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한국의 강 기행> 비단 결처럼 아름다운 금강錦江 천리 길을 다섯 번째로 걷는다.

산중산담 2016. 11. 30. 19:37

 

<한국의 강 기행> 비단 결처럼 아름다운 금강錦江 천리 길을 다섯 번째로 걷는다.

2016년 한국의 강 기행 금강 따라 천리 길이 다섯 번째로 추석이 지난 그 다음 주인 923()일부터 25()일까지 실시됩니다.

신탄진 건너편의 숨어 있는 아름다운 길을 걷고 내려가노라면 대전 부근에서 갑천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 그 이름 높았던 부강포구를 지나 금강의 지류 중 가장 큰 지류인 미호천을 받아들인 강물은 세종시를 지납니다.

금강의 절경인 창벽을 지난 강물이 백제의 두 번째 수도인 공주에 이르는 길을 걷게 될 이번 여정에 참여바랍니다.

 

리기다 소나무가 보기 드물게 쭉쭉 뻗어있는 솔밭 길을 따라 가니 오래 전에 걸은 듯한 입산금지라는 프랭카드가 걸려있다. 입산금지를 거꾸로 읽으면 지금 산에 들어가라는 말이 되니 우리들은 들어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런지 산길은 뚜렷하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고 걸어간 그 길은 안 갔더라면 서운할 만큼 고적하고 쓸쓸하게 아름답다.

길은 잃을수록 좋다

컴퓨터가 시키는 대로만 하다보면 되는 것이 없어, 오히려 감으로 하는 컴퓨터가 더 맞는 것 같아요.”라는 채성석씨의 말처럼 마을 주민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더라면 이 길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깎아지른 듯한 이 절벽 끄트머리에 이렇게 아름답고 소담한 길을 만들었던 옛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금강기행에서 이렇게 호젓하고 옛 스러운 길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을까? 문득 바라보면 발 아래로 강이 흐르고 모퉁이를 돌아가자. 골짜기에 이른다. 나무다리를 건너자 굿당이 있다. 이렇게 도시근교의 산 속에 굿당이 숨어있다는 걸 또한 어느 누가 알기나 하랴. 그러나 언제쯤부터였는지 한 채의 집은 허물어져가고 잡목 우거진 두어구비를 휘어 돌자 경부선 열차와 국도가 지나는 노상에 이른다.

신탄진 저 건너에 노산나루(신탄진 나루)가 있고 그 나루를 건너 수많은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발길을 옮겨갔으리라. 그 나루터도 나룻배도 사라진 신탄진에는 한국타이어 쌍용 등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옛 시절에는 신탄진이라는 담배를 생산하는 담배공장으로 이름을 드날렸었던 신탄진을 뒤로하고 안내원도 없는 양지 건널목을 지나 양지마을에 지난다. 강은 강대로 흐르고 눈 앞에 경부고속도로가 나타난다.

저렇게 한 치의 여미도 없이 달려가는 저 자동차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내가 이렇듯 가을 햇살 아래 금강 변을 따라 걸어도 세상은 여일하다는 듯이 그렇게 돌아가고 전화를 걸면 그 곳에 있을 사람들은 어김없이 있으면서 전화를 받는다. 나는 경부고속도로 아래를 걸으면서 있음과 없음의 의미 그리고 현존하는 것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양지마을을 지나 다리를 건너며 대청댐 상류에서는 못 느꼈던 냄새를 맡는다. 이곳에서부터 강은 썩어 가는 걸까.

 

부강 약수로 이름이 높았던 이 곳 부용에 옛 시절 이름이 높았던 부강 포구가 있었다. 금강 상류지역에 있었던 부강포구는 금강 수운의 가항 종점이었으며 수운에 이용되었던 하항이었던 까닭에 충청 내륙지방의 관문 역할을 했었다. 또한 황해에서 생산되는 어염과 일용잡회들이 이곳으로 모여지고 그 일대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이 집산되었던 경제의 중심지가 부강포구였다.

대전 청주 등 충청도 내륙도시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부강 포구를 청주대 경제학과 김신웅 교수는 부강 포구는 충청지역 경제발전의 모체와 시원이라고 평하였다.

부강 포구가 전성기였을 당시에는 초사흘과 보름에 한번 씩 지내는 배 고사떡만 얻어먹고도 인근의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며 이곳으로 배들이 싫고 온 해산물이 얼마나 많았던지 조기로 줄 부채질을 하고 미역으로는 행주를 삼았으며 명태로는 부지깽이를 했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이 부강 포구의 규모를 짐작할 수가 있다.

부강 포구가 있었던 현재의 부강 중학교 앞(신한 부강공장, 오뚜기식당 일대) 금강 변은 강폭이 넓고 수심이 깊어 삼백여 척의 배를 한꺼번에 정박할 수가 있었고 배를 매어 놓을 수 있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즐비하게 서있어 삼버들로 불리었다고 한다. 강경이나 군산 등지에서 보름이상 걸려 싣고 온 소금과 해산물을 등짐 장수들이 경기도 안성, 보은, 상주에 이르기까지 가지고 갔다. 그 당시 소금을 실어 나르던 소금 배는 1천 섬을 실을 수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황포 돛단배였고 황포 돛단배가 마지막으로 올라온 것은 60여 년 전까지였다고 한다. 금호1리에 사는 오태수(66) 씨의 말에 의하면 대청댐이 생기기 전에는 영동, 옥천에 50mm만 비가 내린다고 하기만 하면 이 들판이 다 잠기기 때문에 물 단속을 했다고 한다.

수많은 장사꾼들이 북적거리던 부용 포구도 검시나루도 사라진 강변을 지나 부용리로 가는 임시 다리를 건넌다. 강 위쪽 여울에는 골재 채취를 하는 중장비가 어슬렁거리고 부용봉(221m) 아래의 원부용마을은 한가롭게 펼쳐져 있다.

 

금강이 이곳에서 드디어 미호천(美湖川)과 합류한다.

드디어 미호천을 만나다

이중환은 그가 지은 택리지에서 마일령의 북쪽과 거대령의 서쪽 중간은 큰 평야가 전개되었는데 동서 두 산맥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들 가운데서 합쳐 작천이 된다. 작천은 진천 칠정(七亭)의 동남에서 근원 하여 금강 상류의 부용리(현재의 부용산 남쪽)에 들어간다.”고 하였고 김정호가 만든대동여지전도에 미호천은 동진(東津)이라고 표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진 또는 작천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한글학회에서 펴낸한국지명총람에서 보면 음성군 삼성면 마이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연기군 동면 합강리에 이르러 금강으로 들어감하고 기록되어 있으며 1918년에 발간되었던조선지리자료에는 미호천의 발원지는 충북 음성군 삼성면과 경기 안성의 이죽면이며 하구는 연기군 동면과 남면사이로 길이는 89.2km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동진 또는 작천이던 이름이 언제 미호천으로 바뀌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아도 이름을 짓는 어떤 사람이 충북 음성군 대소면의 미곡리와 삼호리에서 글자 한자씩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여지고 그 발원지는 음성군 음성읍 감우리 보현산 북쪽 계곡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옻샘이다.

 

아무래도 그 말은 맞을 것 같지 않지만 이 창벽은 100여 길의 큰 벼랑이 금강 변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에 절경은 절경이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 '팔도총론' 충청도 편에서 이곳 창벽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성 북쪽에 있는 공북루는 제법 웅장하고 물가에 임하여 경치가 좋다. 선조 때 서경 유근이 감사로 와서 이 누에 올랐다가 시 한 구절을 지었다.

소동파는 적벽강에 놀았으나 나는 창벽에 놀고, 유양은 남루에 올랐지만 나는 여기 북루에 올랐노라(蘇仙赤璧今蒼壁 庾亮南樓是北樓).

 

유근은 허균을 천거했던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3년 겨울에 명나라 신종神宗의 큰손자가 탄생하자 신종황제는 주지번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여 왕비에게 비단을 하사토록 하였다. 그때 온 조정이 들끓었다. 신종은 임진왜란 때 은인이었고, 중국 사신으로 오는 사람은 뛰어난 인물이 올 것이라 짐작한 조정에선 중국 사신을 맞이할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유근柳根을 원접사遠接使로 임명한 조정은 중국 사신과 직접 접촉하게 될 종사관을 구하려 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특히 유근은 항상 지방에만 돌아다녔기 때문에 어떤 인물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길이 막연하던 차 서울에 들어와 보니 허균의 문재文才가 당대 제일이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유근이 허균의 신분을 조사한 결과 허균은 관직에서 물러나와 한가로이 놀고 있는 몸이었지만 관직官職을 갖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글을 잘하여도 외교관이 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사신을 맞이할 적당한 인재는 발견되지 않고 고민 끝에 유근은 허균을 의흥위 부호군義興衛副護軍이라는 임시 군직軍職을 주어서 종사관으로 임명하도록 왕에게 말씀드려 허락을 얻게 되었다.

허균은 그 몇 년 뒤인 160812월에 공주목사로 임명받았다. 그것은 그해 여름, 가을, 겨울에 세 번씩 보는 벼슬아치의 법전 시험에서 모두 일등을 하여 그 뛰어난 성적을 인정받아 당상관으로 승진되었기 때문이었다. 허균의 나이 40이 되던 16092월 선조가 세상을 떠난 뒤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공주목사 재직 또한 길지 않았다.

서얼들이나 천민들과 가까이 지낸다는 이유로 허균은 또 다시 파직을 당하게 된다.

 

쓰레기를 버리면 삼대가 망하리라

버드나무 길을 건너가자 금강 빌라가 눈앞에 나타나고 슈퍼 이름마저도 금강슈퍼다. 어디건 금강이고 우리들은 그 금강을 따라가는 순례자들이다. 공산성을 오르기 위해 금강 빌라 뒷문으로 나서자마자 나타나는 게시판 이곳에 쓰레기를 버리는 자는 삼대가 망하리라눈 씻고 보아도 그 게시판 밑에는 껌 종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과태료 100만원에 처한다고 엄포를 놓아도 쓰레기가 산더미 같이 쌓이는데 3대가 망한다는 협박조의 말이면서 입증도 되지 않는 말에 순응하는 이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금강빌라에서 공산성으로 오르는 산길은 고적하고 눅눅하다. 강은 물살을 그리며 세차게 흘러가고 산길을 조금 올라가자 주인이 출타중인 굿당이 나타난다. 바위에서 솟아 나오는 샘물은 원도 없이 시원하며 물맛이 그만이다. 마당 한켠에 취나물 꽃이 피어있고 아무도 없는 집에는 자물쇠만 채워져 있다. 다시 걷는 산길에는 작디작은 산밤이 무수히 떨어져 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간다. 이 산을 오르면 공산성이라 생각했는데 산을 넘자 은계골짜기에 이르고 길은 두 갈래길이다.

우로가도 좌로 가도 공산성에 오르는 길이라면 이왕이면 큰길로 가자고 간 길이 결국은 탱자나무 울타리에 막혀서 뚫고 갈 수도 없다. 언제나 두 갈래 길에서 사람들은 망설이지만 결국은 선택할 수밖에 없고 그 다음 어려움을 겪거나 순탄한 길을 겪거나 한다. 나는 어제처럼 돌아가는 것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를 되뇌며 다시 산길을 오른다. 이렇게 땀을 흘려야 점심을 맛있게 먹을 수 있지. 은계골짜기에서 달착지근한 물감을 따먹었을 때 그 때가 좋았지. 공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조용하다. 아무도 오르지 않고 우리들만이 오르는 공산성을 성큼 올라서니 공주는 9월의 햇살 아래 느긋하게 졸고 있고, 우리가 광복루를 지나 임류각 앞에 이르렀을 때 그늘 드리운 느티나무는 빨갛고 노오란 단풍이 물고 있었다.

 

공주의 영역은 매우 넓어서 금강 남쪽과 북쪽에 걸쳐 있다. 사람들 사이에 전해오는 말에 첫째가 유성(儒城)이고, 둘째가 경천(敬天)이며, 셋째가 이인이고, 넷째가 유구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공주 일대의 살 만한 곳을 이르는 것이다.”

신정일의 <금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