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라는 것이 그렇다. 예약이 생활화 되어야 하는데,
그저 괜찮으려니 하는 마음을 가지고 넋 놓고 있다가
막상 표를 끊으려고 매표소 앞에서 행선지를 말하면
“오래 전에 매진되었는데요?“
그때의 낭패감, 7시 40분차를 타고서 푹 쉬고 오리라던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행선지를 다시 수정해야 했다.
대전 발 7시 20분차를 타고 도착해서 10시 30분차를 타고 도착한 시간 열두시다.
이 모든 것이 예약이 생활화 되지 않은 나의 불찰이리라.
책상 앞에 앉으니 경주에서 보낸 시간이 봄날의 꿈과 같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양동마을을 답사하고 찾아간 정혜사지, 나는 정혜사지 13층 탑 앞에만 서면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사람을 만난 듯 가슴부터 아련해진다.
도덕산 자락에 위치한 정혜사지(定慧寺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불국사 다보탑과 화엄사 4사자 석탑과 함께 대표적인 이형 석탑인 정혜사 13층 석탑만이 남아있다.
하서 김인후가 그의 시속에서 “해당화가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동백꽃이 차가운 얼음 속에 오연하다.”라고 노래했던 그 시절은 과연 어느 세월이었던가? 이 절 정헤사는 경주의 역사와 지리지를 정리한「동경잡기」에 의하면 신라시대의 절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선덕여왕 1년에 당나라의 참의사인 백우경이 참소를 입고 이곳에 와 암자를 짓고 살던 중 선덕여왕이 이 절에 와서 행차한 후 정혜사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벼슬길에서 물러난 회재는 이 절에서 실의의 시절을 보내던 중 스님들과 사귀었고 그가 죽은 뒤 옥산서원이 세워진 후에는 정혜사가 편입되었다. 그러나 1834년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이 절은 사라지고 탑만 남아있게 되었지만 이 탑 또한 1911년 도굴로 인해 내려졌던 탑재들을 잃어버린 채 10층탑으로 서있을 뿐이다.
정혜사 바로 아랫자락에 회재 이언적이 7년 동안 은거했던 사랑채 독락당은 보물 413호로 지정되어 있다. 독락당은 회재가 낙향한 이듬해인 1532년에 지어진 건물로서 독락당과 계곡 사이에는 담장이 있고 그 담장의 한 부분을 헐어내고 살창을 설치하여 독락당 대청에서 자계 계곡과 흐르는 냇물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독락당 건물 내에 계정이라 이름붙인 아름다운 정자 한 채가 있다. 난간에 기대어 보면 자옥산과 자계 계곡이 한데 어우러져 모두 하나가 된다. 우리가 계곡 아래로 내려가 계정을 바라볼 때 냇물 위에는 지난해 떨어진 나뭇잎들이 꽃잎처럼 떠있었다. 1688년에 저 계정에 올랐던 정시한은 이곳의 풍경을 아래와 같이 읊었다.
“정자는 솔숲 사이 너럭바위 위에 있는데 고요하고 깨끗하며 그윽하고 빼어나 거의 티끌 세상에 있지 않은 듯하다. 정자에 올라 난간에 의지하여 계곡을 바라보니 못물은 맑고 깊으며 소나무, 대나무가 주위를 감쌌다. 관어대(觀魚臺), 영귀대(詠歸臺) 등은 평평하고 널찍하며 반듯반듯 층을 이루어 하늘의 조화로 이루어졌것만 마치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 집과 방은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아 계곡과 산에 잘 어울린다.”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린 마을길을 지나 도착한 옥산서원은 다른 때와 달리 고즈넉하다.
옥산서원(玉山書院) 앞을 흐르는 자계천의 물소리는 맑고 청아했다. 층층을 이룬 반석 사이로 작은 폭포가 있고 그 가운데로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느티나무, 회나무, 참나무, 벗 나무들에 휩싸인 옥산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이 나타난다. ‘논어’의 첫머리에 “배워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있어 멀리로부터 찾아오면 또한 기쁘지 아니 한가 남들이 나의 학문을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치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선조 때 학자였던 노수신이 지은 것이다. 24살에 문과에 급제한 회재는 벼슬길에 올라 요직을 두루 거치며 조선 성리학의 큰 틀을 세웠다. 화담 서경덕과 쌍벽을 이룬 이언적의 학문은 주희의 주리론 적 입장을 확립하였으며 퇴계의 성리학 연구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을사사화 이후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 좌천되어 이곳 자옥산 기슭에 은둔하여 성리학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던 영남의 사림들이 그가 은둔하였던 이곳에 서원을 짓고 1574년에 옥산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정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누각 건물인 무변루無邊樓는 명필 한석봉韓石峯이 썼다. 뜻은 “모자람도 남음도 없고 끝도 시작도 없도다. 빛이여! 밝음이여! 태허에 노닐도다.”이며 구인당 정면에 걸려있는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에 쓴 글씨이다.
다시 이어진 흥덕왕릉과 구미산의 용담정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한 채 오고 가는 나그네들을 맞고 있었다.
하루의 여정을 돌아다보는 시간 주위는 적막강산이고 이제 잠을 창할 시간, 이렇게 가고 오는 것이 삶이로구나.
계사년 시월 스무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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