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산꾼 강 이야기 : 청계천 두전째 이야기
(도덕산 개인산행기)
언제 : 계사년 해오름달 열사흘 해날
어딜 : 청계광장 - 삼일교 - 탑골공원 - 오간수교 - 광희문 - 낙산산성 - 혜화문
서울 4대문 안의 한복판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청계천이다.
우리가 대간길에서 만났던 금강이 한양으로 힘차게 역류한다는 이유 하나로 반역의 굴레를 뒤집어 써야 했지만
이 청계천은 동쪽으로 역수하는 물기운인데도 '한 나라 도읍지의 명당수明堂水가 된다'고 옛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청계천은 서울시내의 북악과 인왕, 남산 등 여러 골짜기의 모든 물이 모여져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 간다
태종 때부터 치수 사업이 시작되어 세종때 마무리 되어, '개천을 끼끗이 치웠다'는 뜻의 '청개천(淸開川)"이라는 글귀가 그후 청계천(淸溪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청계천 발원지 첫 구간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한 청계광장 상징물
청계광장
청계천 복원사업이 이루어지던 2005년 3월 서울특별시에서 지명위원회를 열어 확정한 명칭으로, 청계천의 시작 지점인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 광장을 가리키며,
청계천으로 진입하는 공간으로서 삼색 조명이 어우러진 촛불 분수와 4m 아래로 떨어지는 2단 폭포가 설치되어 있다.
2단 폭포 양옆에는 8도(道)를 상징하는 석재로 팔석담(八石潭)을 조성하였는데, 밤이면 불빛과 물이 어우러져 멋진 경관을 빚어내고 있다.
또한 청계천 전 구간을 100분의 1로 축소한 미니어처가 있으며, 4월부터 11월까지 주말마다 '청계천 문화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청계천 광장에서 출발하기 전 인증사진은 남겨야지^^
처음으로 청계천으로 내려와 청계광장 방향으로
첫 다리 모전교를 시작으로 빌딩 숲사이로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흐르고 있는 청계천과 팔석담
팔석담 아래에 있는 동전 던지기 시설을 만나고, 오늘 나온 어린이들이 동전던지기에 여념이 없다.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올라와서 본 모전교
모전교(무교동사거리) - 종로구 서린동∼중구 무교동
조선시대 이 다리 모퉁이에 토산 과일을 파는 가게인 과전(果廛)(모전(毛廛)이라고도 함)이 있었으므로 모전교(毛廛橋)・모전교(毛前橋)・모교(毛橋)・모전다리라고 하였으며,
달리 모퉁이 가게 다리라 혹은 한자명으로 우전(隅廛) 다리라고도 하였다.
다시 내려와 분수가 얼어 있는 얼음 분수를 만나고
광통교를 만나고
광통교廣通橋 - 종로구 서린동∼중구 다동
큰 다리라는 의미로, 청계천에서 가장 넓은 다리를 복원한 보도교
광통교는 육조거리-운종가-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도성 안 중심 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 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옛 모습과 새로 다듬어진 현재와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광통교
유일하게 옛 모습이 보존된 광통교도 원래 위치에서 150m 상류로 이전됐다
광통교에 놓여진 석물인 신장석과 우석(隅石) 등에 새겨진 세련되고 정교한 조각은 당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다.
사연이 있는 다리인 만큼 교각의 그림도 예술이다
처음, 광통교가 돌다리고 아니고 흙다리였을 때. 전체적 조선의 상황은 도성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겨온 어수선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상황 속에서는 사람들의 운행을 ‘편하게’ 해줄 다리의 존재보다는 당장 궁을 지어야 했을 것이고, 임금이나 신하들이 지낼 공간이 더 먼저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조선 초, 조정의 관심의 범주에 들지 못했던 청계천의 ‘다리’는 장마철만 되면 사람들에게 골머리를 앓게 하는 존재였다. 홍수 시만 되면 많은 익사자가 발생했으니....
다리 상부의 모습
조선이 건국된 이후, 태종 10년. 또다시 흙다리였던 청계천이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했다. 이때 드디어 왕은 광통교를 돌다리로 만들 것을 명하게 된다.
교각의 모습이 옛 모습 그대로 이다
아시다시피, 태종은 조선의 3대왕.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되었다. 그런 태종은 하필, 주변의 다른 석재들이 아닌 조선의 건국 시조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묘소의 석물을 뜯어 다리 부재로 사용한다.
생전에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를 총애하였던 것에 대한 원한으로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이 정교한 석물이 오늘날 광통교에 사용된 신장석(神將石) 등인데, 조선 당대 최고 수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나라의 왕의 계비의 묘의 석물이, 도성의 모든 사람이 밟고 다니는 다리의 부재가 된 것이다.
청계천의 광통교는 이렇게, 시작부터 왕실 권력 다툼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광통교의 유래를 알고 나서 광통교를 밟는다면, 광통교를 지나다닌다면 이제까지 평범하게 지나치던 돌다리로만 광통교를 바라볼 수는 없을 것이다.
광통교를 이루고 있는 그 돌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아름다운 문양을 찾아 보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출처 서울지명사전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culture.seoul.go.kr/sggDic/sggDic.do)
한이 서린다리다. 신덕왕후가 낳은 형제들 때문에 왕좌에 오르지 못할 뻔한 태종은 뭇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고통을 받으라는 뜻이었다.
"소통"이 현재의 우리 사회의 화두라면,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용서와 화합의 묘수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밤이면 축제를 알리는 알림판도 만나고 - 청계천 디지털 캠버스
광교에 설치된 5m 높이의 전광판인 ‘디지털 미디어월’에서는 세계 금융시장 정보가 실시간으로 흘러 나온다고 한다.
광통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현재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편리를 위해 만든 광교를 만난다
광교 - 다동 음식문화 특화거리 - 종로구 관철동∼중구 삼각동
광통교가 있던 자리에 새로 놓인 차도교이다
관수교 아래에 설치된 전동식 스크린에서는 독립영화가 상영되고 있다고 한다.
안내판도 만나고
조선시대 기록 문화의 보고인 벽에 설치된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를 만난다
정조반차도正祖大王華城幸行班次圖
세계 최대 규모의 도자벽화로 선보인 정조반차도는 광교와 삼일교 사이에 있는 장통교를 중심으로 좌안 옹벽에 설치됐으며,
길이 186m, 높이 2.4m의 작품이 병풍처럼 청계천을 휘감고 있다.
반차도는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1795년 윤 2월에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위해 모친 혜경궁홍씨를 모시고 화성(수원)을 다녀와서 그 의전행렬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떠나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모습을 판각화로 그렸으며 1천779명의 인원과 779필의 말이 표현되어 있다.
김홍도 등 당대의 일류 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왕조의 위엄과 질서를 장엄하게 표현하면서도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묘사가 돋보이고 있다.
장통교까지 계속 이어지는 정조 능행 반차도
장통교長通橋 - 종로구 관철동∼중구 장교동
숙종이 장희빈을 처음 만났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장통교는 청계천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이 일대는 일찍부터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중앙과 지방관청의 연락사무를 맡아보던 경주인(京主人)들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개화파의 선각자적 역할을 수행한 유대치가 장통방 지금의 보신각 뒤편에 살았다.
장통교의 경우 당초 그 자리에 삼일로가 자리해 ‘우리삼일교’로 상정됐으나, 과거 조선시대 5부 52방 가운데 하나인 장통방長通坊으로 불렸던 역사성을 고려해 ‘장통교’로 정해졌다.
반차도는 계속 이어진다. 그림의 장면이 바뀔 때 마다
아래에는 그림 설명을 자세하게 적어 놓아 이해를 돕고 있다. (10장면)
왕실 기록화이자 한 폭의 커다란 풍속화를 연상시키는 이 반차도는 당시 행차의 격식과 복식, 의상, 악대구성 등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자료 : 네이버 지식
이제 삼일교가 보이고
삼일 운동의 첫 깃발을 올렸던 탐골 공원을 꼭 들려야 할 것 같아 탑골 공원으로 오르고
탑골 공원의 삼일문 - 오랫만에 보는 한글 현판이다
옆에 있는 탑골 안내판
안에 있는 탑골 공원의 내용은 따로 올립니다
탑골 공원이 있는 종로2가 사거리는 육의전六矣纏 거리였다고 한다.
장통교 주위인 이 곳이 도성 안 상업의 중심지가 되어 시전상인들이 모여 살았다고 하니, 최고의 상권이었을 것이다.
삼일교와 관계있는 삼일 빌딩 앞에 있는 건물의 해시계(?)
마천루 신화를 만든 삼일빌딩, 삼일운동 정신에 맞춰 31층으로 지었다는데...
다시 내려와 본 삼일교와 삼일 빌딩
삼일교三一橋 - 인사동 - 종로구 관수동∼중구 수표동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로 이름을 삼일로라 하였고 다리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다리 인근의 인사동과 명동성당 등을 연계한 근대 건축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수표교를 향해 계속 청계천은 흐르고 있고
수표교를 만난다
수표교 - 종로구 관수동∼중구 입정동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이 수표는 세종 때 발명된 하천 수위계의 전통을 이은 유일한 유물이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모양을 가진 점 등에서 매우 귀중한 과학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수표교를 지나 수표를 바라보며 물의 높이를 열심히 보고 있던 관수교가 멀리 보이고
숙종과 장희빈의 첫 만남이 이루진 곳이지만, 복개 이후 청계천 오염의 주범이란 불명예를 입기도 했다.
조선 태종 때 다리 주변에 소, 말을 거래하는 우마전을 설치하고 배설물을 개천으로 흘려보냈기 때문이다.
수표교는 1773년 무렵 연암 박지원이 친구들과 통행금지를 무시하고 깊은 밤 달빛을 즐기던 장소라고 한다.
관수교
관수교 - 종로구 세운상가∼중구 대림상가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던 곳에서 유래한 차도
청계천을 걸으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수문 안내문
수문이 계속 이어진다
전 세계를 향해 용솟움치고 있는 듯한 디지털 상징 조명탑이 보이는 세운교가 앞을 인도한다
다시 관수교도 뒤 돌아 보고
세운교와 세운상가
세운교 - 세운상가 - 종로구 예지동∼중구 주교동
효경교(새경다리ㆍ세운교) 다리 이름은 세운상가에서 딴 것이다. 세운교가 세워진 장소는 조선시대 효경교(孝經橋)가 있던 자리이다. 이 근처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맹교(盲橋)ㆍ소경다리라고도 하였는데, 세운상가 옆 아세아전자상가 동쪽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꽤 넓은 세운교 아래 부분
세운교(종로구 세운상가~중구 대림상가)는 지명위원회에서 많은 논란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예로부터 소경이 많이 모여 살아 ‘소경교’로 불리다 ‘효경교’로 이름이 바뀌었던 이 곳은 인터넷 투표 결과 세운교로 결정됐다.
바로 베오게 다리가 나온다.
배오개다리 - 종로구 예지동∼중구 주교동,
종로4가 네거리에 배오개(梨峴)라는 고개가 있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배오개길과 연결되는 차도교
서에서 동으로 역류하고 있는 청계천을 돌다리에서 담아 본다. 그런데 건천인 청계천은 왜 마르지 않지?
방산시장과 새벽다리
새벽다리 - 종로구 종로5가∼중구 방산동을 이어주는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가 담겨있는 보도교
종로구 예지동과 중구 주교동을 잇는 다리는 방산시장과 광장시장 등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를 담아 ‘새벽다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청계천을 벗 삼아 노닐고 있는 새 한마리 담아보고
마전교 앞에서 다정한 부부의 모습을 담아보고
마전교이다
마전교 - 종로구 종로5가∼중구 방산동
다리 부근에 우마를 사고 팔던 마전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차도교로 현재 청계5가 방산시장 앞으로 추정된다.
새벽다리와 마전교사이에 철세들의 모습이 한가롭다
처음으로 잉어도 한마리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건물이라는 설이 있는 평화시장과 나래교의 만남
나래교 - 종로구 대학천남길∼중구 을지로6가를 이어주는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으로 만드어진 보도교
동대문시장 앞에 놓일 다리 이름은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것처럼 세계패션 1번지로 비상하라는 뜻으로 ‘나래교’로 결정됐다.
전태일의 산실인 버들다리를 만난다
전태일 다리(버들다리) - 종로구 종로6가∼중구 을지로6가를 이어주는,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와버들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 차도교
이제 전태일과 다리를 만나기 위해 위로 올라오고 - 도보에 이름과 희망을 적은 글들이 세겨져 있다.
전태일 동상과 평화시장
1970년대 이 곳은 봉재공장이 들어서 있던 곳으로, 성장과 생산 일변도의 정책이 낳은 열악한 작업 환경이 결국
전태일이라는 열사를 만든 것이다.
그가 남기고 간 이 후, 지금도 근로자의 환경은 진행형이다. 오히려 법의 태두리안에서 더 열악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스스로를 태워 우리에게 남기고자 했던 전태일 정신이, 전혀 나아지지 않은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어렵게 다리 이름을 병행 표기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전태일 다리 명명식(자료사진) 2012년 11월1일
오늘의 마지막 청계천 다리인 오간수교를 향해
오간수교
오간수교(청계6가) - 종로구 창신동∼중구 흥인동
오간수문: 오간수문은 청계천 물이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성벽 아래에 설치한 수문 (水門)으로 이것이 다섯개 있었으므로 오간수문이라고 하였다.
초보산꾼 강이야기 첫번째 홍제천에서 만난 홍지문의 오간수문도 같은 역활을 한다
오간수문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청계천이야기 세번째 이야기에서 만나기로하고 광희문도 만나고 점심도 해결하고...
전에 없던 새로 생긴 두타의 전경
오늘의 두번째 이야기인 서울 성곽 여행을 위한 식후경
막걸리 한잔으로 청계천여행을 마치고
서울 성곽 여행을 계속 이어간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물이다.
물이 없는 곳에 절대 마을이 들어 설 수가 없는 이유이다.
하물며 한양에 수도를 정한 후 조선시대 부터 지금까지 청계천이 품어 왔던 역사적 사실들이
다리 하나 하나에 묻어 나고 있음을 우리가 잊고 살아 왔을 뿐이다.
서울 4대문 안을 흐르고 있는 청계천이기에 마음 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녀올 수 있는 곳입니다.
청계천에 섰을 때 문득이라도, 이 글이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아십니까? 건천인 청계천을 사사사철 물이 흐르게 하는 비밀?
전가세는 얼마나 들어가고? 어디서 물은 퍼오고?
수자원 공사가 서울시에 한강물을 쓰니까 물세를 내라고 한다는데? 내야하나 말아야 하나?
정답은 초보산꾼 청계천 이야기 세번째에 만납니다.
감사합니다
초보산꾼 도 덕 산
'강 그리고 바다 > 강.하천 걷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보산꾼 강이야기 : 청계천 - 청계천 소개 (0) | 2016.03.17 |
---|---|
초보산꾼 강 이야기 : 둔주봉과 금강이 빚어낸 한반도 (0) | 2013.06.17 |
초보산꾼 강 이야기 : 청계천 세번째 이야기 - 그리고 응봉산 해넘이 (0) | 2013.03.03 |
초보산꾼 강 이야기 - 청계천 첫번째 이야기 - 발원지 찾아가는 서울 성곽길 역사이야기 (0) | 2013.01.07 |
초보산꾼 강 이야기 - 홍제천 : 수난의 역사를 품다 (0) | 2012.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