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에 내외 선유동을 따라 걷는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 선생이 금강산 이남의 산수 중 가장 빼어난 경치를 두고 문경과 괴산 일대에 펼쳐진 내와 선유동과 화양동 계곡을 들었습니다.
문경시 가은읍의 가은 선유동의 아홉 경치와 대야산 자락의 용추, 그리고 괴산군 송면의 괴산 선유동의 아홉경치와 송시열 선생의 자취가 남아 있는 화양동 구곡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 내외선유동을 따라 걷는 여정이 7월 21일(일요일>일에 실시됩니다.
어딜 보나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경관도 경관이지만 푸르고 맑게 흐르는 계곡의 냇물이 아름다운 곳이 바로 내외선유동입니다.
그 계곡을 걸으며 한 여름의 하루를 보내실 분은 참여 바랍니다.
이번 여정은 강가를 거닐게 될 것이므로 오래된 트레킹화(물에 젖어도 될 신발)을 준비하면 훨씬 마음과 몸이 편안한 기행이 될 것입니다.
"가은 선유동과 용추 계곡은 바라만 보아도 서늘해지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칠성대 서쪽으로 백두대간을 넘으면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에 있는 외선유동이다. 이곳 송면리는 조선 선조 때 붕당이 생길 것을 예언했던 동고 이준경이 장차 일어날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자손들의 피난처로 정했다고 한다. 선유동 입구에는 바위절벽에 ‘선유동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위에는 천연적으로 문이 뚫려 있고 선유구곡이 펼쳐져 있다.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화양동구곡에서 동쪽으로 14킬로미터 지점 화양천 상류에 있는 선유동구곡은 옛 신라의 고운 최치원이 이곳을 소요하면서 선유동이라는 명칭을 남긴 데서 유래된 곳으로 그 이후 퇴계 이황이 칠송정에 있는 함평 이씨 댁을 찾아왔다가 이곳의 비경에 사로잡혀 아홉 달을 돌아다닌 뒤 아홉 개의 이름을 지어 글씨를 새겼다고 한다.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朱熹)는 성리학을 탐구하기에는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이 이상적인 장소라고 보았다. 그는 그러한 형세를 갖춘 계곡을 중국 남부에서 발견한 뒤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고 이름을 지은 뒤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물의 구비마다 그 모양새에 합당한 이름을 붙인 뒤 성리학의 경지에 비유했다.
일반적으로 문경의 소금강이라 부르는 선유동구곡은 30미터 높이의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는 ‘선유동문’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기암절벽으로 절경을 이룬 경천벽, 옛날에 암벽 위에 청학이 살았다는 학소대, 계류변에 있는 바위 위 중앙이 절구통같이 생겼다는 연단로, 와룡이 물을 머금었다 내뿜는 듯이 급류를 형성하여 폭포를 이룬 와룡폭, 방석같이 커다란 모양의 난가대, 바둑판의 형상을 한 커다란 암반인 기국암, 거북같이 생긴 구암, 두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뒤에는 큰 바위가 가로 놓여 그 사이에 석굴이 있는 은선암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위의 수석층암과 노송이 어우러져 세속과는 거리가 먼 이상향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데 그중 난가대와 기국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명종 때의 일이다. 한 나무꾼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구경을 했다. 그러자 한 노인이 “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이니 돌아가시오.” 했다.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옆에 세워둔 도끼를 찾았는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 없어진 뒤였다.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낯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의 5대 후손이었다. 그곳에 간 날을 헤아려보니 그가 바둑 구경을 한 세월이 어느 사이에 150년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도끼 자루가 썩은 곳을 ‘난가대’라고 불렀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을 ‘기국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송시열과 화양구곡
선유동에서 송면리를 지나 화양천을 따라 내려가면 화양구곡에 이른다. 『택리지』에는 화양동계곡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화양동華陽洞(충북 괴산군 청천면)은 파곶葩串 아래에 있는데, 파곶 물이 이곳에 와서 더욱 커지고 돌도 또한 더욱 기이한 것이 많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모방하여 여기에 집을 지었다. 또 주자朱子가 대의를 회복恢復하던 옛일을 모방하여, 고을(동중洞中)에서 명나라 명종明宗과 신종황제를 제사지내다가 후일에 사당을 세운 뒤 만동묘萬東廟라 하였다.
일찍이 송시열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푸른 물의 야단스러움이 성난 듯 하고,
푸른 산의 말없음은 찡그리고 있는 것 같다.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계곡은 원래 청주군(淸州郡) 청천면의 지역으로서, 황양목(黃楊木:희양목)이 많으므로 황양동(黃楊洞)이라 불렸다. 그러나 효종(孝宗) 때의 정치가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현천리(玄川里)를 병합하여 화양리라 해서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되었다. 화양구곡과 만동묘 그리고 화양동서원이 있는 이곳 화양동계곡은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에 들어앉아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화양동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했다. 입구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1곡부터 9곡이 펼쳐진다.
화양천 건너편에 높이 치솟은 바위벽으로 큰 바위가 공중에 높이 솟아 마치 하늘을 떠받친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천벽 아래쪽에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 쓴 송시열의 글씨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다리를 넘어서면 화양구곡 중의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이다. 계곡에서 빠르게 내려온 맑은 물이 잠시 고여 숨을 가다듬은 뒤 내려간다는 이곳 운영담의 바위 위에는 주자(朱子)의 시인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의 뜻을 따서 ‘운영담’이라는 글씨 석 자가 새겨져 있다.
제3곡인 읍궁암(泣弓岩)은 계곡을 향해 퍼져 누운 너부죽한 바위인데 그 바위 위에서 송시열은 돌아간 효종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에 엎드려 곡을 했다고 한다. ‘순임금이 죽은 후 신하가 칼과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읍궁암을 지나면 하마비를 만나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대기질을 당했다는 하마비 우측에 그 이름 높았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은 1695년(숙종21)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온 나라에 걸쳐 44개 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의 서원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서원이 된 화양동 서원은 건립 당시 소론 측의 반대를 받아 중단될 뻔하기도 했다. 노론 측의 강력한 요구와 임금의 특별배려로 설립된 이 서원은 1696년 대사성 이여가 사액(賜額: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扁額)을 내리던 일)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사액을 받았고 영조 때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면서 국가의 물질적 지원은 물론이고 유생들이 땅을 기증하여 강원도를 비롯한 삼남 일대에 토지가 산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서원은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갔다. 제수전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하여 때로는 관령(官令)을 능가할 정도였다. ‘서원의 제수 비용이 필요하니 어느 날까지 얼마를 봉납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수령들에 대해서는 통문을 보내어 축출을 했고 복주호(福酒戶)와 복주촌(福酒村)을 운영하며 양민들에게 피역(避役)을 시켰다. 또 그 대가로 돈을 거두어들이며 이를 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사형을 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폐습이 심화되자 1858년 영의정 김좌근이 복주촌 폐지를 요청했고 1871년에는 노론사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원이 철폐되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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