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며 희망을 노래하다.
2014년과 2015년 을미년이 교차하는 12월 31일 남도의 바다 장흥으로 갑니다. 가는 해와 오는 해를 맞으며, 지나간 세월을 회고하고, 맞이할 시간들을 준비하는 송년기행이 전라남도 장흥군 회진면 노력도의 바닷가에서 펼쳐집니다.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소설가 이청준의 고향인 장흥의 회진 일대에서 펼쳐질 이번 여정은 겨울 바다와 문학의 서정에 흠뻑 빠지는 기행이 될 것입니다.
“강진을 지나도 아침은 아직 멀다. 어슴프레 남해 바다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대구 마량, 대덕을 지나 회진에 닿는다. 내 기억에 아스라한 윤남식 이라는 어렸을 때의 친구가 살았던 고향이며, 이청준, 한승원, 이승우라는 소설가의 고향인 이곳 장흥 땅 회진은 어둠에 잠겨있다. 우리들은 밤이라서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지라 아무렇게나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잠이 이렇게 설레임 이 깊은데 오기나 하는가, 불 켜진 슈퍼마켓 앞으로 차를 옮긴다. 바다낚시를 하러온 사람들의 움직임이 벌써부터 부산하고 선창가는 왁자지껄 하다. “이 펄펄 뛰는 이 기(게)가 두 마리 세 마리에 천원이여” 그래 이 꼭두새벽에 희망이라는 이름의 상점을 펼친 저 조선 어머니들의 걸쭉한 말들 속에 싱싱한 바다 내음새와 삶의 원동력이 펄펄 살아 있구나! 예로부터 「집나간 며느리도 전어錢魚 굽는 냄새 맡으면 집으로 돌아온다」라는 말이 있을만큼 그 냄새와 맛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는 성질 급한 전어도 아직 살아서 아가미들을 제 힘껏 벌리고 송어도 쭈꾸미들도 고무 다라이 속에 갇힌 채 삶을 향해서 뛰고 있구나!
우리들은 아침 바다에 솟아 오르는 아침 해를 보기위해 바다가 보이는 마을로 향했다. 연동 저수지를 지나 선자동에 들어섰다. 마을의 어느 곳이나 어구들이 쌓여있고, 어둠속에 섬 하나 보인다. 큰 탱자가 물위에 떠있는 것 같아서 탱자도라 불리는 탱자도에서 불빛들이 몇개 보이고 그 뒤에 보이는 큰 섬은 노력도다.
파도의 움직임이 꿈길 처럼 흔들리고
소마리도, 대마리도가 어슴프레 눈 안에 들어온다. 서서히 물이 빠지고 바닷가로 내려서자. 찰싹 거리는 조약돌의 울음소리와 출렁거리며 새벽을 여는 파도의 움직임들이 꿈길처럼 흔들린다. 그리고 하나 두울 아침을 열 듯 바다를 가르듯 자그마한 배들이 지나가고 그 속에 노력섬 뒤쪽에서 해가 솟는 붉은 기운이 번져오는 가운데 진목리로 길을 재촉했다.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소설가 이청준은 장흥군 대덕면, (회진면)의 진목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회진이라는 작은 포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의 몇 년간 그의 가족들이 차례로 죽어갔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세 살난 아우의 죽음과 결핵으로 죽어간 맏형,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온가족들과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충격을 남겨 놓았다. 그때부터 그는 형의 정신적인 유물 이었던 책과 노트를 통해서 죽은 사람과의 영적 교류를 시작 하였다.
한줌의 재로 변해버린 형의 육신이 어린 이청준의 마음속에서 훌륭하게 재생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빛나는 문학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형의 기록을 전하기 위하여 지루함을 참으며 책을 읽었고.... 나는 그 형과만 지냈다. 책과 노트 속에서 형을 만나 그 형의 꿈과 소망과 슬픔들을 은밀히 이야기 들었다.”
이청준은 그의 작품「눈길」에서 가난과 어머니와 그 흰 백색의 눈(雪을) 아름답게 묘사했고, 선학동 나그네, 당신들의 천국, 잔인한 도시. 서편제등 수많은 작품 속에서 그는 권력과 언어의 문제 정치와 사회의 문제 그리고 한의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왔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진목리 마을은 다른 여느 마을이나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참나무가 많아 참냉기 또는 진목이라 부르는 진목 마을에서 참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참나무가 참나무인 것은 어느 때부터였을까? 신라가 가장 번성하였을 때 17만호의 경주시내 집집마다 숯불로 불을 지폈던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숯 중에는 참나무 숯을 최고로 쳤고, 나무 역시 강했기 때문에 참나무라고 하여서 참 진眞자 진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봄날 나라의 모든 산들마다 피어나는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부르고 철쭉은 개 꽃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청준선생이 태어난 그 집에는 그가 태어난 집에는 20여 년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다가 지금은 군에서 매입하였다. 그 집 담 벽 속에는 철늦은 도마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 받으며 삭그미(이진목)마을과 도청제를 지나자. 천관산이 눈앞이다.
대덕읍을 지나 방촌리에 접어들면 제법 규모가 큰 고인돌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옛 사람들의 무덤들이 옹기종기 서있는 소나무 숲을 벗어나 바라보면 천관산이 듬직한 맏형 같은 자세로 얼굴을 내민다.
이곳 방촌리에도 재미있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할미처럼 구부정하게 생긴 할미바우 밑에 있는 사랑바우는 위가 넓고 평평해서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이는 바우라고 부르고, 세태 동 남쪽에 있는 회화나무인 여기정女妓亭(삼괴정)은 이곳 방촌리가 고려 시절 회주고을이었을 때 기생 명월明月과 옥경玉京이 이 나무 밑에서 놀았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사람이 엎어져 있는 것 같다고 엎진바우라는 이름이 붙은 바우 아래에 있는 턱이진 바우는 아들바우라고 부르는데, 아들을 바라는 사람이 돌을 던져서 그 턱에 얹히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천관산 자락의 오래된 옛집인 위씨 가옥의 고즈넉함을 맘껏 받아들인 우리 일행은 아침밥을 먹고 산행에 접어들었다.
장천암에는 위백규선생의 흔적이
길은 평탄하다. 산세가 이 정도라면 나무숲들이 울창할 듯싶지만 예상보다 울창하지는 않다. 그러나 골짜기만큼은 제법 큰 산 못지않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선생은 이 골짜기의 볼만한 곳들에 이름을 남겼다. 뇌문탄, 청냉회, 와룡홍등의 이름을 붙여주고 장천 팔경 이라고 하였다지만 그 곳곳의 명소에 취할 시간이 많지 않은 우리로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떠날 수밖에, 도화교를 지나 조금 오르니 장천재가 보인다. 그 옛날 이곳에 장천암 이라는 암자가 있었던 것을 헐어버리고 장흥 위씨들이 재실을 지었다고 하며 위백규 선생이 그의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고도 하는데 장흥에는 사람 셋이 모이면 그 한사람은 위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위씨들이 많다고 한다.“
신정일의 <나를 찾아가는 하루 산행> 중에서
장흥의 보림사와 문화유산을 답사할 이번 여정에 참여를 바랍니다.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섬 기행<완도, 노화도와 보길도를 가다> (0) | 2015.02.13 |
---|---|
덕유산을 올랐다가 구천동 13경을 답사하다. (0) | 2015.02.13 |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아름다운 남도의 길에서 전라도 맛을 느끼다.> (0) | 2015.02.13 |
아름다운 산성 상당산성이 있는 청주와 고두미 마을을 찾아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0) | 2015.02.13 |
전주 천변에 둥둥 떠가던 만장과 꽃상여, (0) | 2015.02.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