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에 찾아가는 보은의 삼년산성과 상주의 남장사
풍요로운 가을 보은의 삼년산성과 상주일대를 찾아갑니다. 나라 안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되었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보은의 삼년산성과 상주의 남장사에서 북장사에 이르는 노악산을 찾아갑니다.
보은의 명물인 보은 대추, 상주의 명물인 상주곶감과 상주감이 풍성한 시절에 찾아가는 이번기행은 보은과 상주의 가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곳 보은지역은 대전, 청주, 상주, 영동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영토를 다투던 접경지역이었다. 보은의 북쪽에 우리나라 산성을 대표할 만한 석축산성인 삼년산성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년산성(三年山城)은 신라 자비왕 13년(470)에 상주의 사벌성(沙伐城)을 점령한 신라가 보은으로 나와 쌓은 것이다. 이 성은 백제의 남진에 대비하고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서북지방으로 진출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즉 삼년군 지역의 확보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보은 일대를 삼년군(三年郡) 또는 삼년산군(三年山郡)으로 불렀기 때문에 성 이름이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烏項山城)으로, ?동국여지승람?과 ?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이 있다고 하여 오정산성(烏정山城)으로 기록하고 있다.
1980년 78월 22일 호우로 인하여 서문지 부분이 무너져 내리고 유구遺構가 드러나 발굴한 결과 성문에 사용했던 신방석信枋石과 주초석을 찾을 수 있었는데, 성문은 신라 상대와 후대에 축조되었으며, 상대문지의 문지방석에는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중심거리가 1.66m에 이르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볼 때 신라는 이 보은 지역의 확보를 토대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 뒤 이 삼년산성은 김헌창金憲昌의 난 때 주요 거점지로 이용되었다. 또한 918년에는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의 점령지인 이 성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도 이 성을 이용했다고 한다.“
세 가지 흰 것의 고장 상주
예로부터 ‘삼백’ 곧 ‘세 가지 흰 것’의 고장으로 불려왔던 상주에 삼백은 상주에서 나는 쌀과 목화 그리고 누에고치가 흰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방이후부터 상주의 명물이었던 목화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그 자리를 곶감이 빼앗기 시작한 것이었다. 곶감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는 사이 헐벗은 감나무들이 숲을 이룬 남장리를 벗어났고 남장 저수지 둑에 접어들면서 이태호 선생이 차를 세웠었다. “전라도 지역의 돌장승과는 또 다른 돌장승을 보고 갈까요”라는 이태호 선생의 말에 내린 우리들은 너무도 재미있게 생긴 돌장승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통 방울 같은 눈, 얼굴의 반쯤은 차지한 듯한 주먹코, 일자 입술 아래로 삐죽하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그 아래 턱 밑으로 익살스럽게 달린 수염, 어느 한 가지도 정돈되지 않고 제멋대로 만들어진 돌장승의 모습에 모두들 즐거운 어린 날의 동심으로 돌아갔었다.
이태호 선생은 실상사 초입의 장승과 비교를 하면서 “이렇게도 못생긴 장승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고 일행들은 “아니오”라고 대답했는데, 186cm의 키에 어울리지 않게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이 장승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돌장승의 몸체에는 ‘상원주장군’이라고 새겨져 있고, ‘임진 7월 입’이라고 새겨서 장승을 세운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까지 올라갈 것 같지는 않고,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의 2년 전 1892년이거나 1832년쯤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돌장승은 대다수의 민불이나 돌장승처럼 멀리서 보면 남근의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하다. 이 장승에 치성을 올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고 하며 원래의 위치는 남장사 일주문 근처였다고 하는데 저수지를 만들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못생긴 놈들은 서로 못생긴 얼굴만 보아도 즐겁다”는 말을 실감하며 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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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된 남장사
청정한 도량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고, 일심(一心)을 상징적으로 뜻하는 일주문을 벗어나며 숲길은 더욱 우거져있으며, 절로 향하는 길은 겨울 이른 아침 탓인지 텅 비어 있다. 가지에 남은 몇 개의 나뭇잎이 부는 바람에 사각거리고 어디선지 울어 제치는 새 한 마리, 길은 적막하다.
노악산 남쪽기슭에 운치 있는 아기자기한 암벽들을 배경삼아 울창한 숲속에 자리 잡은 신라고찰 남장사는 식산 이만돈(1664~1732)이 지은 <남장사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제42대 흥덕왕 7년(832년)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당나라에서 돌아오던 진감국사가 노악산에 머물면서 장백사를 창건하고 무량전을 지으면서 큰 절의 면모를 갖추었다는 기록이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문 중 실상사 진감국사의 비문에 실려 있다. 그 후 1186년(명종16) 각원국사가 지금의 터로 옮겨짓고, 절 이름을 남장사라고 바꾸었는데 이는 북장사北長寺, 갑장사 등 상주지역의 4장사 중의 하나로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1203년에 금당을 신축하였고 1473년에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탄 뒤 인조 13년 정수선사가 3창을 하였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다. 남장사는 불교가 융성하던 고려 때까지 번성하다가 조선초기의 숭유억불정책에 따라 사세가 약화되었다. 그 중에서도 태종은 배불정책을 과감하게 단행하여 궁중의 불사를 폐지하면서, 전국의 242개 사찰만 남겨둔 채 그 이외의 사찰은 폐지하였다. 동시에 그 절에 소속되었던 노비와 토지를 몰수 하였고, 왕사와 국사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11종의 종단을 7종으로 축소하였다. 그 후 연산군은 성 안팎의 사찰 23개를 헐어버리고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다가 문종 때에 이르러 문정왕후의 섭정에 힘입어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지만, 문정왕후 이후 탄압이 계속되었다.
근근이 사세를 이어가던 남장사는 임진왜란 때 빼어난 활약상을 펼친 사명대사가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그 당시 금당이었던 보광전에서 수련하면서 선종과 교종의 통합도량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1978년 7월 영산전의 후불탱화에서 주불(主佛)과 16나한상을 조각할 때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 4과와 칠보류들을 봉안했다는 기록과 함께 사리 4과 및 칠보류가 발견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절 건물들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영산전․보광전․금륜전․향로전․진영각․강당․일주문․불이문 등이 있고, 부속암자로는 관음전과 중궁암이 있다.
1668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관음전 안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모셔져 있는데, 관세음보살의 뒤편에 모신 후불탱화가 목각으로 되어 있다. 이 남장사 관음전의 목각 후불탱화는 예천 용문사 목각탱화와 함께 우리나라 목각 탱화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작품수준을 알려주는 17세기의 대표작이다. 특히 만들어진 연대가 1694년으로 분명하게 알려져 있는 귀한 작품이기 때문에 보물 923호로 지정되어 있다.「개금기」에 의하면 본래 이 관세음보살상과 후불 목각탱화는 천주산 북장사의 상련암에 있던 것을 19세기 초에 옮겨 왔다고 한다. 목각탱화에서 보살상들의 배치는 중앙에는 본존불과 그 좌우로 네 보살상이 배치되었고 그 주위는 2대 제자인 아난과 가섭 그리고 사천왕을 배열한 구도이다.
관음전의 후불탱화
하단의 연꽃에서 나온 연꽃가지가 본존불과 두 보살의 대좌를 이루어 삼존좌상을 나타내었고 이들 협시상 사이로는 구름을 표현하여 상단좌우에 구름을 타고 모여드는 타방불을 묘사하였다. 본존불은 두 손을 무릎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을 하고 있고 협시보살상들은 손에 연꽃가지를 잡거나 합장한 모습이다. 제자상들도 두 손으로 합장을 한 모습이다 또한 사천왕상은 조선시대 불화에 나타난 사천왕의 위치와 명칭을 따르고 있다. 왼쪽에는 칼을 든 지국천왕과 비파를 연주하는 다문천왕이 오른쪽에는 구슬과 용을 잡고 있는 증장천왕과 보탑과 창을 가지고 있는 광목천왕이 있는데 그들은 몸을 구부리거나 자유스러운 자세를 취함으로서 자연스러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처럼 자연스러움과 파격적인 면을 보임으로서 관음전의 목각탱화는 보광전의 목각탱화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악산으로 오르는 산길을 물은 다음 우리 일행은 본격적인 산행에 접아 들었다.
지난 가을 이 계곡을 1수놓았던 형형색색의 나뭇잎들은 이제 떨어져 자연으로 돌아가고 다시 나무들은 새로운 나뭇잎을 싹틔우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늙은 감나무들 또한 이봄이 지나고 다시 올 가을에는 자연의 순리로 붉은 홍시들을 주렁주렁 매달 것이다. 이 노악산은 작은 암봉 들과 숲이 수려하여 영남8경의 하나로 손꼽힌다고 알려져 있으며, 산이 매우 높아서 늘 안개가 끼어 침침하다고 하고, 연악(갑장산:806M), 석악(천봉산)과 함게 삼악의 하나로 꼽힌다고 하지만 의외로 산을 찾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산이다.
절 뒤쪽으로 난 산길에는 소나무들이 제법 울창하고 마른 냇가를 지나자 표지판이 눈에 띈다. 중궁암 2km 정상 3.5km 바라보면 중궁암으로 오르는 길을 따라 전신주들이 열 지어 서있고, 머얼리 정상이 보인다. 이 산 역시 만만하지는 않는 것 같다. 전북의 모악산만큼이나 될까. 그러나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가리라. 김현준 기자와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다 보니 산길은 팍팍하지 않고 어느새 중궁암에 닿아 댓돌위에 몸을 내려놓는다.
배낭을 열고 간식을 꺼내 놓는 사이 산 위쪽에서 스님이 내려오신다. 나는 스님에게 물었다. “이 산을 노음산이라고 부르는데 스님들은 어떻게 부르는 지요” 이에 스님은 “노음산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 보았습니다. 노악산 남장사, 노악산 중궁암이라고 부르지 어디 노음산이라고 부릅니까” 라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왜 한글학회에서 나온 한국지명총람에는 노악산과 노음산(露陰山)등 두 개가 표기되어 있고, 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은 곳에서는 노악산으로 기록하고 이곳 상주사람들은 노악산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지도나 몇 권의 책들에는 어찌하여 노음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의문 탓에 고개를 갸웃거리고 중궁암에서 바라보는 상주는 옅은 운무에 쌓여있고, 성냥갑처럼 쌓아올린 아파트 숲들은 부조화를 이루면서도 평온하기 이를 데 없다. 스님에게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고「입산통제」라고 새빨갛게 쓰여 진 통제 선을 넘어 능선 따라 난 산길에 접어든다.
산 저편의 능선 쪽으로 겨울나무들이 기립한 채 서 있는 것을 보며 소찬영선생이 내게 말한다. “등고선의 겨울나무들을 볼 때마다 여우의 등에 난 털들이 고추 선 것처럼 보이고 산등성이에 피어있는 진달래꽃을 볼 때면 어린 시절 너나 할 것 없이 번졌던 기계독 생각이 난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럴 듯싶다. 진달래 꽃들 뿐인가. 이 나라의 모든 산들 마다 이가 빠진 듯 보이는 곳들은 사람들의 무덤들이고 그것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효(孝)의 의미를 떠나 현대판 기계독 일지도 모르는데.
능선 길을 조금 오르자 바로 눈앞 건너편에 정상이 보이고 바로 옆에 전망대 바위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전망이 빼어난 바위가 있다.
노음산이 아니고 노악산이다.
「상주의 영산 노악산 725m 상주시 산악회」 라고 쓰여 진 표지 석을 보는 사이 바람이 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어느 때 누가 노악산을 노음산이라고 바꾸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때 다시 바람소리가 들렸다. 속삭이듯 들리던 그 소리는 “이산은 노음산이 아니고 노악산입니다.” 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정상에서의 조망은 그렇게 좋지 않다. 간간히 소나무와 섞여 있는 잡목들이 우거져 있는 정상을 지나 하산 길에 접어들자. 나타나는 ”암벽 길“ 아래를 굽어보자 기암괴석에 잘생긴 분재용 소나무가 새초롬하게 서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모진 비바람 눈보라 맞으며 서 있었으면 저렇듯 구부러질대로 구부러졌을까? 철사다리와 밧줄에 의지하여 암벽의 군락지대를 내려서는 산길은 가파르다. 떨어져 발에 밟히는 나뭇잎들을 바라보며 나는 사도 바울의 말을 떠올린다. ”나는 매일 죽노라“ 그렇다 나도 이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이 나뭇잎처럼 매일 죽고 매일 다시 태어날 것이다. 햄릿의 독백 처럼 ”잠을 잔다. 그러면 꿈을 꾸리라.“ 그리고 다시 깨어나고 다시 잠이 드는 그 매일 매일의 되풀이처럼 우리들의 삶 자체가 죽고 사는 한편의 연극 같은 것이고 우리는 무대를 한번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가 아닐까?
헬기장을 지나 길 없는 능선 길로 해서 도착한 북장사에는 행사 때 지었던 철근구조물을 뜯어내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남쪽에 남장사, 북쪽에 북장사를 안고 있는 이산을 남장사 쪽에서는 노악산 남장사라고 부르고 북장사쪽에서는 천주산 북장사라고 부르고 있다.
북장사는 현재 낡고 퇴락한 요사 채와 새로 지은 대웅전과 명부전 그리고 산신각만 남아 있어 바라보기가 안쓰러운 절이지만 이 절은 신라 흥덕왕 8년(833)에 진감국사가 남장사를 창건하고서 이절을 창건하였다는 사적기를 지니고 있는 신라의 고찰이다.
「북장사 사적기」에는 이 절이 있는 산의 이름을 천주산이라고 기록한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쪽에는 남장사 북쪽에는 북장사
“산 위에 수미굴이 있고, 그 가운데에 저절로 생긴 돌기둥이 있는데 아래는 좁고 위는 넓어서 마치 하늘을 괴어 받친 기둥처럼 보일뿐만 아니라 교태스럽고 괴이한 모습으로 입을 벌리고 서 잇는 모습이다. 또한 구름과 안개를 마시기도 하고 토하기도 하기 때문에 천주산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이 산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는데, 옛 절터의 기왓장에서 천주산이라는 명문(銘文)이 출토되어 옛부터 명명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창건이후 이 절은 수미암, 상련암, 은선암 등의 부속암자를 가진 나라에 이름난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인하여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2년)에 이곳에 온 중국의 승려 10여명이 중건하였으며 그 뒤 많은 승려들이 모여 수행에 정진하였다. 1650년에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고 서묵, 충문, 진일 등의 스님들이 중건하였고,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사연이 있는 절일뿐만 아니라 먼 곳에서 바라보면 기암괴석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산세가 좋은 노악산 자락에 북쪽에 자리 잡은 북장사는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다른 절에 비해 알려져 있지 않아 찾는 이가 드물다.“<신정일의 사찰기행>에서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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