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삼백 리 한강 일곱 번 째를 걷는다.
- 여주 천서리에서 서울 광나루까지-
한강 천 삼백리 도보답사의 여정이일곱 번째로 실시됩니다. 답라를 마무리한 천서리에서부 터 시작될 이번 여정은 양평군을 지나 하남시를 거쳐 서울의 광나루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팔당댐안에 있는 두물머리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옛 시절 용진나루가 있던 그곳에는 강물만 출렁거리고
정양용이 공부를 했던천진암은 현재 천주교의 성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한강 도보답사는 한국 천주교의 산실로 이벽, 정약전, 정약종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잠들고 있는 천진암과 조선의 빼어난 시인으로 허균의 누님이기도 한 허난설헌 묘, 그리고 다산 정양용의 묘를 비롯한 문화유산들을 답사하며 걷게 될 것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물산 넉넉한 인심 양평군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쌀, 도라지, 고구마의 고장 여주군입니다」 드디어 양평군 개군면에 접어든다. 안말 남쪽에 새로 조성된 새터말을 지나면서 '꼴값'이라는 상호를 단 음식점이 나타난다. 안말, 별말을 지나 개군 면소재지가 위치한 사창터마을에 이른다. 옛 시절 창이 있었다는 사창터는 위자진개라는 이름의 나루가 있었다고 한다. 길 한복판에 「한강대탐사 대원 여러분 완주를 기원합니다」라는 플래카드가 우리를 반겨준다.
지방 2급 하천 향지천을 지나 하자포마을을 거쳐 구미정수장에서 바라본 남한강에는 수많은 오리 떼들이 떠 있다. 한강이 후미져 있으므로 후미개 또는 구미개, 구미포라 부르는 이곳 남한강에는 곱은여울이 있다. 공주에서 출발한 이대원 씨가 양평 근처를 지나고 있다는 전화가 오므로 우리는 그를 기다리며 구미정류장에서 한참을 쉰다. .“
아랫길을 택한 나의 길에는 손만 뻗으면 닿을 듯한 강물과 불어오는 강바람, 그리고 그늘 드리운 나뭇잎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더운 내 가슴을 씻어주는 듯하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일생이 뒤바뀌는 경우가 또 얼마나 많은가. 흙탕이 되어 흐르는 강물에 몇 마리의 오리가 거슬러 올라오고 드디어 양평 시내에 접어든다. 한수의 시에서 "해는 관금봉을 비치는데 손은 양근관을 떠난다. 동으로 30리를 향하지 못하여 천경이 평평하기가 책상과 같다. 맑은 강이 항상 오른쪽에 있는데 멀고 가까운 것이 항상 구경할 만하다"라고 노래했던 양근이 지평현과 합해서 오늘의 곧 양평군이 된 것은 1930년이었다.
양근포구에는 물결만 일렁이고
조선시대 어느 시인의 시 구절처럼 "큰 뫼 뿌리가 하늘을 꿰뚫어 동이를 엎은 것같이" 서 있는 용문산을 의지한 양평의 양근나루는 서울로 가던 길목이었다. 양평읍 양근리의 갈산 기슭에 위치한 양근나루는 1930년 무렵까지만 해도 강원도에서 서울로 들어가기 전의 가장 큰 포구였다. 칙미포구라고도 불리던 양근나루는 강원도 일대에서 나는 메밀, 콩, 수수, 감자, 옥수수 같은 밭곡식들과 나무그릇, 꿀 등이 남한강을 따라 내려와 머물렀다가 서울의 마포로 내려갔던 곳이었다.
남한강은 그 무렵까지만 해도 수령이 넉넉해서 쌀 이백 가마쯤이 실리는 30톤짜리 돛단배들도 오르내렸다. 이 배들은 서울로 내려갈 때에는 물 흐름에 따라 떠내려가듯이 빨리 갔지만 올라올 때에는 물살을 거슬러야 했으므로 시간이 좀더 걸렸다. 바람만 잘 만나면 강원도에서 사흘 만에 양근포구까지 내려갈 수 있었지만, 멀지 않은 마포나루에서 이곳으로 올라오는 데에는 사흘이 또 걸렸다.
강원도의 산물들은 배로 곧바로 마포나루까지 실려가기도 하고 반대로 마포나루를 떠난 배가 양근포구에 닿아 서로 물건을 바꿔가기도 했다. 그렇게 되니 양평읍의 장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사람들의 살림도 넉넉해져서 이곳에는 배를 이삼십 채씩 가진 부자도 꽤 있었다.
강원도의 재목도 이 강을 타고 양평군을 거쳐 서울로 내려갔다. 태백산에서 베어낸 나무들은 남한강 상류인 영월과 정선에서 뗏목으로 묶여 강물에 띄워졌는데, 뗏목 사공들은 꼭 양근에서 하루나 이틀을 묶고는 다시 강물을 타고 서울로 내려갔다. 하지만 서울에서 양평군을 거쳐 강원도에 이르는 신작로가 닦이고 트럭이 다니기 시작한 1925년 무렵부터 양근포구는 점차로 한산해지기 시작해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포구로서의 기능을 잃게 된다.“
서울 42km, 양수리 6km. 강 건너 정암산(403.3m) 자락에 자리잡은 검단마을은 검고 붉은 돌이 많았다고 하고, 말미마을 동쪽에는 종여울이라는 여울이 있었고, 모래가 많았던 모라재에는 모라내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강변도로로 만들어진 용담대교 그곳에서부터 길은 악전고투의 길이다. 강문숙 씨는 사뭇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오직 쏜살처럼 달려오는 자동차들의 열기를 피할 곳이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가다 쉬고 가다 쉬고, 겨우 용담대교를 건너와 그늘도 없는 곳에 자리잡고 눕는다.
용담대교 길이 2,380m. 시간상으로 30분에 주파했지만 팔월 땡볕에 시달린 나머지 '질린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이곳 용담리에 기두원이라는 원이 있었고 저 건너 파람소니마을에는 중앙선 기차가 지나가는 양수역이 있다.
이곳 양수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이 된다. 두 개의 큰 물길이 만나는 곳이므로 두물머리, 두머리 등으로 불리는 양수리의 옛 이름이 병탄幷灘이었던 듯 싶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군 서쪽 45리 지점에 있다. 여강麗江 물과 용진龍津 물이 여기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병탄이라고 한다.“고 실려 있는 이곳 병탄을 고려 말의 문신인 이색李穡은 ”흐름을 따라 내려가니 뱃사공이 한가하도다. 험한 곳을 만나면 경각 사이에 놀라 외친다. 늦게 사장沙場에 닿으니 바람과 이슬이 찬데, 등잔불 하나가 깜박깜박하여 구름 산을 비친다..“ 고 하였는데, 바로 그 곳에 있던 용진龍津나루 위에 여울이 있어서 가물면 도보로 건널 수가 있었다고 한다. 양수리에서 와부읍 진중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두머리나루이고 저 한강 한복판에 그림처럼 서 있는 섬이 족자섬이다. 푸른 나무숲으로 희끗희끗하게 보이는 새들이 백로인데 저 섬에는 백로떼 200여 쌍이 모여산다고 한다.”
“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한자로는 양수두兩水頭라고 쓰고 두 강줄기가 합수하는 모서리 가장자리라는 뜻이다. 일제 때 양수리 근처에 올라갔던 일본인이 두물머리를 내려다보고 "조선에도 이런 명당이 있었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두물머리는 나라의 젖줄로서의 강물뿐만이 아니고, 조선 후기 실학사상으로서 한민족을 감싸고자 했던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이 태어나고 말년을 보낸 곳으로서도 뜻 깊은 곳이다.
현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번지로 변했지만 다산이 살았던 그 당시는 경기도 광주군 초부읍 마현리 소내였다. 다산의 생가는 1925년 여름의 홍수 때 떠내려가 1975년 새로 복원한 것이다. 다산 선생의 집 창문들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저 방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들이 저 창호지를 뚫었으리라. 옛 맛을 느낄 수 없는 다산의 집 뒷편 '여유당與猶堂'이라 새긴 빗머리돌을 지나 작은 언덕에 오르면 정약용과 그의 아내 숙부인 풍산 홍씨를 합장한 묘가 나타난다. 팔당호의 출렁이는 물결이 어른거리는 그 뒷산 정약용 선생 묘소 앞에서 추모의 시간을 갖고 나는 일행들을 모아 다산 선생에 대해 한 마디 한다.
정약용은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던 영조 38년(1762년) 6월 16일 압해 정씨 재원과 해남 윤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송강 정철과 쌍벽을 이루는 가사문학의 대가 고산 윤선도와 윤두서의 직계 후손이었다. 그의 호는 다산茶山, 삼미三眉이고 당호는 여유당이었는데, 여유당이란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네 이웃을 두려워하라"는 뜻이었고, 다산은 그의 유배지였던 귤동의 뒷산 이름이었다.“
“ 팔당댐에 고여 있던 강물은 저렇듯 포효하며 아래로 아래로만 흐르고 중앙선 철로의 시멘트벽에는 '이영실, 병준 잘 살자'라는 글씨에서부터 '누구야 사랑해'라는 글씨까지 빼곡하게 씌어져 있다. 글씨를 쓰지 않아도 잘 살면 될 것이고 사랑하면 될 터인데 저렇게 글씨를 새겨놓아야 잘 살고 사랑한다는 말인가? 씁쓸하다.
드디어 남양주시 와부읍으로 접어든다. 해장국 한 그릇에 빈 배는 채워졌지만 여기저기 환자 투성이다. 지팡이가 없으면 걸어갈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 강문숙 씨에게 나는 무리하지 말라고 권한다. 더 멀리 뛰기 위해서 뒤로 몇 걸음 물러서지 않은가. 정 힘이 들거든 시내버스를 타고 한 정거장 정도 앞서 가라 말했다. "그래도 될까요"라는 강문숙 씨의 말에 김현준 기자는 한번 참고서 걸어보라고 심각하게 말한다. 나는 장 루슬로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린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미국의 육군 소장 워커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워커힐호텔 아래에 한양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나루터인 광나루가 있었다.
"이곳 광나루(광진)에서부터의 한강을 경강京江이라고 불렀다. 광진. 삼전도. 송파진. 신천진. 두무포. 한강도. 서빙고진. 동작진. 흑석진. 노량도. 용산진. 마포진. 서강진. 율도진. 양화도. 공암진. 철곶진. 조강진이 모두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나루였다.
그렇다면 남한강을 따라 강원도에서 이곳까지는 어마나 걸렷을까? 물길이 많고 적음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충청도 영춘에서 서울까지는 닷새반이 걸렸고, 단양에서는 닷새, 충주에서는 나흘, 여주에서는 이틀, 이포에서는 하루만이면 이곳 서울에 도착했다고 한다.
강 건너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있는 풍납동이다. 백제 때의 옛 성으로 처음에는 배암드리 또는 한자명으로 사성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바람들이성 또는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이곳 삼전도에서 조선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치욕적 큰 사건이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함락으로 인조가 청군에게 항복을 한 것이다. 1637년 1월 30일 "천은이 망극하오이다" 하며 세 번 절한 다음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할 때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삼전도의 치욕은 거슬러 올라가면 인조반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연산군의 폭정 때문에 일어났던 중종반정과는 달리 인조반정은 광해군과 대북정권의 현실적인 청나라와의 외교 그리고 폐모론을 명분으로 일으킨 쿠데타였다. 인조반정 이후 이들은 광해군이 표방했던 중립 외교노선을 반청노선으로 바꾸고 말았다. 청나라와 조선을 형제로 보고 서로 예우하고자 했던 청태종은 크게 분노하여 정묘년인 1627년에 3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자 인조와 조정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때 청나라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을 침략하게 된 이유 7가지를 말하고 세 가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조선의 만주 영토를 청나라에 내놓을 것, 명나라의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조선 군사 3만을 지원할 것이었다. 최명길이 강화회담에 나서서 청과 형제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합의시키자 청나라는 철수하였다. 하지만 1636년 청나라는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관계를 폐지하고 새롭게 군신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 청한다. 조선은 그 제의를 거절하고 팔도에 선전교서를 내렸다. 그 선전교서에는 조선 백성보다 향명대의向明大義(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가 더 큰 목소리로 주창되어 있었다.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금과 화和를 끊는다는 선전교서였던 것이다. 결국 청은 군사 12만 명을 이끌고 조선 침략에 나섰는데 그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1만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한산성에서 진을 쳤지만 45일 만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여주에서부터 시작한 여정이 양평과 남양주를 지나고 하남시를 거쳐 서울에 이르는 구간에 동참하실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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