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초입에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2013년 구월 두 번째 기행, 변산마실길과 고창 질마재길이 <지리산 둘레길>로 변경되어 실시됩니다. 민족의 성산 지리산 자락에 펼쳐진 지리산 둘레길에 자리잡은 논다랭이마다 황금빛 벼이삭이 넘실거리는 가을의 초입인 구월 둘째 주에 걷습니다.
남원의 육모정에서 운봉에 이르는 구절양장의 지리산 둘레길과 남원 산내에서 경남 함양의 창원마을에 이르는 지리산 둘레길의 상징적인 코스를 비롯 함양일대의 지리산 둘레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특히 이번 여정은 우리나라 국보중의 국보인 실상사 백장암의 삼층석탑(국보 제 10호)를 보기 위해 지리산 산길을 오를 예정입니다.
“ 90년대 초 새해 첫날은 언제나 지리산으로 향했다. 남원을 거쳐서 구례에 닿고, 구례군 토지면의 연곡사를 답사한 뒤 섬진강을 따라서 하동 화개장터에 이르렀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를 지나면 하동읍이고 하동읍에서 점심으로 먹던 재첩국은 언제나 시원했다. 남명 조식선생의 자취가 남은 산천재와 덕천서원을 거쳐 산청읍 지나 함양으로 가던 그 경호강길,
그 푸른 강물이 가슴 시리게 다가오면 어느새 함양이었고, 함양에서 임천강을 따라 거슬러 오르면 다시 남원 산내의 실상
사에 닿고 다시 출발했던 남원에 닿았었는데 그 둘레가 지리산 8백리 길이었다.
그렇게 오래 된 전통처럼 내가 매년 자동차로 돌았던 지리산 둘레길이 세월의 흐름 속에 또 다른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알
려지고 있으니, 그게 바로 장거리 도보 트레일(Trail) 코스인 ‘지리산 둘레길’이다.
민족의 성산이라고 알려진 지리산 자락 아래 펼쳐진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등 5개 시,군 300Km를 도보로 걸을 수 있
는 길이 바로 그 길인데 2011년 까지 완성된다는데 그 첫 번째 코스로 완성된 길이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서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로 이어지는 20여 키로 길이다.
이른 가을이다. 아직 평야지대엔 나락이 새파란데 운봉고원을 지나자 나락(벼 이삭)이 누렇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에 저
렇게 노랗게 익은 나락 두 세모가지를 다 까먹어야 학교에 닿고는 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물하며 학교에 가는지, 물론 시
골 아이들은 학교마다에 있는 통학버스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입이 허옇게 되던 그 정취를 모를 것이다.
운봉일대를 거닐다가 매동마을에 도착해서 여장을 푼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지리산 둘레길 첫 번째 코스는 실상사에서
부터 시작된다.
바래봉에서 부터 비롯된 임천강이 뱀사골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몸을 합치고 그 흐르는 강물 위에 놓인 해탈교를 건너기전에 돌장승을 만나게 된다. 이 장승은 1963년 홍수 때 떠내려 간 짝을 그리워하는지 침울한 채 서있으며 다리를 건너면 1725년 무렵에 만들어진 돌장승 한 쌍을 지나게 된다.
1725년에 세워진 대장군은 숱이 많아 보이는 수염이 왼쪽으로 구부러져 있고, 대장군 보다 6년 뒤에 세워진 상원주장군은 턱수염이 세 갈래로 나뉘어 있으며 점잖으면서도 무서운 인상을 풍긴다.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자락에 자리 잡은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의 산문인 실상사파의 본 찰로서 우리나라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국보 10호로 지정되어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과 약수암의 목조탱화를 포함하여 보물이 11점이나 있어 단일사찰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 흥척 증각대사가 구산선문을 개산하면서 창건하였다.
흥척은 도의선사와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선법을 깨우친 뒤 귀국하였는데 도의는 장흥 가지산에 들어가 보림사를 세웠고 흥척은 이 절을 세운 뒤 선종을 전파하였다. 풍수지리설에는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하고, 그 후 2대조 수철화상을 거쳐 3대조 편운에 이르러서 절이 중창되었으며 더욱 선풍을 떨치게 되었다.
그 뒤 여러 번의 화재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고 여러 차례의 중창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현존하는 건물은 보광전을 비롯하여 약사전, 명부전, 칠성각, 선리수도원, 누각이 있으며 요사채 뒤쪽으로 극락전과 부속건물이 있다.
산내면 대정리 매동마을은 실상사에서 임천강 건너 중기 북쪽 골짜기에 있다. 매동에서 삼거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들막고개고, 매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무게골이다.
집집마다 호두나무가 몇 그루씩 있는데, 벌써 알이 익어서 그런지 겉껍질이 드문드문 새카맣다. 하나를 따서 땅에다 놓고 비벼대자 알맹이가 톡 튀어나와 돌로 깨자 그 하얀 속살이 부끄러움도 타지 않고 비집고 나오고 대추 하나를 따서 입에 넣자 제법 맛이 들었다.
이른 아침을 먹고 지리산 둘레길 21키로미터의 여정에 오른다. 마을 뒤로 난 길은 그다지 경사가 지지 않아서 걸을 만하다. 가을 산이라서 조금씩 단풍이 물드는 것이 보이고 조금 지나자 서진암 가는 길이 보인다. 시간 때문에 앞에 두고도 그냥 가는 마음은 섭섭하기만 하다. 그런데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먹을 만한 산과일이 보이지 않는다. “가을 산에 가면 없는 처갓집보다 낫다”는 우리네 속담이 무색하니 배낭 속에 넣어둔 드라이버도 무색하고 몇 개 싸가지고 온 비닐봉지를 쓸 일도 없을 것 같다. 길은 산길로 접어들고 그 산길이 끝나자 산내면 중황리中黃里 일대가 한 눈에 보인다. 홍치 중앙이 되므로 중몰, 중치 또는 중황이라고 부른 중황리에는 그 아래쪽부터 하황. 중황. 상황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상황 동쪽에 있는 마을은 큰 배나무가 있어서 배쟁이라고 부르고 중황 북쪽에 있는 마을은 섬촌이며, 하황 서쪽에 있는 마을은 감나무가 만하서 감나뭇골이라고 부른다.
멀리 지리산 연봉이 한눈에 보이는 중황리 일대의 논과 밭들이 파랗고 노랗다 못해서 푸르고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것 같다. 산길이 끝나자 논 두렁 길이 나타나고 그곳에 개암나무가 열매 몇 개를 매달고 있었다. 개암에 읽힌 이야기는 알지만 개암을 처음 보는 서울 촌 사람들에게 개암을 따 주면서 먹는 법까지 알려주고 다시 나선 둘레길은 오르막길이다. 길가에 계단식 논다랑이들이 끝없이 펼쳐진, 이곳 산내 중황리 상황마을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원마을로 이어지는 고개가 고개의 지형이 둥구스럼하다고 해서 등구치登九峙라고 부르는 등구재다.
“십리十里 간에 말이 다르고 백리百里 간에 풍속이 다르다.”는 옛 말처럼 이 고개를 사이에 두고 말이 다르고, 풍속이 다르다 생각하니 신기하기도 하다.
해발 700M인 이 고개는 경상도 큰 애기와 전라도 총각이 혼인을 할 때 가마를 타고 넘었던 혼례 길이었으며,, 어떤 때는 품앗이를 하느라 넘기도 했던 고갯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창원 마을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남원지역의 큰 장인 인월장이나 운봉장을 보러 갔다가 해 어스름할 제 돌아오던 장場 길이었다.
문득 옛 시절이 생각난다. 할머니와 단 둘이 살았던 시절 할머니는 계란꾸러미 두어 개를 가지고 장보러 갔고, 저녁 무렵에 돌아오셔서 보따리를 풀었다.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해서 바라보고 있으면 아지 두어 손이 나오고 어떤 때는 사과 두어 개가 보이기도 했다. 일년에 한 두어 번 먹을까 말까한 사과를 볼 수 있는 때가 가끔씩 돌아오던 장날이었다.
고개에 대해, 장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산길을 내려가자 창원 마을 일대가 한눈에 보이는데, 웬걸, 길옆에 간이 주막이 서 있다. 며칠 전 취재차 창원 마을에 갔을 때 만났던 할머니가 김치전에 술을 팔고 있는 게 아닌가?
김치전으로 술 한 잔을 마시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그곳에서부터 창원마을의 자랑인 다랑이 논이 아래로, 아래로 연결되어 있다.
마천면은 옛 시절 마천소馬川所가 있어서 지은 이름이고, 창원리는 창촌동과 원정동을 병합하면서 지어진 이름이다. 저 멀리 보이는 창촌동은 창원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창원리 동쪽에 있는 작은 모롱이는 지형이 청룡혈에 해당한다고 해서 청룡모랭이라고 부른다. 창촌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백씨 양씨가 처음 들어와 살았다고 해서 백량곡이고, 창촌동 서남쪽에 있는 산막골에는 금대암과 안국암이라는 암자가 들어서 있다.
창촌동 남쪽에 있는 소나무 숲이 동무정이라고도 부르는 구송정九松亭이고 창촌동 동북쪽에 있는 놀이터를 삼괴정三槐亭이라고 부르며 창촌동 북쪽에는 강개암의 서당이라는 양진재 터가 있다.
다랑이 논과 정자나무가 그윽하게 자리 잡은 창원 마을의 고샅길은 얼마나 그윽하고 아름다운지, 그 길을 가다가 바작이라고 부르는 바지게에 껄을 가득 짊어지고 가는 마을 어르신을 만났다. 무엇이 주 소득원이냐고 묻자, “농사 조금 짓고 소를 키우지요.” 하신다. 소 값이 얼마나 가느냐고 묻자. “소 값이 똥값이지요.” 하신다.
그래, 지금 시골에 남아 있는 이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이 시골에 누가 살 것인가? 하고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는 논밭은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그저 금물결이다.
금빛으로 넘실대는 다랑이 논 사이를 휘젓고 가다가보면 마음과 몸이 금빛으로 물이 드는 것 같아 황홀하기만하다.
창원 마을에서 학바위 지나 금계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민족의 성산인 지리산의 천왕봉을 바라보고 걷는 길이다. 지리산 연봉들이 가슴을 활짝 펴고 달려오는 듯한 산길이 미로처럼 구부러지고 또 구부러진다.
산길은 아래를 향해 이어지고, 어느 새 임천강변에 있는 의탄리를 지나 의중마을에서 점심을 먹었다.
의탄소義呑所가 있었던 의탄리에서 벽송사碧松寺로 오르는 산길은 점심을 먹어 배가 부른 채 가도 아름답다.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아서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벽송사는 조선 중종 15년에 벽송 지엄대사가 중창하면서 벽송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탄 것을 그 뒤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 벽송사에는 내세울 만한 문화재가 별로 없지만 절의 들목에 세워진 나무장승이 이채롭다.
‘그 풍부한 얼굴 표정이 민중미학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는 평을 받고 있는 옛날의 나무 장승은 절로 옮겨져 보호를 받고 있고 지금 은 새로 세운 나무장승이 길가에서 길손을 맞고 있다. 한편 이곳 벽송사는 판소리 엿서 마당 중 가장 외설적인 것으로 알려져 잇는 <변강쇠>의 무대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 못 배운 글 지금 공부할 수 없고, 손재주가 없으니 장인 질을 할 수도 없고, 밑천 한 푼 없으니 장사 질을 할 수 있나. 밤낮으로 하는 것이 그 짓뿐”이라는 비참한 가난뱅이인 옹녀와 변강쇠의 일대기를 풀어낸 민중문학이다.
이곳에서 휴천면 송전리 세동마을로 가는 2구간은 진짜 빨치산들만 가야될 것 같은 가파른 산길이다. 아무나 가다가 보면 낭패를 당할 것 같은 길을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르고 오르다가 한 없이 내려가는 길, 푸른 소나무 그늘 밑에 누워서 보았던 용유담은 옛날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는 곳이다.
그래, 산이라는 것이 그렇다. 천천히 느리게 걸으면 보이는 산을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게 오른다.
그러나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오르는 것을 등산登山이라고 하지 않고 산으로 잠시 들어갔다 나온다는 뜻으로 입산入山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산에 다녀와서 쓴 책을 유산록遊山綠이라고 하였다.
오늘의 여정을 돌아보면 오전은 그런대로 해찰도 많이 했는데, 오후의 여정은 느닷없는 복병을 만나 부산하고 위험한 여정이었다. 우리를 기다린 버스에 몸을 싣고서 돌아올 때 지리산 깊숙한 곳에서 민요 한 가닥이 들여오는 듯 했다.
“함양 산청의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동구마천의 큰 애기는 곶감깍기로 다 나가고, 효리 가성 큰 애기는 산수깍기로 다 나간다.“ 는 민요 가락 속의 함양의 옛 모습이 남아 떠나는 길손들을 배웅해주고 있었다.”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가을을 듬뿍 느끼고 싶으신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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