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봄 걷기 학교, 진도에서 장흥까지 남도의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2016년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 오월 어린이날을 즈음하여 4일(수) 밤부터 7일(토요일) 까지 3박 4일 간 봄 걷기학교를 엽니다. 자녀와 함께, 친구와 함께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전남 진도에서 해남, 강진, 장흥 일대의 문학과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걷게 될 이번여정에 초대합니다.
진도 끝자락에 있는 남도석성,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가 갈라지는 신비의 바닷길, 운림산방과 쌍계사, 그리고 이순신의 명량 대첩의 현장인 우수영 일대와 삼별초의 비운이 서린 용장산성 일대가 첫 날 여정입니다.
둘째 날은 해남의 아름다운 절 달마산 자락의 미황사에서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길을 걷고, 삼남대로의 출발지인 이진성으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걷고, 다산초당을 답사한 뒤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셋째 날은 강진의 다산 정약용의 자취가 서린 길을 걷고, 가우도 출렁다리를 지나 한국문학사상 기념비적인 소설, <당신들의 천국> <눈길> <선학동 나그네>등을 지은 회진의 이청준 선생의 생가와 장성의 편백나무 숲, 그리고 장흥 일대의 동학의 현장인 석대들 일대와 보림사를 답사하고 마무리 될 것입니다.
진도 그 유배의 땅
이석형(李石亨)이 “땅이 외지고 백성이 순박하여, 풍속이 다스리기 쉽네” 하였으며, 김극기가 “외로운 성이 천험(天險)에 걸터앉아 산등성이를 삼키고, 집집이 벼랑에 의지하여 물결을 베개하네” 하였던 진도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한을 간직한 유배의 땅이었다.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그의 아들 공의(公儀)가 진도 땅으로 유배를 왔고, 선조의 큰아들이었던 임해군도 이곳으로 귀양을 왔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유배를 왔으면 조선 영조 때의 전라도 감사가 조정에 이러한 건의문을 보냈겠는가?
“진도에는 유배자가 너무 많습니다. 이들을 먹여 살리느라 죄 없는 섬사람들까지 굶어죽을 판이니 유배지를 다른 곳으로 옮겨주십시오.”
이 땅의 지식인들이 오고 간 유배의 땅이라 그러했는지도 몰라도 진도는 우리나라 민속문화의 보고 중의 보고이다.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라고 시작하는 진도아리랑뿐만 아니라 진도 다시래기, 남도 들노래, 상여를 메고 가면서 부르는 진도 만가 등 수많은 유형․무형의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고, 또한 진돗개의 명성은 얼마나 높은가.
그러나 진도의 역사에 뚜렷하게 발자취를 남긴 것 중 하나가 삼별초군의 한이 서린 용장산성(龍藏山城)일 것이다. 고려 원종 때 몽고군의 침입을 받아 치욕적인 강화도조약을 맺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군은 원조의 육촌형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였으며, 장군 배중손(裵仲孫)은 쫓기고 흩어지는 삼별초 군을 모아 강화도를 떠난 지 두 달 열이레 만에 진도에 이르렀다. 그들은 용장산성에 터를 잡고 풍수지리상 용 다섯 마리가 구슬 하나를 두고 싸우는 모양을 갖추고 있는 이 산 기슭에 나라를 세운 뒤 연호를 오랑(五狼)으로 정한다. 그러나 진도를 거점으로 큰 세력을 떨쳤던 삼별초군은 1271년 5월 15일 고려 장수 김방경(金方慶)과 몽고장수 홍다구((洪茶丘)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참패하고 배중손과 왕온은 죽고 만다.
배중손이 죽은 곳으로 알려진 사적 제127호 남도석성(南桃石城)은 삼별초군이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고 하지만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 때부터 진도군에는 세 고을이 있었기 때문에 그 중 한 고을이 남도석성을 중심으로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도석성은 임진왜란 때 무너졌던 것을 다시 쌓았다고 하는데 높이가 3~5미터이고 길이가 54미터인 성벽과 함께 동문․서문․남문이 남아 있어 그나마 보존이 잘된 성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낙안읍성 민속마을처럼 돌담과 흙벽으로 담을 두른 민가에 사람들이 그대로 살고 있어 옛 성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유물이다. 성문 밖으로 나오면 흘러가는 개천가에 두 개의 홍교(虹橋) 쌍홍교와 단홍교가 있는데, 이 중 단홍교는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쌍홍교는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이 놓았다고 전해진다.
조선일보의 주필이었던 송지영씨가 “삼별초군이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쓰러졌다고 해서, 또 비굴한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역적의 반란으로 몰아 부침이 정녕 나라의 정통을 부르짖음이라 한다면, 강토는 진작 어느 오랑캐에게 짓밟혀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였을 것이며, 겨레는 푸줏간이나 생선가게의 어육이 되어 얼빠진 허수아비로 됐을 것이 아닌가?”라고 말한 것처럼, 역사란 것은 시대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평가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진도는 “탐라에서 바닷길로 나오는 목이 되어서 말․소․피혁․진주․자개․귤․유자․말 갈기털․대나무 등을 판매하는 이익이 있다”고 ?택리지?에 기록되어 있다.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에서 벽파진 건너 진도군으로 건너가는 해협이 가로 놓여 있다. 그 바다가 바로 울돌목, 즉 그 당시의 이름으로는 돌맥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벽파진은 서쪽으로 60리에 있으며 진도로 통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바다 이름이 울돌목인데 한자로는 명량(鳴梁)이라고 부른다.
우수영과 진도 사이에 있다. 병 주둥이처럼 생겼는데, 큰 물결과 커다란 파도가 좁은 협곡과 만나 방아를 찧는 듯한 격렬한 소리를 내며 운다. 배가 지나갈 때면, 위로 솟구쳤다가 바다 속으로 빠지는 듯하다. 충무공 이순신이 왜적을 유인하여 이곳에 이르렀다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고 <여지도서>해남군 편에 실린 명량은 조수가 들고 날 때마다 좁은 해협으로 바닷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한번 조류에 휩쓸리면 대형 기선조차 거스를 수가 없을 만큼 물살이 세다. 오죽했으면 “울돌목이 사돈을 맺자고 해도 안 맺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일까.(...)
두류산 밑에 대둔사가 있고 그 땅끝 기맥이 끝나는 지점 달마산 자락에 미황사(美黃寺)가 있다. 미황사는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절이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의 본사인 두륜산 대둔사의 말사로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했다고 하는데, 확실한 창건연대나 사적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다. 다만 숙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閔睦)이 지은 ?미황사 사적기(寺蹟記)?에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해온다.
749년 8월에 한 척의 돌배[石船]가 아름다운 범패소리를 울리며 땅 끝에 있는 사자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 배는 며칠 동안을 두고 사람들이 다가서면 멀어지고 돌아서면 다가오고는 하였다. 이때 의조화상이 두 사미승과 제자 100여 명을 데리고 목욕재계한 후 기도를 하며 해변에 나아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의조화상이 오르니 배 안에는 금인이 노를 잡고 있었고 금으로 된 함과 검은 바위가 있었다. 금함 속에서는?화엄경? ?법화경? 등의 불교경전과 60나한과 탱화 등이 들어 있었다. 옆에 있던 검은 바위를 깨뜨렸더니 검은 소가 뛰어나와 금방 큰 소가 되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났다. 그는 자기는 우전국(인도)의 국왕인데 “금강산이 일만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제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인도로 되돌아가던 길에 금강산과 비슷한 이곳을 보고 찾아왔다. 경전과 불상을 이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안치하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의조화상은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면서 누웠다가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였고 마지막 멈춘 곳에 미황사를 세웠다. 절 이름을 미황사라고 지은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워 미(美)자를 넣고 금인의 빛깔에서 황(黃)자를 따왔다. (...)
소마리도, 대마리도가 어슴프레 눈 안에 들어온다. 서서히 물이 빠지고 바닷가로 내려서자. 찰싹 거리는 조약돌의 울음소리와 출렁거리며 새벽을 여는 파도의 움직임들이 꿈길처럼 흔들린다 그리고 하나 두울 아침을 열 듯 바다를 가르듯 자그마한 배들이 지나가고 그 속에 노력섬 뒤쪽에서 해가 솟는 붉은 기운이 번져오는 가운데 진목리로 길을 재촉했다.
한국문학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소설가 이청준은 장흥군 대덕면, (회진면)의 진목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회진이라는 작은 포구에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무렵의 몇 년간 그의 가족들이 차례로 죽어갔다. 그의 나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세 살난 아우의 죽음과 결핵으로 죽어간 맏형,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온가족들과 그에게 지울 수 없는 큰 충격을 남겨 놓았다. 그때부터 그는 형의 정신적인 유물 이었던 책과 노트를 통해서 죽은 사람과의 영적 교류를 시작 하였다.
한줌의 재로 변해버린 형의 육신이 어린 이청준의 마음속에서 훌륭하게 재생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그의 빛나는 문학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이다.
“나는 그 형의 기록을 전하기 위하여 지루함을 참으며 책을 읽었고.... 나는 그 형과만 지냈다. 책과 노트 속에서 형을 만나 그 형의 꿈과 소망과 슬픔들을 은밀히 이야기 들었다.”
이청준은 그의 작품「눈길」에서 가난과 어머니와 그 흰 백색의 눈(雪을) 아름답게 묘사했고, 선학동 나그네, 당신들의 천국, 잔인한 도시. 서편제등 수많은 작품 속에서 그는 권력과 언어의 문제 정치와 사회의 문제 그리고 한의 문제를 집요하게 천착해 왔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진목리 마을은 다른 여느 마을이나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참나무가 많아 참냉기 또는 진목이라 부르는 진목 마을에서 참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참나무가 참나무인 것은 어느 때부터였을까? 신라가 가장 번성하였을 때 17만호의 경주시내 집집마다 숯불로 불을 지폈던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숯 중에는 참나무 숯을 최고로 쳤고, 나무 역시 강했기 때문에 참나무라고 하여서 참 진眞자 진목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봄날 나라의 모든 산들마다 피어나는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부르고 철쭉은 개 꽃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이청준선생이 태어난 그 집에는 그가 태어난 집에는 20여 년 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와 살고 있다가 지금은 군에서 매입하였다. 그 집 담 벽 속에는 철늦은 도마도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 받으며 삭그미(이진목)마을과 도청제를 지나자. 천관산이 눈앞이다.
1. 일시: 2016년 5월 4일(수) 밤에 출발하여서 5,(어린이날)6. 7일(토요일)까지.
2. 출발시간 및 장소: 서울 저녁 8시 30분 양재역 12번 출구 국립외교원. 앞 출발
전주 저녁 11시 전주 월드컵경기장 앞 출발
3. 참가비: 20만 5천원(입장료 포함)
4. 어디로 가나요:
전남 진도 남도석성, 신비의 바닷길, 운림산방과 쌍계사, 이순신 유적지, 용장산성, 우수영,
해남 미황사에서 도솔암 가는 길, 삼남대로 출발지인 이진항에서 바닷길 걷기,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강진 다산 유적지 고성사 사는 길, 가우도 출렁다리, 청자 도요지, 장흥 이청준 생가, 회진, 장흥 읍내 석대뜰(장흥 동학 유적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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