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백두대간 산행기

39차 백두대간 한계령에서 조침령 - 우중의 대간길, 아쉬움의 표현인가?

산중산담 2012. 7. 16. 00:15

 

3450온누리 산악회  백두대간 3기 39차 한계령에서 조침령까지

 

언제 : 임진년 견우직녀달  열닷새 흙날 23시 ~ 해날

누구랑 : 대간3기 산우님들          

어딜 :   힌계령에서 조침령까지 남진 (산행시간은 사진속에 있습니다)

 

 

 

 

 

견우직녀가 만나는 아름다운 견우직녀달 7월, 우리는 또 하나의 대간산행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가 하나를 끝내면 그만큼 우리가 가야할 길이 줄어듬을 의미하고, 우리가 헤여져햐 하는 시간이 가까워짐을 실감하게 된다.

대간3기 산우님들이 대간산행에 쏟아 부은 정열이 끝나감을 아쉬어 하는 듯 장마의 비까지 강원도의 여름밤을 적셔 주고 있었다.

界령인지 限界령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우리는 누구나 갖고 있을 각자마다의 恨을 보듬기 위해 한계령(寒溪嶺, 1004m)으로 향한다

 

한계령 휴게소에서 준비하고

한계령(寒溪嶺, 1004m)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 기린면과 양양군 서면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백두대간의 설악산(雪嶽山, 1708m)과 점봉산(點鳳山, 1424m) 사이의 안부(鞍部)에 있다

 

한계령휴게소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한계령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인제의 역사속에는 신라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우리가 대간길의 곳곳에서 마의태자의 흔적을 만나 왔는데,

그가 왕건에 쫓겨 망국의 한을 등지고 하늘재를 넘으며 누이 덕주공주와의 슬픈역사 이야기를 남기고,

국망봉을 넘으며 망한 나라의 수도를 바라보며 눈물 흘렸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깊은 땅 한계령에 이르러 살았다는 이야기 또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양양방향으로 조금 내려와 오늘의 산행은 시작되는데 - 출입통제 구간이다

 

 

이렇게 철조망을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벽이 나타나고

 

이제 본격적인 암벽인가?

 

이 구간이 출입통제 구간이 아니었였다면 우리는 낮에 이곳을 통과 했을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절경이 펼처져 있었겠는가? 

비바람치는 중에도 조금씩 보이는 암벽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설악산의 웅장함도 보일 것이고, 혹 동해의 푸른 물결도 볼 수 있었겠고????
아 정말 아쉽다 !!!!!!!!!!!!!!!!!!!

 

그래도 서로 도우며 이렇게 올라가고

 

잠시 쉬어보고

 

이제 부터 산죽구간이 계속 이어지는데  - 잡스님 작품

 

이제 장마비는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더욱 거세지는 느낌이고....

우비에 닿는 비의 소리는 음악처럼 귀를 자극하는 중에

산죽에 떨어지는 비닿는 소리가 일정하게 리듬을 맞춰주고

가끔씩 비바람의 거친 숨소리가 세벽의 축제를 나름대로 준비해 주지만.....

 

우리에게는 그져 힘들게만 하는 비일 뿐 !!!!!!

 

그래도 아침은 오는가?     망대암산이다

망대암산 望對岩山, 1236m

 망대암산이란 이름은 위조주전을 만들던 주전골의 바위굴을 이 산에서 감시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바위를 바라본다.'는 뜻이 그대로 망대암(望對岩)이란 이름이 된 것이다.

 

주전골 (펌)

 

산죽과 친구하며 오르는 사이 드디어 점봉산의 웅장함이 얼굴을 내밀고

 

점봉산이다  -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사진도 내맘대로 할 수가 없다

점봉산 點鳳山( 1424m)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설악산 대청봉과 마주보고 있는 산이다. 옛이름은 '덤붕산'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덤'은 '둥글다'는 뜻이다. 이것이 한자화하면서 '점봉'으로 변한 것이다.

 

점봉산 정상

정상은 너른 평지 같다. 멀리서 보면 부드럽고 둥근 모습이다. '덤붕산'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

이 산은 조선시대에 산골짜기에서 어떤 사람이 몰래 엽전을 만들다가 들켰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근처에서는 꽹과리 소리를 가리켜 ‘덤붕산 돈 닷 돈, 덤붕산 돈 닷 돈’ 한다고 한다.

 

점봉산 표지석 뒷면

점봉산의 생태적 가치가 높은 또 다른 이유는 이곳이 한반도 자생식물의 남북방한계선이 맞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북쪽의 식물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오고 남쪽의 식물들은 올라와 만나 한 데 어우러져 사는 곳이 바로 점봉산인 것이다

 

또한 점봉산은 귀둔 갈림봉이다

진동에서 양양 가는 길. 조침령은 길이 쉽다고 했으나 멀었 고, 박달령은 가깝긴 했으나 말이 다니기엔 험했다. 이들이 가장
좋아한 길은 된비알이 없고 길이 부드러운 곰배령이었다.

쇠나 드리에는 마꾼과 선질꾼들이 쉴 수 있는 마방이 있었고, 구절양장 조침령 고갯길에도 예닐곱 군데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이전만 해도 귀둔에는 장이 설 정도로 사람이 많이 살았고, 안쪽 곰배골 깊숙한 곳에도 사람이 살았단다.

 

귀둔리 설명석
 

 

점봉산에서 남쪽으로 계속 직진하면 곰배령이다

 배령은 점봉산에 있는 해발 1164m 높이의 고개이다. 곰이 배를 벌떡 뒤집고 누워 있는 모습’이라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옛날 인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동해안의 양양시장을 오갔다. 인제의 산채 약초 감자 등을 그곳에서 쌀 소금 미역으로 바꿔 돌아왔다.     

--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 참조 ---

 

점봉산과 단목령의 중간지점인 너른이골 갈림 안부

 

 

단목령 직전봉인 856봉 삼각점도 확인하고

 

단목령지킴터가 있는 단목령이다

단목령 檀木嶺  (박달령) 809m

단목령은 양양군 서면 오가리 오색초등학교( 오색은 "오색화의 전설에서 기원한다.부처의 가르침을 뜻하는 청색·황색·적색·백색·주황색이

"오색"이라는 지명을 얻은 유래가 되었다) 에서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설피밭으로 넘어가는 재다.  

근동의 민초들은 이 고개를 넘어 마을을 잇고 삶을 이어갔던 것이다.

 

1217년(고려고종4년) 김취려 장군이 거란군을 제천과 원주에서 추격하여 이 곳에서 격퇴한 곳으로 전해 져 오지만

 김취려장군이 거란군을 격퇴한 장소는 제천의 박달령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령"이라 하는 것 같으며 박달나무 단(檀)과 나무 목(木)을 써 단목령이라  지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는 고도의 높낮이 변화가 거의 없는 평지에 습지가 형성되고 있어 생태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해발 800∼1000m에 이르는 이곳에는 곳곳에 크고 작은 습지가 발달해 있는데,

고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위도도 남한에서는 북쪽에 치우쳐 있는 지역이어서 생태적 의미가 크다.

경사가 완만한 남쪽으로 너르니골, 숨은골, 북암골 등의 완만한 골짜기들이 발달해 있다
참고로 백두대간 상 남한구간에는 선달산옥돌봉 사이에 있는 박달령두타산청옥산 사이에 있는 박달령이 유명하며

밝고 큰 고개라 하여 "박달령"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다

 

이 한마디 떄문에 새벽부터 빗속을 뚫고 걸어 온 걸 생각하면 기가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다.

 

아무리 비가 와도 밥은 먹어야 할 텐데......

 

드레군형님이 가져운 천막덕분에 많은 산우님들이 고마워하고

 

북암령이다

북암령北岩嶺925m

북암령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삼거리에서 양양군 서면 북암리로 넘어가는 재다. 북암령 일대는 굉장히 넓은 평전지대다

북암리와 미천골의 선림원지 북쪽에 있는 암자의 이름에서 유래 했으며 다른 이름으로 "북애미"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침령은 도로 공사 이후 옛길을 잃어버렸지만 북암령박달령(단목령)은 옛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중히 가꾸어야 할 우리의 자산이다

또한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이다.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한계령풀은 설악산 일부 지역과 점봉산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식물이다

 

북암리 가는 길

북암리 北庵里는 黃耳里 선림원에서 북방에 위치한 암자가 있었다하여 북암리라고 하는데 속칭 “북애미”라고도 하며
1960년대까지 마을이 있었으나 지금은 몇집만 살고 있다. 마씨 세거지였다.

 

북암령이니 당연이 다시 계속올라야 할 것이고.....

그야말로 올라가는 것 같지 않은데 계속 오르기만하고... 높게 보이지 않는데도 계속 오르기만 하고....

같은 봉이라도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올라야 하는 봉은 정말 힘들 수 밖에 없다

 

겨우 올라온 봉 - 거의 30분을 계속 올랐으니....

 

조금진행하니 바로 삼각점이 보이고

 

양수발전소 입산통제 안내문도 만나고  -  계속 이어져 안내문은 계속되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정표도 보이고

 구룡령에서 조침령까지의 구간에서 만난 참으로 한심한 작자가 만들어 놓은 그 이정표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오늘과 같이 비가 오는 날이면 언제 지도 펴서 확인하면서 갈 수 있겠는가?

 

다시 삼각점을 만나고

 

포토 포인트도 만나고

 

다시 능선은 계속 이어지다 삼각점을 만나고

 

이정표가 이정도는 돼야지.. 지나가며 눈아래 거리를 보면서

아직 멀었네? 많이 왔구나? 얼마 안남았네? 다왔네?

하면서 희망이라도 가져보지...          

아까는 인제군 것?  이것은 양양군 것?

 

 

전망이 좋다는 전망테그도 만나고

 

입산통제 안내문이 있는 조침령이다

 

현재의 조침령

같은 고개를 曺沈嶺-阻沈嶺-鳥寢령이라 각기 다른 한자를 쓰는데,  

曺沈嶺-阻沈嶺은 옛 조침령을 말하고鳥寢嶺은 군부대가 개설한 도로를 말 하나 그 아래 터널이 뜷려 鳥寢嶺도 옛길이 되고 말았다.

 

구룡령에서 올라 왔던 길임과 동시에 날머리 였던 길

 

오늘은 반대 편으로 하산하는 길 - 이 길도 이제 터널로 옜길이 되고 말았는데...

군사에 필요에 의해 만들었겠지만, 이제 추억으로만 간직되어질 길로 변해가고 있다.

대간 꾼들이 아니면 이 길도 잡초 속에 서서히 묻혀 가다 언젠가 이게 길이었다는 기록만이 전해질 수 도 있을 것이다

대간길을 우리에게 빨리 돌려 주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조침령 터널로 하산하여 오늘의 대간도 끝이 났다

비록 장마비로 조망도 없고, 그렇다고 제대로 걸을 수도 없었지만, 가슴 한켠에 남아 있는 아쉬음이 있어

때로는 추억을 이야기하며

때로는 곧 해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조금이라도 추억의 끈이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열심이 달려온 오늘의 대간길...

왜? 만나가지고.... 우릴.....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초보산꾼   도  덕 산

 

아래 - 필요한 분만 보세요

 

곰배령과 선질꾼

배령은 점봉산에 있는 해발 1164m 높이의 고개이다. ‘곰이 배를 벌떡 뒤집고 누워 있는 모습’이라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

옛날 인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넘어 동해안의 양양시장을 오갔다. 인제의 산채 약초 감자 등을 그곳에서 쌀 소금 미역으로 바꿔 돌아왔다.

봄여름 가을1652.90m² (500여 평) 넓이의 둔덕에 850여 종의 온갖 들꽃이 피었다가 진다

점봉산에서 꽃이 많기로 유명한 또 한 곳은 곰배령이다. 진동마을에서 강선리계곡을 따라서 두 시간 남짓이면 올라설 수 있는 곳이다. 고갯마루에 초원이 드넓게 펼쳐지고 이곳에서 꽃들이 군락을 이루어 핀다. 장마가 끝이 날 즈음 본격적으로 여름 꽃이 피어나기 시작해 가을까지 종류를 달리하며 꽃을 피운다

곰배령에서 진동리 쪽으로 흐르는 강선리계곡은 점봉산 정상 부근에서 시작되는 골짜기 중에서 가장 긴 골짜기로서 진동계곡의 원류라 할 수 있다

 

선질꾼. 주로 인제나 홍천의 산간 지역에 살며 지게에다 밭곡식 을 지고 가서 양양에 내다팔고, 바다에서 나는 어물이나 소금을 사다 인제나 홍천 등지에 팔던 이들이었다.

목발이 짧은 통지게 로 곡물이나 어물을 지고 고갯길을 오가며, 쉴 때도 앉지 않고 선 채 쉬어서 선질꾼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힘이 좋은 선질꾼은 소금 한가마니에 소금에 절인 고등어 100마리를 지고 다닐 수있었단다.

선질꾼으로 돈을 벌려면 짐이 무거워 손으로 귀를 만질 수 없을 정도로 짊어져야 했다던가. 말이 있는 이들(마꾼들) 은 말에다 물건을 싣고 다녔는데, 말은 선질꾼보다 3배나 되는 물건을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진부령, 한계령 길이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선질꾼들은 귀둔에서고갯길을 넘어 진동리, 방동리, 서림, 양양읍장 등을 넘나들었
다.

진동에서 양양 가는 길. 조침령은 길이 쉽다고 했으나 멀었 고, 박달령은 가깝긴 했으나 말이 다니기엔 험했다. 이들이 가장
좋아한 길은 된비알이 없고 길이 부드러운 곰배령이었다.

쇠나 드리에는 마꾼과 선질꾼들이 쉴 수 있는 마방이 있었고, 구절양장 조침령 고갯길에도 예닐곱 군데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이전만 해도 귀둔에는 장이 설 정도로 사람이 많이 살았고, 안쪽 곰배골 깊숙한 곳에도 사람이 살았단다.

하지만 이젠 곰배골에서 강선리 가는 길도, 진동에서 오색리 가 는 길도 일반인에겐 금지구역이다. 설악산국립공원관리공단과 인제국유림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도둑질하듯 몰래 걸어야 한다.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가 말했던가. 차를 타고 휙휙 지나치며 보는 땅은 우편엽서 속의 그림처럼 작고 말이 없으나 걸어서 가는 땅은 모든 게 넓다. 걸어서 가는 땅은 감각적으로 지각되고 냄새를 맡게 하며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을 숨기고 있다…
 그러나 편리와 속도만 추구하는 현대문명은, 혹은 터널이나 아스팔트 도로로, 혹은 자연보호를 구실로 땅이 숨긴 경이를 우리
에게서 자꾸 떼어 놓고 있다.

 

 

 

북암령北岩嶺925m과 한계령 풀

북암령은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삼거리에서 양양군 서면 북암리로 넘어가는 재다. 북암령 일대는 굉장히 넓은 평전지대다

조침령은 도로 공사 이후 옛길을 잃어버렸지만 북암령과 박달령(단목령)은 옛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소중히 가꾸어야 할 우리의 자산이다

또한 북암령은 세계적인 희귀식물인 한계령풀의 집단 분포지이다.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한계령풀은 설악산 일부 지역과 점봉산에서만 서식하는 희귀식물이다

지난 90년 대 중반 식물학자들에 의해 북암령 일대에 대규모 군락지가 있음을 발견하고 당국에 천연기념물 지정이나 보호구역 설정을 건의했으나 아무런 조치가 따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식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백두대간 산길을 막는 것 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근본적이고 우선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한계령풀은 해마다 4월이면 백두대간 산마루에 꽃이 핀다. 한계령에서 처음발견되어 한계령풀이라고 한단다. 寒溪嶺, 이꽃이 한계령에서 먼저 발견이 되었으면 어울리는 꽃이름이 되었을까?  그 이름에서 고산준령의 추위뿐만 아니라 그것을 견디는 용기와 강인함까지 느껴진다. 4월의 대간에서 추위와 눈에 겁먹지 않고 4월의 따사로운 봄볕을 한 껏 누리는 꽃이다.

 

북한강

한강 본류의 북녘 지역에서 흘러오는 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최상류는 북녘의 금강산 유역에서 발원하여 휴전선이니 비무장지대니 하는 군사정치지리학을 무시한 채 월남(越南)하여 화천 양구 일대로 흘러오는데 곧 이 물줄기가 북한강 본류가 된다.

그리고 설악산-건봉산 일대에서 인제 쪽으로 내려오는 인북천(제1지류)과 오대산-방태산의 산악군에서 홍천 방향으로 흘러내리는 내린천(제2지류)은 인제군 인제읍 합강리에서 서로 합류하여 소양강이 된다.

특히 내린천은 홍천에서 북류하여 인제 합강에 닿고 있으니, 예로부터 남류하는 북한강 본류와 수태극(水太極)을 이루는 기묘한 형승(形勝)을 찬탄 받아왔다.

 

 

금학산 정상에 오르면 홍천강이 수태극(水太極)을 연출한다

 

 

북한강 본류는 파로호를 거쳐 춘천댐의 건설로 형성된 춘천호로 내려오고 소양강 또한 댐의 물막이로 생겨난 소양호로 모였다가 두 강줄기는 이윽고 춘천시 소양동 남쪽에서 서로 합류한다.

여기에 다시 청평호에 이르러 홍천강을 받아들이는데 이 강은 홍천 동쪽의 고산지역에서 서쪽의 개활지대로 흘러내리고 있으며 유로(流路)는 143㎞이다.

홍천의 팔봉산, 모곡, 마곡 등에는 유원지가 조성되어 있기도 하여 도시인들의 근교 나들이 쉼터가 되어주고 있다. 이

처럼 복잡다기한 수계의 북한강은 양평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마침내 남한강과 합수되어 이로부터 한강 본류는 대하장강의 본색을 갖추어 도도하게 서울 쪽으로 흘러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