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겨울 부석사와 봉화의 닭실마을을 거닐다.

산중산담 2014. 1. 30. 12:17

겨울 부석사와 봉화의 닭실마을을 거닐다.

 

갑오년 1월 넷째 주 토요일인 25일에 겨울 부석사를 찾아갑니다. 나라 안에서 제일 아름다운 절 부석사와 나라 안에 양택 중의 제일이라는 봉화의 닭실마과 영주의 무섬 마을 일대를 거닐 계획입니다.

황동규의 시 <겨울의 빛>에 묘사된 부석사는 언제나 가도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절입니다.

고즈넉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부석사와 총암정, 그리고 닭실마을은 어떤 풍경을 보여줄 것인지,

 

“이중환은 이어서 ‘옛 말에 이르기를“천하의 명산을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는 까닭에 무릇 이 열두 곳의 명산을 모두 사찰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이름난 절 때문에 그 지역이 세상에 알려지고 기이한 흔적과 이상한 경치가 있는 곳이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있는 신라의 고찰 부석사浮石寺가 그런 절이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가로 질러 서 있고, 그 위에 또 하나의 큰 돌이 지붕을 덮어놓은 듯하다. 언뜻 보면 위아래가 서로 붙은 듯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두 돌 사이가 서로 서로 이어져 있지도 않고 눌리지도 않았다. 약간의 틈이 있으므로 노끈을 집어넣으면 거침없이 드나들어, 그것으로 비로소 돌이 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절이 이 돌 때문에 이름을 얻었는데, 그렇게 떠 있는 이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절 문밖에 덩어리가 된 생 모래가 있는데, 예로부터 부서지지도 않고, 깎아버리면 다시 솟아나서 새롭게 돋아나는 흙덩이와 같다. 신라 때 승려 의상대사義湘가 도를 깨닫고 장차 서역의 천축국으로 떠나기 전에, 거처하던 방문 앞 처마 밑에다 지팡이를 꽂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여기를 떠난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살아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은 줄 알아라.”의상이 떠난 뒤에 절 스님은 그가 살던 곳으로 가서 의상을 초상肖像을 만들어서 안치하였다.

창 밖에 있던 지팡이에서 곧 가지와 잎이 나왔는데, 햇빛과 달빛은 이것을 비치지만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았으며. 항상 지붕 밑에 있으면서도 지붕을 뚫지 않았다. 겨우 한 길 남짓한 채로 천년을 하루같이 살아 있다.

광해군 때 경상감사였던 정조鄭造가 이 절에 이르러 이 나무를 보고서 “선인이 지팡이 삼던 나무로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하고 명령을 내려 톱으로 잘라서 갔다. 그러자 곧 두 줄기가 다시 뻗어 전과 같이 자랐다. 그 때 나무를 베어갔던 정조는 인조 계해년(1623)에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지만 나무는 지금까지 사시사철에 푸르며, 또 잎이 피거나 떨어지는 것이 없기 때문에, 스님들은 비선화수飛仙花樹라고 부른다. 옛날에 퇴계선생이 이 나무를 두고 읊은 시가 있다.

 

옥과 같이 아름다운 이 가람의 문에 기대어,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지팡이가 변하여 신령스러운 나무가 되었다 한다.

지팡이 꼭지에 스스로 조계수가 있는가,

하늘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빌지 않는구나.

 

절 뒤편에 있는 취원루聚遠樓는 크고 넓어서, 높은 것이 하늘과 땅 가운데 우뚝 솟은 듯 하고, 기세와 정신이 경상도 전체를 위압하는 것 같다. 벽 위에는 퇴계의 시를 새긴 현판이 있다.

내가 계묘년(1723) 가을에 승지承旨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태백산을 놀러갔다가 이 절에 들어가, 드디어 퇴계의 시에 차운次韻하였다.

 

까마득하게 높은 누각 열두 난간 위에,

동남쪽 천 리 지역이 눈앞에 보이도다.

인간 세상은 까마득한 신라국인데,

하늘 아래는 깊고 깊은 태백산이로다.

가을 골짜기에 어두운 연기는 나는 새 너머에 일고,

바다에 남은 노을은 흩어진 구름 끝에 비친다.

가도 가도 위쪽의 절에는 닿지 못하니,

예부터 행로行路의 어려움을 어찌 알소냐.

 

다시 또한 수를 더 지었다.

 

태백산은 아득히 하늘과 통하고,

옛 절은 웅대하게 왼쪽의 바다 동쪽에 열렸구나..

강과 산들이 멀리 천 리 밖에서 만나고,

불전과 누각은 날아갈 듯이 천지 사이에 솟았네.

고승이 거처를 떠났는데 꽃이 나무에 피고,

옛 나라야 흥했거나 망했거나 새는 빈 하늘을 지나가네.

누가 알랴. 머뭇거리는 주남周南 나그네의,

뜬구름, 지는 해에 하염없는 뜻을.

 

취원루 위 깊숙한 한쪽 구석에 방을 만들고서, 그 안에는 신라 때부터 이 절에서 사리가 나온 이름난 스님의 화상畵像 10여 폭이 걸려 있다. 모두 얼굴 모습이 고아하고 괴이하게 생겼으며 풍채가 맑고 깨끗하여 엄연히 당시의 다락집 위에서 서로 대좌하여 선정에 들어간 것 같다. 지세가 꾸불꾸불하게 뻗어 내려간, 그 곳에 있는 작은 암자들은 불경을 강론하고 선정에 들어가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이라고 한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부석사가 자리잡은 봉황산은 충청북도와 경상북도를 경계로 한 백두대간의 길목에 자리잡은 산으로 서남쪽으로 선달산, 형제봉, 국망봉, 연화봉, 도솔봉으로 이어진다. 부석사 무량수전 위쪽에 서 있는 3층석탑에서 바라보면 소백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일주문을 지나면 마치 호위병처럼 양 옆에 서 있는 은행나무와 사과나무가 서 있고, 당간지주를 지나고 천왕문을 나서면 9세기쯤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석단과 마주치고 계단을 올라가면 범종루에 이른다.

범종루 아래를 통과하면 안양루가 나타나는데, 안양루의 안양(安養)은 극락의 또 다른 이름이다. 안양루를 지나면 극락인 셈이다.

안양루 밑으로 계단을 오르면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중 가장 우수한 석등인 부석사 석등(국보 제 17호)이 눈앞에 나타나고 그 뒤로 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축인 무량수전이 있다. 1916년 해체․수리할 때에 발견한 서북쪽 귀공포의 묵서에 따르면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왜구의 침노로 건물이 불타서 1376년에 중창주인 원응국사가 고쳐지었다고 한다. 무량수전은 ‘중창’ 곧 다시 지었다기보다는 ‘중수’ 즉 고쳐지었다고 보는 것이 건축사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이다. 원래 있던 건물이 중수연대보다 100~150년 앞서 지어진 것으로 본다면 1363년에 중수한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 15호)과 나이를 다투니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아도 지나치지 않겠다. 이 같은 건축사적 의미나 건축물로서의 아름다움 때문에 무량수전은 국보 제 18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극락을 주재하는 부처인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흙을 빚어 만든 소조상이며, 고려시대의 소조불로는 가장 규모가 큰 2.78m의 아미타여래조상은 국보 제 4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무량수전의 동쪽 높다란 곳에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한참 오르면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은 국보 제 19호로 의상스님을 모신 곳으로 1366년 원응국사가 중창 불사할 때 다시 세운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인 이 건물은 단순하여서 간결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데, 조사당 앞에 의상스님의 흔적이 남아있는 본래 이름이 골담초인 선비화가 있다.

의상스님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으면서 “싱싱하고 시들음을 보고 나의 생사를 알라”고 했다는 선비화를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스님들은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어 비선화수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그 나무가 지금의 나무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사람들의 손길이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철망 속에 갇힌 채 꽃을 피우고 그 철망 안에는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들이 나 뒹굴고 있을 뿐이다.

한편 『택리지』에 나오는 취원루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순흥읍지』에 의하면 무량수전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 북쪽에 장향대, 동쪽에는 상승당이 있었다고 하고, 취원루에 올라서 바라보면 남쪽으로 300리를 볼 수가 있다고 하며 안양 문 앞에 법당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주문에서 1리쯤 아래쪽으로 내려간 곳에 영지가 있어서 ‘절의 누각이 모두 그 연못 위에 거꾸로 비친다.’고 하였다. 물에 비친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상상해보는 것만도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150여년의 세월 저쪽에 있었다는 영지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으니 그 또한 애석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금닭이 알을 품는 형국의 닭실마을

이중환이 “안동의 북쪽에 있는 내성촌에는 곧 이상(貳相: 두번째 재상이라는 뜻으로 정1품 삼정승 다음의 종1품인 좌찬성과 우찬성) 권발(權撥)이 살던 옛터인 청암정이 있다. 그 정자는 못의 한복판 큰 바위 위에 위치하여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둘러싸듯 흐르므로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기록한 내성촌은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있다.

이곳 닭실(酉谷)마을은 유명한 양반의 성씨인 안동권씨 중에서도 충재(冲齋) 권벌(權橃)을 중심으로 일가를 이룬 동족마을이다.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즉 ‘금닭이 알을 품은 모양’의 명당이라는 닭실마을은 동북쪽으로 문수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서남으로는 백운령이 뻗어 내려 암탉이 알을 품은 형상이며, 동남으로는 신선이 옥퉁소를 불었다는 옥적봉이 수탉이 활개 치는 모습으로 자리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벌은 1496년 진사에 합격하고 1507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연산군의 폭정하에서 급제가 취소되었다가 3년 뒤인 1507년에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였다. 사간원, 사헌부 등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는데 1519년 훈구파가 사림파를 몰아낸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 당하자 귀향하였다.

그는 파직 이후 15년간 고향인 유곡에서 지냈으나, 1533년에 복직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고 1539년에는 병조참판, 그 해 6월에는 한성부판윤 그리고 1545년에는 의정부 우찬성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 등을 적극 구명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파직되었고,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하였고 조광조, 김정국과 함께 개혁정치에 영남 사람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 후 1567년에 신원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좌의정에, 선조 24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닭실마을에 남아있는 유적들은 기묘사화로 파직되었던 동안 머물면서 일군 자취들이며 현재 사적 및 명승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권벌 종택의 서쪽 쪽문 뒤의 건물이 청암정이다. 권벌이 1526년 봄 집의 서쪽에 재사를 지으면서 그 옆에 있는 바위 위에다 정자도 함께 지었던 것이다. 커다랗고 널찍한 거북 바위 위에 올려지은 J자형 건물인 청암정은 휴식을 위한 것으로서 6칸으로 트인 마루 옆에 2칸짜리 마루방을 만들고 건물을 빙 둘러서 연못을 함께 조성하였다.

이 청암정에는 퇴계 선생이 65세 무렵에 방문하여 남긴 한시 한편이 있다.

 

내가 알기로는 공이 깊은 뜻을 품었는데

좋고 나쁜 운수가 번개처럼 지나가버렸네.

지금 정자가 기이한 바위 위에 서 있는데

못에서 피고 있는 연꽃은 옛 모습일세.

가득하게 보이는 연하는 본래 즐거움이요

뜰에 자란 아름다운 난초가 남긴 바람이 향기로워

나같이 못난 사람으로 공의 거둬줌을 힘입어서

흰머리 날리며 글을 읽으니 그 회포 한이 없어라.

 

한편, 권벌의 집 부근에는 창평천과 기계천이 합류하는 합수머리가 있다. 거기서 조금 떨어져 있 울창한 소나무 숲이 나타나고 그 앞을 흐르는 창류벽에는 권벌의 아들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가 세워져 있다. 오래 묵은 소나무들이 항시 물가에 그늘을 드리운 채 줄지어 서 있고 매끄러운 반석 위로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서

 

겨울의 한 복판에서 만나는 겨울산사와 내성천의 해맑은 분위기, 그리고 아름다운 정자 인 청암정과 명당중의 명당 분위기를 느끼고 싶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1. 일시: 2014년 1월 25일(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