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한국의 강 기행> 비단 결처럼 아름다운 금강錦江 천리 길을 여섯 번째로 걷는다.

산중산담 2016. 11. 30. 19:55

 

<한국의 강 기행> 비단 결처럼 아름다운 금강錦江 천리 길을 여섯 번째로 걷는다.

 

2016년 한국의 강 기행 금강 따라 천리 길10월 넷째 주말 여섯 번째로 이어집니다.

고주의 우금치를 시작으로 장자못, 왕진나루, 선조 때 역모자인 이몽학의 집터와 지천을 지나 부여와 강경으로 이어지는 여정이 금강 따라 여섯 번 째입니다.

 

개전마을의 늪지인 장자못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낚시질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참붕어가 잘 잡힌다는데 많이 잡았느냐고 물었더니 온지가 얼마 안돼서 그런지 아직 한 마리 마수도 못했단다. 이천여 평쯤 되는 이 장자 못에는 옛날에 용이 올라갔다는 전설과 큰 부자의 이야기가 서려있다. 큰 부자가 이곳에 살았는데 그는 무척 인색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스님이 찾아와서 적선을 부탁하자 그 부자는 쌀 대신 두엄을 퍼주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간 데 없고 별안간 비바람 일고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천지가 뒤집히더니 그 부자의 집이 못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 집에는 그 부자가 저장하였던 보물이 많이 묻혀있다고 전해오므로 1946년에 인근에 성머리 청년들이 그 보물을 찾기 위하여 발동기 10여 대를 놓고 물을 품었다고 한다. 밤낮 7일 간을 두고 물을 퍼내어 물이 줄어들자 사람들이 고기를 잡으려고 하는데 별안간 물이 크게 뒤집히더니 그 후로는 보물은커녕 고기도 한 마리 잡지 못한 채 헛수고만 했다고 한다.

 

그래 건널 수 없는 저 강처럼 나와 수많은 사람 사이에도 얼마나 많은 건널 수 없는 강들이 놓여있을까?

그러나 사람이 꼭 죽으라는 법은 없다던가. 먼발치에서 바라보니 지천에서 고기를 잡은 사람 둘이 세워둔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 그물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백마강교까지만 데려다 주면 기름 값이라도 주겠다. 오토바이 하나에 두 사람이 타고 하나에 한 사람이 타면 될 것 아닌가.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지만 빠졌던 힘이 샘솟는다. 그런데 재수가 없다보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50대인 두 사람 다 농아가 아닌가. 우리가 아무리 손짓발짓으로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으니까 저기 저 백마강교까지만 데려다 달라 후사하겠다.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한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수화를 배워 두었을텐데 다리가 몹시 아픈 김재승 회장은 다리가 아프다는 표시로 다리를 손으로 두드려도 보지만 두 사람은 한사코 안 되겠다는 표시다. 나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아픈 다리를 앞세우고 제방 둑을 걸어가고 채성석씨도 내 뒤를 따라오는데 그래도 미련이 남은 김회장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 쓴다.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불법으로 고기를 잡았기 때문에 가다가 누구를 만나는 걸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저 멀리 오토바이를 타고 사라져가고 김재승 회장은 맥이 빠진 채 축 늘어져 걸어온다. 작은 다리를 지나 장주 마을에 도착한다. 슬슬 배는 고프고 비는 다시 굵어진다. 강 답사는 이런 때가 가장 낭패다. 지류와 본류가 만나는 지점에 다리가 없으면 2km3km건 한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 장주마을에서 마을 사람에게 백마강교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시간이 걸리고 혹시 가는 버스가 언제 있느냐고 물어보자 백마강교까지 먼데요. 가만있자, 열두 시 버스가 있는데 지나갔네요. 다음 버스는 세시 차가 있어요.”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기다릴 수도 없고 걸어갈 수도 없고 차 길 옆 은행나무에 우산을 받쳐 들고 기대앉아 오지 않는 차를 기다린다. 어느 차든 먼저 오는 차를 세워 사정을 해야겠다.

지천이 지천이 아니로구나, 지천에서 지쳐버리니까 사람이 땀이 나고 그 땀에 흠뻑 젖으니 힘이 들 수밖에 다행스럽게 지나가는 트럭이 우리들의 사정을 들어주었고 백마강교를 건너 부여 관광 호텔에 도착한 때는 2시쯤이었다. 나이들 수록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던가. 오이소박이며, 된장국에 점심밥을 든든히 먹고 또 다시 백마강 다리로 가기 위해 우리들은 지나가는 승용차들을 세우려 했지만 우리 몰골을 보고 그랬는지 아무도 태워주지 않고 결국 썩음 썩음한 트럭이 우리를 태워 주었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난다던가. 주제 파악을 제대로 해야지. 차 속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던 백제가 공주로 옮긴 것은 475년이었다. 고구려는 백제의 서울인 위례성을 침범하여 개로왕을 붙잡아 목을 베어 죽였다. 백제는 금강 너머 계룡산을 근처에 둔 웅진에 도읍을 정하였으나,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주왕은 권신 해구에게 죽임을 당하고 삼근왕은 3년 만에 죽고 말았다.

동성왕 때 백제의 전성기를 맞았다가 육십여 년이 지난 후 성왕 16538년에 마지막으로 도읍지를 옮긴 것이 사비성, 곧 부여다. 이 부여가 122년에 걸쳐 백제의 흥망성쇠를 지켜보았는데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게 망한 것이 31대 의자왕, 6607월이었다.

백제의 부여, “날이 부우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나온 부여는 아침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조용했던 아침의 평온은 나당연합군의 침략으로 산산이 깨어졌다. “집들이 부서지고 시체가 풀 우거진 듯 하였다하였다던 부여의 낙화암이 <삼국유사>에는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뜻으로 타사암墮死巖으로 실려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낙화암洛花巖: 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宮女들이 솓아져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스스로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궁녀들이 떨어져 죽은 바위일 뿐이지 삼천궁녀가 꽃 잎처럼 백마강에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은 생겨나지 않았는데, 후일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동쪽은 공주의 대장촌(大庄村)이고, 서쪽은 이산(尼山 지금의 논산시)과 석성(石城 지금의 부여군) 두 고을이며, 또 남쪽은 연산(連山 지금의 논산시)과 은진(恩津 지금의 논산시) 두 고을이다. 이산과 연산은 산이 가깝지만 땅이 기름지고, 은진석성은 평야에 있지만 땅이 메마르며 수해와 가뭄의 재해를 자주 당한다. 이 네 고을은 경천과 통하면서 하나의 평야로 되었으며, 바다 조수가 강경을 거쳐 드나들기 때문에 들 가운데 여러 곳의 냇물과 골에 배가 통행하는 이익이 있다. “강경은 은진의 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산연산은진은 현재 논산시에 편입되었고, 석성은 부여군, 경천은 공주시에 속해 있다.

지금은 부여군에 딸린 하나의 작은 면이 된 석성현의 객관에서 최숙생崔淑生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비 온 뒤 마루와 창에 찬 기운 생겨나니, 나그네 회포 고적해서 홀로 난간에 의지했다. 숲을 뚫으며 회롱하는 까치 날라서 사로 쫓고, 섬돌에 눌린 떨기 대는 젖어서 마르지 않았구나, 세상일 분분한 것은 원래 정한 분수 있고, 봄 시름한 것은 까닭도 없어라. 내일 아침 예와 같이 동풍 길에는 좋은 청산 안계가 트이겠는가?“ 그리고 이맹상李孟常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베를 짜며 아침저녁을 보내니 뽕나무 숲 연기 깊은 곳에 한 마을을 이루었네.”

신정일의 <금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