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의 땅이자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열하를 가다.
추천 0 2013.07.04. 21:36 http://cafe.daum.net/sankang/8Rc3/3110
몇 년 전, 고조선 영역과 박지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해관, 그리고 동이족의 조상인 치우천황의 사당이 남아 있는 탁록현을 답사했습니다. 그 답사 이후 이덕일, 김병기 선생과 함께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를 발간했고, 다시 몇 년이 지나 다시 그곳으로 갑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현장인 열하와 함께 답사할 고조선의 옛 땅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아래의 글은 책에 실린 기행문의 일부입니다.
천하 제일문인 산해관에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도착한 산해관, 입장료가 만만치 않은 4십원이라고 한다. 그래도 들어가야지 하는데, 전형적인 중국의 젊은 사람이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서 아주 싼 값인 10원에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골목골목을 따라갔는데 도착하자마자 이렇게 황당할 수가, 산해관 후문 앞 슈퍼에서 바라보면 산해관 정문을 볼 수가 있는데, 정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렇게 바라보는 값이 10원이라는 얘기였다. 우리가 난감해 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그 안내원의 얼굴도 겸연쩍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화를 낼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안내원도 서운하지 않을 금액을 주고 제 값의 입장료를 지불하고서 산해관을 들어갔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산해관 주변의 경관을 제대로는 볼 수 없었지만 산해관 건물에서 바라본 산해관 일대를 바라보며 조선 사신들이 이곳의 위용에 놀랐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박지원은 이곳 산해관에 도착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서는 중국의 큼을 모를 것이요, 산해관을 보지 못하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요, 관 밖의 장대를 보지 않고는 장수의 위엄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산해관을 1리쯤 못 미쳐 동향으로 모난 성 하나가 있다. 높이는 여남은 길, 둘레는 수백 보요, 한 편이 모두 칠첩(七堞)으로 되었고, 첩 밑에는 큰 구멍이 뚫려서 사람 수십 명을 감출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구멍이 스물 네 개이고, 성 아래로 역시 구멍 네 개를 뚫어서 병장기를 간직하고, 그 밑으로 굴을 파서 장성과 서로 통하게 하였다. 역관들은 모두 한(漢)이 쌓은 것이라 하나 그릇된 말이다. 혹은 이를 ‘오왕대(吳王臺)’라고도 한다. 오삼계(吳三桂)가 산해관을 지킬 때에 이 굴 속으로 행군하여 갑자기 이대에 올라 포성을 내니, 관 안에 있던 수만 병이 일시에 고함을 질러서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관 밖의 여러 곳 돈대에 주둔했던 군대도 모두 이에 호응하여 삽시간에 호령이 천리에 퍼졌다. 일행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 첩 위에 올라서서 눈을 사방으로 달려보니, 장성은 북으로 뻗고 창해(滄海)는 남에 흐르고, 동으로는 큰 벌판을 다다르고 서로는 관 속을 엿보게 되었으니, 이 대만큼 조망(眺望)이 좋은 곳은 다시없을 것이다. 관 속 수만 호의 거리와 누대(樓臺)가 역력히 마치 손금을 보는 듯 하여 조금도 가리어진 곳이 없고, 바다 위 한 봉우리가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게 솟아 있는 것은 곧 창려현(昌黎縣) 문필봉(文筆峯)이다.
박지원은 산해관의 돈대에 서서 이곳저곳을 바라보다가 내려오려 하였지만 아무도 먼저 내리려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과, 벽돌 쌓은 층계들이 하도 가팔라서 내려다보기만 하여도 다리가 떨려 낭패를 당할 지경까지 이르러 저절로 어지럼증이 생겼는데, 그 허물은 스스로의 눈에 있었노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 특유의 비유법으로 “벼슬살이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바야흐로 위로 자꾸만 올라갈 때엔 일계·반급이라도 남에게 뒤떨어질까 보아서 혹은 남을 밀어젖히고 앞을 다투다가 마침내 몸이 높은 곳에 이르매 그제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니 외롭고 위태로워서 앞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길이 없고 뒤로는 천인절벽이어서 다시 올라갈 의욕마저 끊어졌을 뿐더러 내려오려고 해도 잘되지 않는 법이니, 이는 고금이 없이 모두들 그러한 이가 많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맺은 뒤 산해관을 설명한다..
“산해관은 옛날의 유관(楡關)인데, 왕응린(王應麟)의 <지리통석(地理通釋)>에 ‘우(虞)의 하양(하양), 조(趙)의 상당(上堂), 위(魏)의 안읍(安邑), 연(燕)의 유관, 오(吳)의 서릉(西陵), 촉(蜀)의 한락(漢樂)은 모두 그 지세로 보아서도 꼭 응거해야 하고 그 성으로 보더라도 꼭 지켜야 한다.’하였다. 명(明)의 홍무(洪武) 17년에 대장군 서달(徐達)이 유관을 이곳에 옮겨 다섯 겹의 성을 쌓고 이름을 ‘산해관’이라 하였다. 태행산(太行山)이 북으로 달음질하여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었는데, 순(舜)이 열두 산을 봉(封)할 때 의무려산을 유주(幽州)의 진산으로 삼았다. 그 산이 중국의 동북을 가로막아 중국과 외국의 경계가 되었으며, 관에 이르러서는 크게 질리어서 평지가 되어 앞으로 요동 벌을 바라보고, 오른편으로는 창해를 낀 듯하니, 이는 우공(禹貢)의 ‘오른편으로 갈석(碣石)을 끼었다.’는 것이 곧 이를 두고 일컬음이다. 그리고 장성이 의무려산을 따라 굼틀굼틀 굽이쳐 내려와 각산사(角山寺)에 이르며, 봉우리마다 돈대가 있고 평지에 들어와서 관을 둔 것이다. 장성을 따라 다시 15리를 가서 남으로 바다에 들어서 쇠를 녹여 터를 닦아 성을 쌓고는 그 위에 삼첨(三簷) 큰 다락을 세워서 ‘망해정(望海亭)’이라 하니, 이는 모두 서중산(徐中山)이 쌓은 것이다. 이 관의 첫째 관은 옹성(甕城)이어서 다락이 없고, 옹성의 남·북·동을 뚫어서 문을 내고 쇠로 만든 문 위의 홍예(虹霓) 이마에는 ‘위진화이(威振華夷)’라 새겼고, 둘째 관에는 네 층 적루(敵樓)로 되었는데 흥예 이마에 ‘산해관’이라 새겼고, 셋째 관은 삼첨 높은 다락에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삼사(三使)가 모두 문무로 반(班)을 나누어 심양에 들어왔을 때와 같이 하다. 세관(稅官)과 수비(守備)들이 관 안의 익랑(翼廊)에 앉아서 사람과 말을 점고하되 전에 봉성의 청단(淸單)에 준한다. 대체 중국의 상인과 길손은 모두 성명과 사는 곳과 물화(物貨)의 이름과 수량을 등록하여 간사한 놈을 적발하며 거짓을 막음이 매우 엄하다. 수비들은 모두 만인인데, 붉은 일산과 파초선(芭蕉扇)을 가지고 앞에 병정 백여 명이 칼을 차고 늘어섰다.
박지원이 그 당시 보았던 세관과 수비들이 사라진 자리를 입장료를 파는 사람들과 입장권을 받는 사람들 그리고 관광객들의 주변에서 무엇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이 어슬렁거리는 중국인들로 대체되어 있을 뿐이다.,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갈석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도시인 창려현의 선태로仙台路를 따라가자 인공호수인 갈석호가碣陽湖가 나타나고, 우측으로 중국에서 보기 드문 공동묘지를 바라보는 사이 갈석산 입구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리자 「천고신악 갈석산千古神岳 碣石山」이라는 표지판이 보이고, 등산로 입구에 기록된 시 한편이 갈석산의 신비를 부추긴다.
神岳碣石 신악이라는 갈석산은 觀海勝地 바다를 바라보는 뛰어난 경승지라 九帝登臨 아홉 명의 황제가 올랐다네 千古之謎何解? 천고의 수수께끼를 누가 풀랴?
어디를 보아도 붉은 빛이 감도는 바위산인 갈석산 정상을 바라보자 봉수대 혹은 돈대 모양의 바위가 눈에 띄고 정상에는 통신대의 송신탑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할 것 같다.
천천히 올라가자 수암사水岩寺라는 절이 나타나고 절 마당에서 바라보는 갈석산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갈석산 아래 뾰족하게 솟아오른 봉우리에 잘 지어진 정자 하나, 내가 날아오를 수 있는 새라면 날아가서 앉고 싶지만 바라보면 정자는 하늘만큼 멀고 마음만 날아 갈 뿐이다.
수암사, 생각보다 정갈하고 아늑하다. 천왕문에 들어서자 건물이 꽉 들어차게 네 분의 사천왕상이 이국적인 풍모를 보이며 앉아 있고, 향로 뒤에 본전 건물 너머 갈석산이 한눈에 들어 온다.
먼저 간 이덕일 선생과 김병기 선생의 그림자라도 남아 있을세라 뒤따라가지만 어느새 갔는지 불러도 대답이 없다. 권태균 기자와 함께 갈석산 오르는 초입에 들어서자 돌로 만든 종 석고가 산속에 홀로 앉아 있다. 어둔 밤에 이 길을 걸을 때 석고石鼓에서 울리는 낭랑한 종소리 들린다면 얼마나 좋으랴 만 지금은 대낮이고, 그리고 돌로 만든 종이 어떻게 소리를 내겠는가? 부질없는 생각을 지우고, 천천히 산을 오르면서 <소창청기 小窓淸記> 중의 한편을 떠올린다.
“아름다운 경치와 유람을 논하는 사람은 반드시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신체적 조건을 우선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이렇다. 그 사람의 정취情趣가 아름다운 경치와 한 덩어리가 되어 산을 오르고 물을 건널 때 스스로 정신이 왕성해짐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잘 달릴 수 있는 건각健脚을 가졌더라도 갑자기 쉬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산에 오르거나 길을 걷기에 가장 알맞은 체격을 타고 났는지 모른다. 키가 크지도 작지도 않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도 않으니, 체중 때문에 걸어가면서 느끼는 부담이 적고, 집만 나서면 집을 잊어버리고, 경이로운 세상에 마음을 홀딱 빼앗겨 헤어나지를 못하니 이 얼마나 산천유람을 위해 타고난 육체이고 자유로운 영혼인가? 하고 느끼는 적도 있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이 힘겹게 보낸 세월을 어느 누가 보상해준단 말인가?
이렇게 척박해서 먼지만 풀풀 날리는 산이고, 그래서 가끔가다 생기를 잃어가는 소나무만 듬성듬성 서 있는 이 산을 오르며 반도의 조그마한 땅에서 신선처럼, 아니 먼지처럼 날아온 나는 이 산의 의미나 역사를 떠올리기보다 아직도 내 살아온 날의 아쉬움을 생각하며 천천히 오르기 시작한다.
길은 갈림길에 이르고 “노란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수가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라고 노래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이 생각난다.
아무래도 위로 가는 길도 자신이 없고, 아랫길도 의심스러워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요란스레 떠들며 한 무리의 중국인이 산에서 내려왔다. 종이에 정상頂上을 어디로 가는가, 적어 내밀자 위쪽으로 난 길을 손짓해준다. 산을 오르는 마음은 다 같지만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해서 필담을 나누어서야 통하는 이렇게도 어설픈 관계가 어디 이 산에서 만 있으랴만,
우우 소나무 잎 스치는 소리에 오르던 발길을 멈추고 그냥 돌계단에 앉는다. 소나무 잎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이 마치 잘 닦아 빛나는 푸른 구슬과도 같아 보이고, 수암사 너머 올망졸망한 집들을 지나 펼쳐진 갈석호는 한 폭의 그림을 펼쳐 놓은듯 하다.
다시 산을 오르자 바로 위쪽에서 쉬고 있던 두 사람이 일어나는데, 사십대 후반의 여자는 오이,와 감자등 생필품이 가득 담긴 대 광주리를 짊어지고 삼십대 후반의 건장한 남자는 그 뒤를 따라가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오르고 있다.
그래서 ‘이 산 정상 어느 부근에서 좌판을 펼치고 팔기 위해 짐을 짊어지고 오르는 아주머니를 마음씨 좋은 젊은 남자가 말동무해주며 오르는 것이겠거니‘ 지레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그 남자는 갈석산 정상에서 근무를 하는 사람이고, 그 여자는 그 남자에게 50원의 돈을 받고 짐을 올려주는 중이었다. 맨 몸으로 걸어 오르기도 힘든 이 바위산을 겨우 50원을 받고 물건을 져 나르는 것이 가슴이 아픈데 얘기를 나누다보니 어떤 때는 10원에서20원을 받고도 짐을 운반하기도 한다고 한다.
먹고 살기가 힘든 이곳의 실정에서 그렇게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것도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중의 보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창려 일대가 환히 내려다뵈는 지점의 바위벽에 해탈문解脫門이라고 쓰여 져 있다.
그 해탈문을 힘겹게 올라가는 그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며 이렇게 지속되는 삶은 도대체 무엇이고, 해탈은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 본다. 이 문을 넘어서면 번뇌煩惱와 속박束縛에서 벗어나 속세간俗世間의 근심이 없는 편안한 심경心境에 이르게 될까? 그리하여 미망迷妄에서부터 해방이 되고 이 문을 넘어서면 선정禪定으로 공空. 무상無想. 무원無願의 세 가지를 얻게 되어 마침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부처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도 아직도 나는 자신이 없다 그래, 마음속에 부처도 있고 마음속에 악마도 있을 것이다.
해탈문을 지나 내려다보자 멀리 바다가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고, 바위벽에는 흡사 개의 형상을 한 호랑이가 그려져 있으며 머리 부근에는 임금 왕王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망해장랑望海長廊과 관해정觀海亭을 지나 팔선대八仙臺 까지 올라가면 일반인은 오를 길이 없다. 갈석산(695m) 정상은 선태정仙台頂이라고 하며 지금 나는 갈석산의 팔선대에 서있다.
이 갈석산은 열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서 바다의 경치와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고 갈석산의 10경이 이름이 있다고 하는데, 마이산이나 비슷하게 암산巖山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나마 현재는 나무들이 많지 않아 옛날의 빼어난 경치를 즐길 수는 없을 듯싶다. 산에 오르는 것이 이상한 것이라서 힘겹게 올라온 산이지만 막상 올라서서 바라보면 오르면서 느낀 고단함이나 견디어낸 시간들이 까마득하게 잊혀지고 만다. 바람 부는 정상에서 아래를 굽어보면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생애가 가여워지고, 성냥갑처럼 자그마하게 보이는 세상자체도 불현듯 우스워진다. 문득 ‘외롭다‘ 는 생각과 함께 아득하게 보이는 마을과 사람들과, 나 자신마저도 어쩌면 그렇게 한없이 작아지고 안타까운지,
멀리 용솟음치며 달려 올 듯 한 바다와 드넓게 펼쳐진 들녘을 내려다보고 있자, <지비록知非錄>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일찍이 높은 산에 올라 성시城市를 내려다보았다. 성이 개미집처럼 보이니, 모르겠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높은 데에서 내려다보니 세상사는 것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이 산이 성의 높이보다 과연 얼마나 더 높겠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보이는데 진정으로 진짜 신선이 하늘 위에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본다면, 사람 사는 집이 마치 개미집같이 보이고 사람 역시 개미나 별반 달리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말을 했던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인 니체였는데,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제 2부 ‘독서와 저술‘에서 산에 올라 느낀 심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대들은 높은 곳을 갈망할 때 위를 쳐다본다. 그러나 나는 높은 곳에 있으므로 아래를 굽어본다. 그대들 가운데 웃으며 높이 오를 자가 누구인가? 가장 높은 산에 오른 자는 온갖 비극과 비참한 현실을 비웃는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이 갈석산과 이 산에 올랐던 사람들의 면면을 생각해보니, 이 산의 위상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 것인지를 알 것도 같다.
<고문관지古文觀止>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높다고 해서 다 산이 아니니, 신선이 있어야 이름이 날 수 있고, 깊다고 해서 다 물이 아니니, 용이 있어야 영험해질 수 있는 것이다. (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 영험한 산이라고 여겨서 그랬을까? 조선시대에 이곳에 왔던 서거정은 갈석청조碣石晴照라는 시를 남겼다.
해문은 예로부터 풍랑이 거세게 치는데 한 줄기 황하수가 끝없이 콸콸 흐르누나. 나는 당장 갈석산을 부여잡고 올라가서 술잔보다 작아 뵈는 바다를 굽어보고 싶네. 海門從古浪奔雷 一帶黃河衰衰來 我欲琴綠登碣石 俯看溟勃小於杯
그래 저렇게 멀리에 바다가 있어 바다가 보이는 산이고, 뒤에 조성되었지만 갈석호가 저렇게 푸르고 푸르니 저 바다나 호수에 용이 살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기원전 215년에 동쪽을 순행巡行했던 진시황이 올라 갈석문碣石門이라 새기고 그의 이세 황제인 호해胡亥가 올랐고, 뒷날에 서한西漢의 무제武帝. 당 태종(唐 太宗), 북위 문선제(北魏文宣帝)등 일곱명의 황제가 올랐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갈석산에는 당나라 때의 빼어난 문장가인 한유韓兪을 제사 지내는 한문공사韓文公祠라는 사당이 있는데, 그런 연유 탓인지 갈석산 아래 자리 잡은 도시 창려昌黎는 한유의 호號이다.
그리고 동한東漢 말기를 살았던 그 불세출의 영웅 조조曺操는 요서遼西의 오환족烏桓族을 치고 개선하여 돌아가던 길에 이 산에 올라 <관창해觀滄海 步出夏門行>라는 시를 남겼다.
동으로 갈석에 이르러 푸른 바다를 바라보노라. 바다는 어이 이리도 출렁이고 섬은 우뚝 솟았는가. 수목은 울창하고 백초百草는 무성하네. 가을 바람 소슬한데 큰 파도가 솟구치는구나. 일월日月의 운행은 이 바다에서 솟고 은하수의 찬란함은 이 바다에서 떠오르네. 그 얼마나 다행한가, 노래 불러 뜻을 읊노라. 東臨碣石 以觀滄海 水何澹澹 山鳥竦峙 樹木叢生 百草豊茂 秋風蕭瑟 洪波通起 日月之行 若出其中 星漢燦爛 幸甚至哉 歌以咏志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1950년 가을 이곳을 찾았던 혁명가 모택동은 <낭도사浪淘沙>라는 시 한편을 지었으며 북대하의 응각정 앞에 새겨져 있다.
연燕나라 땅엔 큰 비가 쏟아지고 흰 파도는 하늘까지 넘실거리네. 진황도 바깥 고깃배는 아득한 바다에 보이지 않네. 어디로 갔는지 아는가. 천년도 지난 아득한 옛일 위무제魏武帝는 채찍을 휘둘러 동으로 갈석에 와서 시를 남겼는데, 소슬한 가을바람은 그때나 다름없지만 사람은 바뀌었으니. 大雨落幽燕 自浪淊天 秦皇島外打魚船 一片汪洋都不見 知向護邊 往事越天年 魏武揮鞭 東臨喝石有遺篇 蕭瑟秋風今又是 換了人間
역사의 기록들에는 이곳 갈석산이 진나라의 국경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기史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는 이곳 갈석산에 관한 글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제국秦帝國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와 조선朝鮮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임조臨洮 와 강중羌中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북향호北響戶에 이르렀고, 북쪽은 황하黃河를 근거지로 하여 요새要塞를 만들어 음산陰山과 나란히 요동遼東에 이르렀다.”
32년,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 신선들이 지은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도록 보내면서 이곳 갈석산에서 전송한 뒤에 갈석산의 석문에 비문을 새겼다. 진시황은 그 비문에다 그가 황제에 오른 뒤에 천하天下가 태평太平해졌다고 쓴 뒤에 한종韓終. 후공侯公. 석생石生을 시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신선의 약을 구하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사마천은 요동을 갈석산 지역으로 보았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진시황의 아들인 이세 황제가 이곳 갈석산 일대를 순행하였으며, 그 때의 상황이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제국秦帝國 2세二世 황제가 조고趙高와 더불어 의논하기를 “짐朕이 나이가 어려 처음 즉위 했을 때는 백성들이 짐 을 따르지 않았다. 선제(진의 진시황)께서는 군현郡縣을 순행巡行함으로써 진제국의 강함을 나타내셨고, 해내海內를 위엄으로 복종시켰다. 지금의 짐은 안일하여 순행을 하지 않으니, 그것은 바로 짐이 약한 것으로 보여 신하로 따르는 사람이 없는 천하가 되었다.” 고 하였다.
봄에 2세 황제는 군현을 순행하였는데, 이사李斯가 따랐다. 갈석산碣石山에 이르러 그곳으로부터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회계산會稽山에 이르렀다. 그때 시황제始皇帝가 세었던 비석碑石에 글씨를 새겼는데, 비석의 한쪽에 대신으로서 따라간 사람의 이름을 새김으로서 시황제의 성공成功과 성덕盛德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순행이 끝난 후에 황제는 말하기를 “금석각金石刻은 모두 시황제께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짐은 시황제께서 사용하셨던 칭호를 물려받고 있으면서도 금석각사金石刻辭에 시황제를 칭송하지 않았으니 후사後嗣가 영원무궁하게 계승해야 할 그 성공과 성덕을 칭송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승상丞相 이사와 거질去疾, 어사대부御史大夫 덕德은 잘못되었음을 빌고 말하기를 “ 신臣등이 청하옵건대 조서詔書를 자세하게 각석에 새겨 황제의 뜻을 명백하게 하겠습니다. 신 등은 죽음을 무릅쓰고 그렇게 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 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렇게 하도록 승낙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위의 글을 보면 진시황제의 2세가 동부지역을 순행 하는데, 당시 황제를 수행했던 신하들이 진시황이 갈석산에 세워놓은 비석에 그들의 이름만을 새긴 것을 알고서 나무라자 신하들이 다시 가서 진시황제의 송덕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 갈석산이 진제국의 국경이었으며 갈석산은 요동 땅이었고, <한서漢書>의 <武帝記>에는 “서한西漢 무제가 태산泰山으로부터 다시 동쪽의 바닷가를 따라 순행하여 갈석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서遼西에서부터 순행하여 북쪽 변경의 구원九原에 이르렀고, 5월에 돌아가 감천궁甘泉宮에 도착했다.“ 라고 써 있는데 요서군遼西郡이 서부 유역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글이다.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는 밤, 다시 그날의 추억에 잠기다 보면 꿈속에서라도 산해관에서 갈석산으로 가는 버스에 탈 수 있을까?
계사년 칠월 초나흘 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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