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땅이 한 눈에 보이는 섬, 강화 교동도 걷기.
강화도 교동면은 조선후기까지 하나의 독립된 현이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강화에 딸린 하나의 면으로 바뀐 교동도가 올해 6월이면 연륙교가 놓여 져 섬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섬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을 하루기행으로 꾸립니다. 창후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 화계산에 올라 갈 수 없는 북녘 땅을 굽어보고 연산군의 유배지와 송나라 사신들이 겨서으로 가던 길에 머물렀던 남산포, 그리고 1박 2일에도 소개되었던 대룡리의 한갓진 거리를 배회하다가 돌아올 예정입니다.
“섬으로 갈 때면 언제나 걱정이 앞선다. 언젠가 선유도 답사를 갔다가 풍랑으로 발이 묶여서 며칠 뒤에야 돌아온 추억이 있는데,‘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이 연상되기 때문일까? 오전에 갔다가 오후에 돌아오는 하루답사도 그럴진대, 그곳으로 유배를 갔던 사람들의 마음속은 얼마나 착잡했을까?
교동도는 육지와 격리되어 있던 섬이었으므로 고려 중엽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단골 유배지였다. 고려 희종이 유배되었었고, 조선시대에는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유배를 왔던 곳이다. 조선시대 최대의 폭군으로 이름을 날린 연산군이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생을 마감했던 곳이며 대원군의 아들도 이곳으로 유배를 왔었다.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멀리 보이는 교동도, 그 교동도는 지금도 섬이다. 강화대교가 놓이지 않고 나룻배 타고 건너던 시절 강화도를 건너서 다시 창후리에서 배를 기다려 교동도로 갈 때는 그 길이 제법 먼 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바람이라도 불면 흔들리는 뱃전에서 얼마나 가슴 졸이며 건너갔을까?
약간의 수속을 마치고 교동도를 오가는 화개해운에 오르자 배는 정시에 떠난다. 내가 이렇듯 제법 커다란 배에 몸을 싣고 흔들림도 없이 교동도로 가는 것과 달리 연산군이 교동도로 가기위해 탔던 배는 그다지 큰 배가 큰 배가 아니었을 것이다.
중종반정 이후 왕에서 쫓겨난 연산군이 교동도에 유배를 올 때 차림새는 붉은 옷에 띠도 두르지 않았다고 한다. 행인들이 모두 손가락질을 했으므로 갓을 깊숙이 눌러쓰고 평교자에 실려 갔다고 한다. 그 때 그를 호송하고 가던 사람들은 나인 4명에 내시 2명, 반감飯監 1명 등 합계 7명 뿐이었다고 한다.
바다 가운데에서 큰 돌풍이 일어 배가 뒤집히려 하자 연산군은 ‘하늘이 무섭다‘고 벌벌 떨었다. 그것을 지켜본 호송대장 심순경沈順徑이 “이제야 하늘이 두려운 줄 아셨습니까?” 하였다는데, 그 때부터 연산군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 이 뱃길을 지날라치면 한번 씩 풍파가 있었다고 한다.
뱃전에 나와서 바라보면 교동도의 진산인 화개산이 먼 듯 가깝고, 잠시 여러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에 교동도가 지척이다.
“외로운 성 사면은 바다인데, 구름과 물이 서로 모여 까마득할 뿐일세. 길이 뭇 가로 났으니 버들을 많이 심었고, 집은 섬에 의지했는데 두루두루 밭을 이뤘네. 누른 소 누운 곳엔 맑은 연기 꽃자 운 풀 자욱하고, 흰 새 나는 가엔 이슬비 비낀 바람 지나가네. 북으로 송도 바라보니 이내 생각 하염없구나. 뭇 봉우리 높고 높아 퍼렇게 하늘에 닿았네.” 라고 정이오(鄭以吾)가 노래했던 교동도의 월선포 선착장에 닿는다.
“바다 섬에 있는데, 동으로 인화석진(寅火石津)까지 10리, 서로 바다까지 27리, 남으로 바다까지 11리, 북으로 황해도 배천군(白川郡) 각산진(角山津)까지 12리, 경도와의 거리는 1백 82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교동도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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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퉁이를 휘어 돌아 옛 시절 현이 있던 읍내리에 닿는다 그곳이 바로 교동읍성이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에 현재 화성시의 화량花梁에 있던 수영을 이곳으로 옮기며 함께 쌓은 성으로 읍성 둘레가 1006척이며 높이는 3길이고 세 개의 문루가 있었다. 동문을 통삼루統三樓. 남문을 유량루庾亮樓. 북문을 공북루拱北樓라고 하였다.
옛 교동 읍 한 귀퉁이 옥수수 밭 가운데에 연산군의 적거지가 있다. 한나라의 임금이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나 유배생활을 했다는 표지석이 연녹색의 옥수수 잎에 아련하기만 하다. 그곳 바로 아래쪽에 고추밭으로 변한 교동도호부터가 있고, 조금 더 내려가면 조금교동읍성의 남문이다.
지금은 무지개 형태인 남문과 그 일부가 남아 있는데 그 문 안쪽으로 슬라브 집이 들어서 무심한 세월의 흔적을 남겨 놓아< 노자> ‘22장‘에 나오는 말이 실감이 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광풍은 아침 한나절을 불지 못하고/ 폭우는 하루 종일 내리지 못한다./ 누가 이렇게 하는가?/ 천지(자연)이다./ 천지도 그렇게 오래 지속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이 하는 일임에랴?“
바라보면 말이 읍내리이지 교동읍성 안에는 빈집들만 여기저기 눈에 띠고 듬성듬성 사람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구부러진 고샅길을 한 참 올라가다 보면 북문이 있으며, 키가 훤칠한 오동나무 아래에 부군당府君堂이라는 신당집이 있다. 이 당이 만들어진 것이 이채롭다. 임금의 자리에서 쫓겨난 연산군이 1506년 9월에 이곳 교동으로 추방되어 와서 살다가 그 집에서 병이 들어 죽자, 인근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연산군과 그의 아내인 신씨의 화상을 모셔놓고 원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 뒤 연산군이 죽은 섣달에 섬 처녀를 하나씩 골라 이 당집에 등명燈明을 드렸다는데, 등명을 드는 처녀는 달거리를 보기 이전이어야 하고 몸에 상처가 없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번 등명을 들고 나면 연산까시라고 해서 귀신이 붙는다고 혼인을 하려고 하지 않아 육지에 나아가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인가?
부근당에서 바라보면 바다는 저 만큼 있고 그 바다 건너면 바로 강화도이고 배를 타고 올라가면 머잖은 곳에 한양이 있는데, 갈 수 없는 그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가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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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에서 벌판을 가로 질러 교동도의 관문이었던 남산포南山浦에 이른다. 이곳 남산포에 있는 사신관使臣館터는 바닷가에 인접한 바위를 정으로 쪼아서 만든 층층대다. 고려 때 송나라의 사신들이 이곳에 머물렀다가 떠날 때 배에 오르기 쉽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고려가 망하며 그 기능을 잃어버렸고 조선 중엽 이후에는 군기고로 쓰다가 통어사 정기원鄭岐源이 창고로 고쳐서 썼던 것을 그 뒤에 방어서 이근영李根永이 읍내로 옮겨 세웠다.
남산포가 있는 남산은 소나무가 울창하고 바닷바람이 매우 상쾌하다고 하여 진망납량鎭望納凉이라 하여 교동 8경 중의 한곳이다. 남산 밑에 있는 마을 이름이 남산포이며 남산 밑에는 식파정息波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이 정자를 짓고서 처음에는 어변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다가 그 앞이 넓은 바다이므로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가 볼만하다고 하여 식파정이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바로 그 옆에 있는 당집이 사신당이다. 송나라 사신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에 뱃길이 무사하기를 제사 지내던 이집은 한국전쟁 당시 없어졌는데, 1969년에 다시 세워 뱃사람들이 무사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한편 읍내리 동쪽에 있던 동진東津은 양서면 인화진과 삼산면 석모리로 건너가던 나루였다. 예전에는 손님들이 많이 드나들어서 전송하는 광경이 매우 볼만했기 때문에 ‘동진송객東津送客’이라고 하여 이 역시 교동팔경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반이 자꾸 높아져서 나루를 남산포로 옮기고 말았다.
남산포에서 다시 길을 나서서 교동면 소재지가 있는 대룡리에 도착해 점심을 먹고 인사리의 북진나루로 향한다. 지금은 군부대가 철책근무를 하고 있는 이곳 북진나루에서 바라다 보이는 좌측이 황해남도 연안군이고, 우측은 배천군이며 이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면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봉화리로 건너갈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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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의 문장가인 목은 이색이 “바닷물 끝없고 푸른 하늘 나직한데, 돛 그림자 나는 듯하고 해는 서로 넘어가네. 산 아래 집집마다 흰 술 걸러내어, 파 뜯고 회 치는데 닭은 홰에 오르려하네.”하였던 교동도를 떠나기 위해 뱃전에 오르자 갈매기 떼 한 무리가 무심하게 뱃머리로 날아올랐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라고 노래한 정현종 시인의 시 한편을 떠올리는 섬, 교동도, 다시는 배를 타고 들어가지 못하는 섬, 교동도 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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