적으로 보면 뒷부분을 ‘영원하리라’는 영탄적 해석이 가능하다.
이 작은 현판과 비문 앞에서 한 임금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왕권에 대한 인간의 욕망, 그리고 그에 따른 여인의 한을 읽을 수 있으니
역사의 현장은 세월이 갈수록 더 찬란한 빛으로 후세를 교훈한다.
역사는 그렇게 옳게 산 사람과 그르게 산 사람을 심판하는 공정한 거울과 같은 것이니 바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문틀사이로 어렵게 반룡송을 찍어 본다
반룡(盤龍)은 아직 하늘에 오르지 않고 땅에 서려 있는 용을 일컫는 말이므로
반룡송은 아직 승천하지 못한 용처럼 위로 4m정도만 자라다가 몸을 비틀어 옆으로 가지를 뻗는 소나무를 말한다.
반송(盤松)이 밑둥지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를 뻗어 버섯 모양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라면
반룡송(盤龍松)은 밑둥지에서 한 줄기로 솟아오르다가 옆으로 뻗는 것이 반송과 다르다.
자료 : 장수군청 안에 있는 의암송 - 정업원터의 반룡송과 비교하니 관리가 필요할 듯
정순왕후의 어렵던 시절을 함께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정감이 가지만 틈새로 봐야만 하는 안타까움도 있다
역사를 다시 단종시대로 되돌린다면 이렇게 넓은 가슴으로 백성들을 보살펴 주었을까?
무더웠던 오늘 시내길을 걸으면서 받았던 더위를 한번에 쓸어내릴 것 같은 소나무이다. 이런 지도자가 그립다
초보산꾼 역사이야기 중에서
초보산꾼
사진 추가
청룡사
바로 아래 정업원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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