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마실길과 고창 질마재길을 가다.
구월의 둘째 주에 부안의 변산 마실길과 고창의 질마재길을 갑니다. 나라 안의 수많은 길 중에서도 역사와 문화유산을 산재한 곳이 바로 부안의 변산과 고창일대입니다. 바닷가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숲이 무성해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변산 마실길과 해리에서 선운사로 이어지는 고즈넉한 길, 그 길에 무리지어 피어있는 상사화라고 불리는 꽃무릇길과 선운사가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에 자리 잡은 변산 마실길과 고창 질마재 길을 걷고자 하시는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변산 마실길,
“온 나라 자치단체가 옛길 찾기에 열풍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이 땅 구석구석을 걷겠다고 난리가 아니다. 바람직한 현상이다. 사라져 버린 옛길을 찾는 것은 역사와 전통문화의 재조명 차원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고, 걷는 것은 마음수행과 육체 건강을 위해서 가장 좋은 운동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해주지 않는 걷기가 현대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것은 그 무슨 연유일까?
빨리, 빨리에 너무 익숙하게 길들여진 사람들이 느림의 미학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지리산 둘레길>이나 <제주 올레 길>이 언론에 잇달아 소개 되면서 걷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장거리 도보답사지가 지리산이나 제주만 있을까?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계획한 장소가 바로 우리나라 국립공원과 도립공원이다. 그런 취지로 접근해 계획한 것이 소백산 자락길이고, 변산, 모악산 마실 길이었다. 산을 따라 이어진 길이 둘레길이나 자락길이라면 마실은 또 어떤가? 마실은 '나라 안 모든 지역에서 통용되는 ‘마을'의 방언으로 ’마을에 나간다‘는 뜻이 '마실 나가다'이다. 옛날 할머니가 이웃집에 놀러가거나 가까운 곳으로 바람 쐬러 가거나 일이 있어 집밖을 잠시 나갈 때 '마실 나갔다 온다' 하고 나가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의미에서 마실은 마음과 육신이 한가할 때 나가는 것이다.
“강산江山과 풍월風月은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주인인 것이다. ” 라는 옛글이 있는데, 그런 한가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걸으면 좋을 길이 변산반도 국립공원을 휘감아 도는 변산 마실길이다.
새만금전시관에서 격포까지 1구간을 개척해서 <변산 바닷가 길 마실 가자>라는 주제로 첫 번 째 도보답사에 나선 것이 2009년 6월 21(일요일)일이었다.
열시 반 서울과 경기도에서 내려온 90여명의 도반들과 전주 부안 일대에서 도착한 30여명의 인원이 새만금 전시관 부근 바닷가에 도착했다.
새만금 전시관이 들어선 곳이 서두터(西斗-)서두터마을은 묵정 북쪽 해변에 있는 마을로 옛날 옛적에 물소가 바다를 건넜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신기하게도 서두터마을에서 신시도를 가로막은 새만금 방조제가 들어서면서 지금은 그 길이 군산까지 이어져 있어 자동차가 바다를 가로질러가는 꿈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변산 마실길을 걷는다>는 프랭카드를 뒤로하고 격포항까지 이어지는 18km의 마실길에 나섰다.
다행히 우거졌던 풀을 며칠 전에 베어서 걷기에 지장은 없지만, 길가에 아직 페인트로 표시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리본이 매달려 있지도 않아 길 찾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와 전북도청에서 준비한 <환영 부안 변산 해변 마실길 개통>이라는 노란 리본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면서 길이 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온 박동규씨는 부지런히 리본을 달고, 공윤씨는 사진을 찍고 그 사이 길은 바다가 보이는 산길로 이어진다. 마실 길의 장점은 무엇보다 분단의 부산물인 초소길이 몇십 년 동안의 역사를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30번 국도 아래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이어지는 초소 길도 길이지만 금방이라도 초병들이 임무교대를 해도 무방할 듯한 초소들 너머로 보이는 바닷가는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제주 올레길이 대부분 그늘이 없어서 뙤약볕 아래를 걷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초소에서 초소로 이어지는 그늘이 마치 밀림을 연상시킨다. 또한 지리산 둘레길이 대부분 시멘트 농로가 많은 반면 이 길은 말 그대로 부드러운 흙길이 산에 있고, 까실 까실한 모래밭이 펼쳐진 바다로 이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푸르고 눈 밝은 사람에게는 새로 조성된 뻘 밭에 빨강호 새카만 게들이 마치 천군만마가 지나가는 것 같다.
그 형상이 조개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합구마을을 지나 초소 길을 따라 가다가 바닷길에 접어들고 고개를 넘어서자 패총이 있는 대항리(大項里에 이른다.
본래 부안군 우산내면의 지역으로서 부안읍과 격포진으로 가는 큰 길목이 되었다 하여 한목 또는 대항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합구미, 목적동, 서두리, 자미동을 병합하여 대항리라 하여 변산면에 편입되었는데, 이곳에 군산대학교 실습장이 있다.
대항리 패총은 변산 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합구미 마을 동쪽 산 밑 밭에 있다. 바닷가에 접한 밭이 파도에 깎여 낭떠러지를 이루자 지층이 드러나 1947년 발견되었다. 규모는 남북 약 14m, 동서 약 10m이며, 130㎝ 깊이의 암반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층위가 쌓여있다. 이 패총의 조개껍질층에서 빗살무늬토기 조각과 돌로 만든 석기(石器)가 나와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대항리패총은 고고학적 자료로서 활용 가치가 있어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전하고 있다.
대항리에서 변산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은 초소길보다 바닷길이 더 운치가 있다.
기묘한 형태의 바위와 간간히 드러나는 모래밭으로 이루어진 바닷가 길을 따라가자 보이는 변산 해수욕장 로 이루어진 변산해수욕장(邊山海水浴場) 은 자미동 서쪽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바닷가가 얕고 수온(水溫)이 알맞으며, 간만의 차가 심하지 않아 위험하지 않고, 가늘고 흰 모래밭으로 되어 있다. 가까운 곳에 해지는 모습이 아름다운 월명암(月明庵)과 낙조대(落照臺)들의 명승지가 있고, 해안을 끼고 괴암괴석이 병풍처럼 드리워 있어 좋은 경치를 이루고 있으나 국립공원에 묶여서 1960년대 모습으로 남아 있는 나라 안에 유일한 해수욕장이다.
변산해수욕장을 따라가면 만나는 포구가 송포항이고, 그곳에서 운산리로 가는 바닷가 산길은 아름답기 이를데 없다.
변산면 운산리는 변산 밑에 있기 때문에 구름이 늘 끼어 있으므로 구루미 또는 운산리라고 불렀고 사망암(士望岩)은 운산 서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해수욕장과 산길이 이어지다가 마을을 지나는 유일한 곳인 운산 마을은 한적하면서도 운치가 있다. 일찍 핀 붉은 접시꽃 흰 접시꽃이 길가는 나그네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마을길을 지나 산 능선 길에 오래 된 소나무가 가지를 늘어뜨린 서 있다.
한편 운산마을 부근의 노리터(모장동牟獐洞)마을은 운산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명절날이면 고깔 쓰고 놀던 곳으로 유명하다 한다.
운산 마을에서 고사포 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아직 정비가 되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야 하는데, 웬걸, 바닷가 솟아오른 바위섬에 무덤 한기가 보이지 않는가, 저곳에 무덤을 쓴 사람은 누구이고 잠든 사람은 또 누구란 말인가? 생각하며 초소를 지나 잔등을 넘어서자 보이는 작은 해수욕장에 핀 해당화 꽃이 상기도 붉다.
해수욕장 끝 부분에서 길은 제법 넓은 산길로 이어지고 도반들의 함성이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예쁜 산길이 우리 몰래 숨어 있었다니,“ 움푹 패인 초소 길을 따라가는데 푸른 소나무와 흰 모래사장이 펼쳐진 고사포 해수욕장이 망초꽃 너머로 보인다.
소나무숲이 울창한 고사포(古沙浦)마을은 모장동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고 어옹산망등(漁翁散網-)은 고사포 북쪽에 있는 등성이로 어옹산망혈이 있다고 한다.
삼발리(三發里) 는 마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 세 사람이 살다가 각각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는데 멀리 보이는 하섬은 삼발리 북서쪽에 있는 섬으로 지형이 새우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원불교의 수도원이 있다. 예로부터 민어, 조기, 도미, 대화, 삼치, 조개 등이 많이 잡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썰물 때는 모세의 기적처럼 물길이 열리는 곳이기도 한다.
아무래도 초행길인 사람들은 뒤에 처지기도 하는데, 요즘 걷기만큼 정신과 육체의 건강에 좋은 보약이 어디 있는가.
“무엇보다 걸으려는 욕망을 잃지 말라, 매일 같이 나는 걸으면서 행복한 상태가 되고, 걸음을 통해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걷는 동안 가장 좋은 생각들을 떠올렸다.” 덴마크의 철학자인 키엘케골도 이런 말을 남기지 않았던가, 걷기의 비밀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많은 도보 답사객들이 그 힘든 여정을 참고 견디는 것이리라.
소나무 숲에 들어서서 저마다 마음에 드는 소나무에 등을 기대기도 하고, 끌어안기도 하다가 버스에 실려 도착한 것이 적벽강 부근이다.
채석강과 달리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드문한 적벽강(赤壁江)은 대막골 북쪽에 있는 명승지로 해안을 따라 500여m의 붉은 빛 절벽이 휘돌아 있다. 돌벽 사이로 짙푸른 바닷물이 출렁이고, 있다. 적벽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놀던 적벽강(赤壁江)의 이름을 따서 적벽강이라 한다.
물이 가장 많이 빠진 때라서 그런지 바닷물은 저 멀리 있고, 저마다 여러 생각에 젖은 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마냥 가볍다. 기묘하게 생긴 적벽강 일대를 바라보며 올라서자 수성당에 이른다.
수성당(水聖堂)은 대막골 서남쪽, 적병강 해안에 있는 신당으로 당집 밑에는 두 벼랑의 곧은 바위가 둥근 통모양의 굴처럼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에 개양할미의 전설 한 편이 남아 있다.
개양 할미는 칠산 바다를 맡아 보는 바다신이다. 아득한 옛날 적벽강 대막골(죽막동) 뒤 ‘여울골’에서 개양 할미가 나와 바다를 열고 풍랑의 깊이를 조정하여 어부들의 생명을 보호하고 물고기가 많이 잡히도록 살펴 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개양 할미를 물의 성인으로 높여 수성 할미라 부르며 여울골 위 칠산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절벽에 구랑사를 짓고 모셔 오다, 지금은 수성당으로 고쳐 부르고 있다.
이 개양 할미는 키가 어찌나 컸던지 나막신을 신고 바다를 걸어 다녀도 버선조차 젖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곰소의 ‘게란여’에 이르러 발이 빠져 치마까지 젖자, 화가 난 개양 할미가 치마로 돌을 담아다 ‘게란여’를 메웠다고 한다.
지금도 깊은 물을 보면 “곰소 둠병 속같이 깊다.”는 속담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개양 할미는 딸 여덟을 낳아 위도와 영광, 고창, 띠목 등 칠산 바다 곳곳에 두고, 막내딸을 데리고 구랑사에 머물러 서해 바다를 다스리고 있다고 한다.
지금은 수성당 할머니라고 부르며, 음력 정월 보름이면 죽막 등을 중심으로 한 주변 마을 어민들이 안전과 물고기 풍년을 비는 수성당제를 지낸다.
선운사와 고창 질마재길,
“... 그래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것들대로 아름답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지금 현재 이 선운산의 깊숙한 곳에서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이 고요와 바라보는 나뭇잎의 미세한 흔들림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리라.
명나라 때의 문인 오종선吳從先이〈소창자기小窓自紀〉에서 “속세를 벗어나 정을 줄만한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허물없는 교우관계를 허락한다.”고 하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의 산행은 어쩌면 그리도 잘 맞아 떨어지는지,
용문굴에서 조금 내려가자 도솔암의 마애불 앞에 도착한다. 암벽타기를 즐기는 산악인들이 연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바위벽을 돌아가면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고려시대 초 지방 호족들이 세웠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 17m, 너비 3m인 이 불상 낮은 부조로 된 거대한 크기의 마애불로 결가부좌한 자세로 양끝이 올라와 있고 입도 역시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부처님다운 부드러움이나 원만함이 없이 위압감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애불의 머리 위에 누각 식으로 된 지붕이 달려있었는데 인조 20년(1648)에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 속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끈질기게 전해져 왔다. 오지영이「동학사」에 기록한 비결 탈취 과정은 이렇다.
지금 고창군(당시 무장현) 아산면 선운사 동남쪽 3킬로미터 지점에 도솔암이란 암자가 있고, 그 암자 뒤에 50여 척 높이의 층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절벽에 미륵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미륵상은 3천 년 전에 살았던 검당선사(黔堂禪師) 진상이란 것으로 그 미륵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한 숨겨져 있는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비결과 함께 벼락 살을 동봉해 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비결을 꺼내기 위해 손을 대면 벼락에 맞아 죽는 다는 것이다. 그 벼락 살이 같이 봉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지금(당시)부터 130년 전에 전라감사로 내려왔던 이서구(李書九)가 그것을 꺼냈을 때 벼락이 쳤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서구는 어느 날 선화당에 앉아 조용히 천지의 망기(望氣, 나타나 있는 기운을 보고 무슨 조짐을 알아냄)를 보고 있자니, 서남쪽에서 매우 상서로운 기운 한줄기가 뻗쳐올라가고 있는지라,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말을 몰아 그 쪽으로 달려가 보니, 그것이 선운사 미륵의 배꼽에서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에 무엇이 들었기에 이러는가, 그 배꼽을 쪼아보니, 그 속에는 책이 한 권 나왔는데, 그 순산 뇌성벽력이 하늘을 찢는 바람에 바람이 혼비백산, 그 책을 도로 거기 넣어놓고 회로 봉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때 이서구가 본 것은 “전라감사 이서구 개탁”이란 글자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세상 사람들은 그 비결을 꺼내보고 싶어도 벼락이 무서워 꺼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륵비결이 숨어있는 마애여래불
이 비결을 1892년(임진) 8월 무장 접주 손화중과 동학의 지도자들이 꺼내게 된다. 어느 날 손화중의 집에서는 선운사 석불비결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결을 내어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으나, 벽력이 또 일어나면 걱정이라 하였다. 그 좌중에 오하영(吳河泳)이라고 하는 도인이 말하되, “그 비결을 꼭 보아야 할 것 같으면, 벽력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중대한 것을 봉해서 둘 때에는 벽력 살이란 것을 넣어 택일하여 봉하면 후대인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열어보아도 아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서구가 열어볼 때에 이미 벽력이 일어나 없어졌는지라 어떠한 벽력이 또 다시 일어날 것인가. 또는 때가 되면 열어보게 되나니 여러분은 그것은 염려 말고 다만 열어볼 준비만을 하는 것이 좋다. 여는 책임을 내가 맡아 하겠다.”고 하였다. 좌중에서는 그 말이 가장 이치에 합장하다 하여 청죽(靑竹) 수백 개와 새끼 수십 타래를 구하여 부계(浮械)를 만들어 그 석불의 전면에 안치하고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것을 꺼내기 전에 그 절 중 들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미리부터 수십 명의 중들을 결박하여 두었는데, 그 일이 끝나자 중들은 뛰어가서 무장관청에 고발하였다. 전날 밤에 동학군들이 중들을 결박 짓고 석불을 깨뜨려 그 속에 있는 것을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백 명이 잡히었는데, 그 중 괴수로 강경중(姜敬重), 오지영, 고영숙(高永叔) 세 사람이 지목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지도자들이 여러 형태로 피해를 받았지만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어 무장 접주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바라볼수록 마애불과 잘 어울리는 한 그루 소나무를 뒤로하고 도솔암으로 오른다. 깎아지른 절벽과 푸르른 나뭇잎 새들이 손짓하는듯한 정경 속에 내원궁(內院宮)이라고 부르는 도솔암은 자리 잡고 있고 그 안에는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선운사 지장보살 좌상이 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 만큼이나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지장보살은 관음전에 있는 금동보살과 크기나 형식은 비슷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 먼저 온 몇 사람이 정성스레 절을 올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만 있다. 그래 나는 저 내원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백중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곁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저 건너 산봉우리의 낙조대만 바라보고 있으니...
도솔암에서 물을 마신 후 대나무 잎 새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잠시 내려가면 훤칠한 미남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장사 송을 만나게 되고 그 옆에 진흥굴이라고 불리는 천연굴이 있다.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이곳 선운사에 와서 이 굴에서 자던 중 꿈속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이곳에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 절을 크게 일으키니 그 것이 선운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이 신라 땅에 속했을 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옛날에는 양초를 켜놓고 기도드리는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지금은 마루도 만들고 부처님도 모셔놓아 얼핏 절을 연상시킨다. 믿음이 크면 여러 가지 부속물 들이 생기는 것인지 믿음이 없어지면 부속물들에만 더 신경을 쓰는지 모를 일이고 내려가는 신작로 길은 그런대로 시원하다.
복분자술이 한국의 대표주
선운산의 아름다운 풍경 한 가지를 떠올리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백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지만 나는 선운산의 상사화를 떠올린다. 9월경에 선운산 골짜기를 시나브로 걸을라치면 가을나무들 새로 새빨갛게 피어난 꽃들을 볼 것인데 그 꽃이 상사화이다. 잎이 지고 난 다음에 꽃대만 올라와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꽃이 잎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상사화라고 부르는데 아직은 이른 계절이라 볼 수가 없고 또 하나 들라하면 선운사의 복분자주와 풍천장어일 것이다. 복분자는 딸기의 일종이고 우리 지역에서 고무 때왈이라 불리는 검은 딸기인데 그 술은 먹으면 요강단지가 뒤집어진다는 속설이 있지만 사실은 딸기가 뒤집어진 요강단지와 흡사해 복분자라고 불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선운사 동백장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복분자술로 하룻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이다. 풍천장어 역시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안 먹고 가면 서운한 필수 음식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 산에는 <선운산가>라는 선운산과 관련된 백제 때의 노래가 전해온다. 백제 때 지금의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을 아우르던 장사현에 살던 사람이 나라의 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자 그 부인이 선운산에 올라가 낭군을 그리며 부른 노래인데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노래에 얽힌 이야기만 남아있다.
선운 야영장을 지나자 바다로 가지 않고 이 선운사 골짜기를 찾은 사람들이 깨끗하지 않은 물임에도 불구하고 물놀이를 하고 있고 쉬엄쉬엄 걸어가자 선운사에 이른다.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사기에 의하면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훗날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사 창건설화는 이렇다. 죽도 포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 때 마다 배가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가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라가 보니 그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 금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利益이 있게 하리라’라고 쓰여 진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었던 현재의 절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진흥왕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100명을 보내 뒷산에 무성했던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절터를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을 가느라고 뚫어놓은 자연석굴인 용문굴이 등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다. 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검담선사가 그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때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였으며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의 소금을 선운사에 보냈고 그 전통이 그대로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 충숙왕 5년과 공민왕 3년에 효정선사가 중수했으나 폐사가 되었고 조선 성종 14년에 행호(幸浩)선사가 쑥대밭만 무성하던 절터에 서있는 구층석탑을 보고 성종의 작은 아버지 덕원군의 시주를 얻어 중수했지만 정유재란 때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당시 광해군 6년(1614) 월준대사가 재건한 뒤 몇 차례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 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현재 조계종 제 24교구의 본사로서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문암 등 4개의 암자와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십여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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