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백두대간 산행기

백두대간4기팀 고남산구간 : 조선건국의 신화와 함께 대간길을 마감, 의미를 더하다

산중산담 2014. 3. 21. 11:12

 

3450온누리 산악회  백두대간 4기 졸업산행 사치재에서 여원재까지 (남진)

 

언제 갑오년  물오름달 스물하루 쇠날 ~ 스물이틀 흙날 (무박)

누구랑 : 물아래 대장님과 백두대간 4기 산우님들

어딜 : 사치재 ~ 유치재 ~ 고남산 ~ 여원재

               산행거리  : 낙동정맥 13.9 km  

 

 

백두대간은 우리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의 중심부를 지나는 산줄기로 태백산에 이르러 해안선을 따라 낙동정맥을 보내고

남으로 뻗어가는 산줄기는 소백산.속리산.덕유산을 연 이여 낳으며

지리산에 이르러 脈을 다하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리서 산경표에서는 이름하여 "백두대간"이라 칭하였다.

백두대간의 총 거리는1.658.6m(백두산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거리)이고

향로봉에서 천왕봉까지 남한구간의 백두대간의 거리는 695.2km이다.(신산경표 자료인용)

아직 통일이 요원한 상태에서 언제 백두산까지 이어갈지 마음 아픈 현실이지만

남한구간을 한구간 한구간 이어온 4기 종주대원님들의 마지막 산행 축하를 위해 길을 떠나 본다

 

37차 마지막 구간 등로

 

 

산행기 주 자료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9210 에 있습니다

 

88올림픽고속국도 확장공사 관계로 마루금을 벗어나 지리산 휴게소에서 출발한다

 

어둠속에서도 3백년 노송은 경건함과 숙연함을 더욱 짙게 간직하고 서 있다 - 사진으로는?

 

사치재는 모래재이므로 다 아실테이고... 출발준비 - 마지막이라는 설레임은 숨길 수 없다

 

확장공사 현장을 지나 산속으로 진입한다

 

대간 마루금과 합류하고

 

오솔길 같은 길을 계속 따르면 도로와 만나고 바로 유치재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를 만나게 된다

[유치재] 버드나무고개 2차선 포장도로

매요리와 가산리의 중간, 사치마을과 연결되는 삼거리다. 인근의 마을은 모두 남원이지만 유치재 자체는 장수군 지역이다.

유치재를 매요마을 서쪽의 언덕으로 표시한 지도는 착오다. '흐름고개', 즉 경사가 거의 없는 고개라는 의미다.  

 

우틀하면 사치마을,  대간길은 계속 직진

 

대간꾼들에게 많은 추억을 안겨주고 있는 매요휴게실

 

매요마을 회관 앞에서 좌틀

[매요마을]

이 마을은 원래 풍수설에 의하면 옛부터 말의 허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마(馬)자와 허리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고승 유정대사(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여 매화는 눈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는 꽃이며 향기가 순결하여

이 마을에서 낳은 사람들은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니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지형과 인심에 합당하다고 한 후에

마을 이름을 지금의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돌담이 있는 삼거리에서 좌츨하면 바로 산속으로 진입하는 띠지가 보인다

 

어느새 4기팀의 졸업산행을 축하하기 위해 이슬을 머금고 떠오르는 해도 오늘따라 수즙움을 더합니다  - 완산님 작품

 

통안재 직전 전망이 나오면서 고남산이 보이고

 

통안재에서 식후경

[통안재] 작은 독골재. 670m.

권포에서 산동 월석리 독골로 넘어가는 고개. 독골재에 비하여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란 의미. 동리 안 고개.

 

 

이제 뭐 있습니까? 마지막인데... 커피 한잔의 여유.... 마음껏 즐기십시요 고생하신 4기팀 홧팅 - 완산님 작품

 

오랫만에 맛본 편안한 식후경, 이제 떠날 준비를 합니다.  - 완산님 작품

 

소나무 숲이 너무 아름다운 구간이다

 

중계탑으로 바로 오르지 않고 내려오다 산속으로 진입해야 한다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고남산 표지석에서 단체사진 - 칠갑산님 작품

 

여산우님들의 힘, 역시 여심은 봄의 향기에 먼저 귀를 기울인다, 표정 하나하나에서 느낄 수 있음이...  완산님 작품

 

최고의 전망을 선사하는 고남산, 앞쪽으로 멀리 우뚝 솟은 반야봉과 앞쪾으로 서부능선이 이어지고 있다

 

권포리 방향으로 가운데 아담하게 솟아 있는 황산대첩의 격전지였던 황산을 담아 본다

황산 荒山 697m

예전부터 운봉은 교통의 요충지로 중요한 지역이었는데, 특히 황산은 외적을 막았던 길목이었다

황산대첩이라는 명칭과 피바위라는 전설이 남아 있다.

 

좌측으로 보이는 아담한 산이 황산이다 - 칠갑산님 작품

황산대첩(荒山大捷)

1380년(우왕 6) 9월에 이성계(李成桂)등이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荒山:黃山)에서 왜구에게 크게 이긴 전투.

이성계의 황산대첩은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토벌의일대 전기를 마련한 것이며,

그뒤부터 왜구의 세력은 약화되고 고려의 왜구대책은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

1577년(선조 10)에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황산대첩비가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화수리에 세워졌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어서 파편만 남은 것을 1977년에 복원하였다.

 

이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고남산 정상 - 산불삼시초소 지킴이신 어르신께 많은 것을 배웁니다

[고남산 古南山] 846.4m

정확한 유래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태조봉, 제왕봉으로 불리워진 것을 보면 태조 이성계가 고려 말 왜구를 무찌를 때 이곳에 제단을 쌓아 제를 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이성계가 황산벌 대첩을 하기 전, 멀리 운봉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출정했다고 한다.

 

멀리 금남호남정맥인 좌측으로 팔공산과 우측으로 장안산이 희미하게 조망된다

 

고남산 정상에 오르면 바로 앞에 산동면 방향으로 펼쳐지는 산이 청황산이다  - 좌측이 천황산, 우측이 대성산(대성마을)

 

지리산 서부능선의 바래봉과 좌측 멀리 장수의 장안산

 

가야할 수정봉과 앞에 여원재

 

역시 대간을 완주하신 산우님들이라 마루금에 대한 상식이 손짓에서 나옵니다. 산줄기만 봐도 척척 - 완산님 작품

 

 

물아래 대장님 주윤발 대장님 수고했습니다 - 오늘의 미소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일 것입니다. 그 미소 고루 나눠주시 것도 잊지 마시길...

 

남원시를 조망하면서 하산은 시작되고

 

상투바위를 배경으로 프리지아님 - 짱아 대장님 작품

 

마루금이 좌틀하면서 들리지 못한 작상봉? - 칠갑산님 작품

 

권포리 방향도 조망하고

고남산 아래에 주둔할 때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 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 마을은 권세가 하늘에 닿도록 끊임이 없다 하여 권포리(權布里)라 하였다.

 

여원재 이전 합미성이 있는 562봉 -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합민성] 641m.

합민성(장교산성, 할미성, 합미성, 방학산성)은 남원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성으로, 기록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때 운봉 민보군의 거점이었다고 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때 쌀을 저장해 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린다.또한 남원시 이백면 주민들은 방학산성이라 부른다.

성곽은 능선을 따라 서남 방향으로 누에고치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주위는 319.6m이라는데 시간이 없어 확인하지 못했다

 

이제 장교리 마을이 보인다

장교리 長橋里

이성계와 관련있는 지명이 많은데 권포리에 이어 이 곳 장교리도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여원치에서 고남산 초입에 있는 마을을 이성계를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지세를 보고

고남산의 산줄기가 이 마을 까지 뻗어 내린 모습이 마치 긴 다리를 이어 놓은 것 같다하여 장교리라 지었다고 한다

 

이제는 잠시 쉬는 모습도 품격이 다르게 보입니다. 대간길 아무나 가나 !! - 완산님 작품

 

끝 마무리가 중요함을 잘 아시는 산우님들, 돌다리도 두드리는 심정으로 천천히...   은비령 총무님 고생했습니다  - 완산님 작품

 

장치 - 앞의 마루금을 포기하고 이정표를 따릅니다

 

장동마을이 보이면서 바로 다시 산가장자리를 이어간다

[장치(장동마을)] 방아치

예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노루장(獐)의 장동(獐洞)이 되었다.

이 마을의 이름을 딴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고개이다.

 

다시 마루금과 만나 숲속으로

 

봄을 준비하는 밭길 사이를 걸으면서 다시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하는 산우님들 행복하게 보여 좋습니다 - 완산님 작품

 

만세 ! 아마 오늘처럼 기쁜 날이 있을까요? 마음껏 즐기시길...  완산님 작품

 

마루금을 따르지 못하고 마을길을 내려와 도로를 따라 여원재까지 올라 갑니다 - 여원치 마애불 이정표도 만나고

 

가지 못한 아쉬움? 유흥준의 답사기에도 나오는데... 늦게 내려온 탓에 자료로 만족    자료 : http://cafe.naver.com/ddosan/2772

 

여원재

여원재

[여원재] 남원시 운봉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한다. 고개 서편으로 평원을 이룬 구릉이 운봉면이다.

섬진강 상류가 되고 섬진지류는 남원 시가지를 거처 광양만으로 빠진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계속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들머리

왜구는 여원치에서 주막으로 생계를 잇는 여인을 희롱했다. 여인은 왜구의 손길이 닿은 가슴을 스스로 도려내고 죽음을 택했다.

여인은 후일 산신으로 부활해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성계를 도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힘을 보태기도 했단다

왜장 아지발도를 무너뜨린 이성계가 돌아가는 길에 여원(女院)이란 사당을 지어놓아 이 고개 이름이 여원재가 되었다는 것.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 부른다.

올라오다 이정표에 보였던 마애불은 왼쪽 가슴이 없는 마애불이라고 하는데, 전설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유적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1894년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

농민군의 옷이 모두 희고 무기는 죽창이어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고 했던 김개남이 이끌던 농민군들

공주회전에 참여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으려고 하였지만 방아치와 관음치 전투에서 모두 패해 넘지 못한 한이 남아 있는 고개이다.

김개남이 이끌던 농민군들이 고개를 넘었다면 상황이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때의 척야척왜의 기치가 지금도 진행형?

 

복, 복 받을 준비하는 만큼 받으시고, 또 받은 만큼 배풀 수 있는 4기 대간 산우님들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완산님 작품

 

종산재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내일을 준비합니다.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더 기다려 집니다. 4기 산우님들의 활동이 - 완산님 작품

 

여러분이 걸어온 길, 지금 이 순간 아마 가장 많은 사진들이 스쳐지나 갔으리라 생각됩니다. 추억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이 순간을 위해 많은 세월을 참고 어렵게 진행했슴을 잘 압니다. 무사 완주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었으리라 믿습니다 - 완산님 작품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여러분이 오늘의 주인공이시며 내일의 진정한 산꾼이 되었음을 축하 합니다 - 완산님 작품

 

산에서는 산신령이, 또 다른 축 안전 산행의 출발과 끝을 책임지어 주신 수송대장님 고맙습니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뒷풀이로 남원 광한루에 있는 광성식당

 

마지막 마음껏 즐기시길

 

이렇게 길고 길었던 대간길의 여정도 소주한잔에 담아 마신다

그리고 끝을 알린다. 아쉬움 반 기쁨 반...

 

우리는 물처럼 흘러가는 산줄기의 흐름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봅니다

거기에 그날 그날 하루도 똑 같은 모습보다는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강산의 아름다움도

도시에서 생각하고 바라보는 농촌의 풍경보다도

산위에서 보는 농촌의 들녘과 강촌의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백두대간과 같은 큰 줄기를 이어간 산우님들이라면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으리라 생각됩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흐르고 있고 또한 산줄기에 같이 호흡하며 살아가는

자연의 모든 풍경들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사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모든 것을 흐름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지혜가

백두산이라는 큰산을 시작으로 물흐르 듯 줄기차게 뻗어나온 산줄기를 보고

백두대간이라 칭했다고 봅니다

 

백두대간 4기 산우님들이 계속 이어온 그 자리에 산우님들의 추억만큼이나

또 다른 길손들의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지금도 계속 물결처럼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산줄기를 만나면서 4기 산우님들이 남긴 족적이 또 다른 산우님들에게 희망을 주고

산줄기에 기대어 살고 있는 우리 이웃들을 만나면서 느꼈을 똑 같은 마음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거기에 물줄기가 산줄기 사이사이에 계곡을 형성하여  4대강이라는 큰 강의 근원을 이루며

여러분이 지나온 길에 지금도 말없는 흐름으로 한반도라는 큰 그림을 그려놓아

우리가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있는 근원을 만들어 준 고마운 백두대간을 완주하신

4기 산우님들이 그래서 더 소중하고 고마운 것입니다

정말 큰일을 이루신 산우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3기 대장이신 금비령 대장님과 오랬만에 만나 시절인연이란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질기게 이어 갈 것 같던 이런 인연도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아마 그리움이라는 말이 더 앞서가는 인연으로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흘러갈 것입니다

질긴 인연이 감을 서러워 하거나 그리워 할 것 없는

또 다른 질긴 인연을 이어가라는 속 깊은 의미가 달려 있는 말이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 백두대간이란 큰 줄기를 이어갔기에

또 다른 미지의 길이나 또 이미 지나 온 길이더라도 다시 보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끝없는 길에서의 만남을 위해

또 다른 시절인연을 찾아 갈 수 있는 첫 출발의 의미도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이 초보산꾼이 3기 대간을 끝마치고 또 다른 인연들을 만나 이렇게 흘러 왔듯이...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을 위한 준비이기도 합니다

백두대간 5기에도 계속 이어가실 분도 또 다른 산우님들과의 만남에 마음이 설레일 것이고

또 다른 목표를 향해 준비하고 계신 산우님들에게도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시절인연은 그렇게 조용히 다시 다가 올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큰 줄기를 이어온 만큼 큰 마음 열린 마음으로 인연을 준비하고

인연을 소중히 할 수 있는 마음을 대간길에서 배웠을 것이라는 믿음을 믿고 싶습니다

변화된 모습으로 3450온누리 산악회 회원님들의 도반이 되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사실 단 한번도 함께 하지 못한 이 초보산꾼이

마지막 대간길을 함께 했다고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좀 우습기도 하고

또 글을 올려야 하는가 하는 두러움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슬픔은 나눌 수록 가벼워지고 기쁨은 축하 할 수록 몇배로 더 커진다는 선조들의 말씀을 믿고

올리는 글이니 혹여 기분이 상하신 산우님들이 계신다면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물아래 대장님 그리고 은비령총무님 무사 완주할 수 있는 믿거름이 되어 주심에 감사하고

주윤발 대장님 이하 모든 4기 대간을 함께 하신 산우님들의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대간을 완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는 나이기에

그저 고맙다는 말 이외에 무슨 말이 필요 할까요

 

다시 한번 긴 여정을 마치고 또 다른 여정을 준비하시는

4기 대간 종주 대원 산우님들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초보산꾼  도   덕산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