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아름다운 산성 상당산성이 있는 청주와 고두미 마을을 찾아
2014년 12월의 첫 주말인 토요일 청주 일대를 답사합니다. 아름답고 고즈넉한 산성인 청주의 상당산성과 민족주의자로 아나키스트였던 단재 신채호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청원군 고두미 마을 일대를 답사하고 청주의 문화유산 답사를 할 예정입니다.
청주의 용두사터 당간지주, 용화사 석불 군상, 흥덕사터와 고인쇄박물관을 답사할 이번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동쪽으로 것대고개(옛 이름이 거대령)을 넘으면 사적 제212호로 지정되어 있는 상당산성(上黨山城)이 있다. 청원군 낭성면과 청주시 산성동 상당산에 걸쳐 있는 상당산성은 석성으로 보은의 삼년산성과 더불어 충북을 대표하는 산성 가운데 한 곳이다. 백제의 상당현이 있던 이곳에 성이 처음 쌓여진 것은 백제 때부터였을 것이다. 통일신라 때 관리와 군사가 주둔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당시 충청병사로 있던 원균(元均)이 수축하였고, 이인좌의 난이 끝난 뒤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산성을 지나 북동쪽으로 한참 가면 낭성면 귀래리에 이르고, 이곳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사당과 묘소가 있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사학자이자 언론인, 민족운동가로 활동했던 신채호는 지금의 대전시 중구 이남동 도림마을에서 출생하였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에서 성장하였다. 고향 근처에 설립된 문동학원의 강사로서 계몽운동과 신교육운동을 펼쳤다.
아나키스트 신채호
신채호는 ?황성신문?와 ?대한매일신보?에 글을 쓰며 언론활동을 통해 민중계몽과 구국운동을 펴고자 했다. 그리하여 1907년에 안창호 등과 항일비밀결사체인 신민회를 결성하였으며,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중국으로 갔으나 독립운동의 방책을 둘러싸고 신민회 동지들 사이에 교육보급을 통한 준비론과 직접적인 무력투쟁론으로 의견이 나뉘자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간다. 상해와 만주․북경을 떠도는 스물여섯 해의 망명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신채호의 투쟁노선은 폭력저항이었다. 그는 일본을 조선의 국호와 정권과 생존을 빼앗아간 강도로 규정하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이 정당한 수단임을 천명하였다. 이어서 일제와 타협하려는 모든 행위를 적으로 규정하고, 외교론과 준비론 등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방식을 비판한 후 강도 일제를 몰아낼 방법은 민중의 직접 혁명뿐임을 강조하였다.
신채호는 망명생활 가운데서도 한국 고대사 연구에 전념하여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의 역사 연구서들을 집필하였다. 그는 단군, 부여와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하고 그 무대를 한반도․만주에 국한시킨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까지 확대하였다. 또 부여․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신채호의 역사학은 이전의 유교주의 역사 서술이나 당시 일본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관을 벗어난 근대적인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의 출발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기록’으로 파악하고 역사 연구에서 실증을 강조했으며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찾으려는 민중중심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1925년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신채호는 대만에서 체포되었으며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신채호는 법정에서 “우리 동포가 잃은 나라를 찾고자 하여 하는 행동은 모두가 정당하다. 일본의 강도 세력 앞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건 사기도 위법도 아니다. 독립운동으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당당히 말한 그는 여순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쉰일곱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생전에 신채호는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리라”고 했으므로 아내와 두 아들이 화장한 후 유골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오랜 망명생활로 민적(民籍)이 없었으므로 매장 허가를 얻지 못해 암장을 하였고, 정부에서는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내렸다. 그러나 신채호의 수난은 해방 뒤에도 그치지 않아 오랫동안 대한민국의 국적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가 얼마 전에야 국적에 올랐다.
꿋꿋한 기상과 뛰어난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각인된 신채호에 대한 여러 가지 재미난 일화들이 전해온다.
오산학교에 재직 중에는 담배를 너무나 좋아하여 담뱃대를 털고 대통이 식는 동안을 못 참아서 창에 구멍을 내어 찬바람으로 식혔다. 그는 세수할 때는 소매가 젖거나 말거나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하는 바람에 옷이 흠뻑 젖는 것이 다반사였다.
또 자신이 속병에 먹으려고 환약을 한재 지어다 두었던 것을 아내가 훔쳐 먹는다고 허리춤에다 약봉지를 매달고 다니기도 했으며, 아이가 우유를 먹고 체해서 죽자, 우유 통을 삼청동의 냇가에서 도끼로 깨뜨려 버렸던 일도 있었다. 백두산을 등반하던 중에 친구의 안내를 받아 중국집에서 고기를 맛있게; 먹은 두, 그 고기가 “일본에서 가져 온 ‘동양어東洋魚‘ 라는 말을 듣고는 ”왜놈이 잡은 고기’라고 분개하고서 화장실에 가서 다 토해버렸다고 한다.
신채호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그가 일본 여자들이 입는 빨간 속옷을 입고 있었다. 그것을 본 주위 사람들이 그것을 나무라자 “누가 그런 줄 알았는가? 지나가다가 빛이 하도 곱기에 사 입었다네.” 하고 태연스레 말하기도 했던 사람이 단재 신채호였다.
신채호를 두고 언론인 천관우千寬宇는 “철저와 준열로 일관된 투쟁으로 신문을 제작하고 역사를 서술하고 결사를 조직하고, 자신의 옥사로 마무리 지었고, 또 실천가로서만이 아니라, 우리 근대민족주의 사상 전개에 있어서 탁월한 이론가였다.” 고 평한 바 있다. 신채호는 ?조선사총론?에서 우리 역사의 빈곤성과 부재를 정확하게 갈파하였는데, 중국이 우리의 옛 땅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삽입하려고 하는데도 갈팡질팡만 거듭하고 있는 오늘의 역사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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