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오월에 남도의 역사와 문화의 풍경 속을 걷는다.

산중산담 2014. 5. 5. 23:52

오월에 남도의 역사와 문화의 풍경 속을 걷는다.

 

오월의 초입인 3일 (토)밤에 출발하여 6일(일요일이자 석가 탄신일)에 남도를 갑니다. 나라 안의 끄트머리에 있는 고흥의 거금도의 둘레길을 시작으로 이청준의 빼어난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무대인 소록도, 그리고 고흥의 아름다운 편백나무 숲을 걸을 예정입니다.

다음날은 순천만의 갈대숲과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 낙안 일대를 걸을 예정입니다.

마지막 날인 사월 초파일엔, 나라 안의 절집 중, 가장 아름다운 절집인 순천의 선암사에서 조계산 자락을 걸어 승보사찰이 있는 송광사에 이를 것입니다.

송광사에서 맛있는 절밥으로 점심을 먹고, 나라 안에 가장 아름다운 부도가 있는 화순의 쌍봉사와 천불천탑이 있는 화순 운주사를 답사하고 귀로에 오를 것입니다.

사울 초파일에 유서 깊은 절 네 곳을 답사하면 일 년 내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고 합니다.

남도의 맛깔스런 음식들과 켜켜이 쌓여 있는 문화유산들, 그리고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들 사이를 거닐게 될 이번 여정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보성 아래쪽에 고흥군이 있다. 본래 장흥부(長興府)의 고이부곡(高伊部曲)이었으며, 고려 충렬왕 때 흥양으로 바뀌었다.?세종실록 지리지?에 “땅이 기름지며 기후가 따뜻하다”고 기록된 흥양의 당시 호수는 157호이고 인구가 686명이며, 군정은 시위군이 8명, 진군이 46명, 선군이 59명이었다. 1914년에 지금과 같이 고흥군으로 바뀌었다.

안숭선(安崇善)의 기에 고흥에 대해 말하길, “정통(正統) 10년에 내 사명을 받들고 남주로 가다가 흥양(興陽) 지경에 들어가니 땅이 큰 바닷가에 있어 살찌고 기름지다. 그러나 두 내가 고을 한가운데로 가로 세로 흘러서 해마다 여름철이 되어 장마물이 넘치고 보면 백성들은 수해를 당하여 모두 흩어져 유리(流離)하니 고을에서 걱정으로 여겼다”고 하였다. 고흥은 반도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난 팔영산․운람산․천등산 등의 산과 나라에서 일곱 번째로 큰 거금도가 있다. 레슬링 선수로 이름이 높았던 김일의 고향인 거금도와 내나로도와 외나로도․소록도․시산도 등의 섬이 있다. 그 중의 한 섬이 소록도이다. 뱀골재를 넘으면 지도상에 사람의 위 같기도 하고 주머니 같기도 한 고흥반도에 접어들고 고흥의 야트막한 산 너머로 보이는 소록도를 두고 한하운 시인은 시 한편을 남겼다.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가도 붉은 전라도 길

 

한하운과 그의 동료들, 육신이 짖이겨지는 절망과 한의 세월 속에 자리했던 소록도를 배경으로 씌어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 이 실려 있다.

 

“내 말은 결국 같은 운명을 삶으로 하여 서로의 믿음을 구하고 그 믿음 속에서 자유나 사랑으로 어떤 일을 행해 나가고 있다 해도 그 믿음이나 공동운명의식은, 그리고 그 자유나 사랑은 어떤 실천적인 힘의 질서 속에 자리 잡고 설 때라야 비로소 제값을 찾아 지니고, 그 값을 실천해 나갈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소록도少鹿島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속한 섬으로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남쪽으로 약 600m 지점에 있다. 남쪽은 거금도와 인접해 있고, 그 사이에 대화도·상화도·하화도 등 작은 섬이 있다. 지형이 어린사슴과 비슷하여 소록(小鹿)이라 했다고 한다. 본래는 군의 금산면에 속했으나, 196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오마리와 함께 도양읍에 편입되었다.

이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들을 집단 수용시켰는데, 그 기원은 구한말 개신교 선교사들이 1910년 세운 시립나 요양원에서 시작되었다. 1916년에는 주민들의 민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으로 정식으로 개원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한센병 환자를 강제 분리·수용하기 위한 수용 시설로 사용되면서,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이 강제 수용되기도 하였다. 당시 한센병 환자들은 4대 원장 슈호 마사토(周防正秀)가 환자 처우에 불만을 품은 환자에게 살해당할 정도로 가혹한 학대를 당하였으며, 강제 노동과 일본식 생활 강요, 불임 시술 등의 인권 침해와 불편을 받았다. 소록도내에는 일제 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 생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록도 감금실과 한센병 자료관, 소록도 갱생원 신사 등 일제 강점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인 건물과 표지판 등이 많이 남아 있다.

소록도 병원은 해방 후에도 한센병 환자의 격리 정책을 고수하여 환자들의 자녀들이 강제적으로 소록도 병원 밖의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였으나, 이후 한센병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고,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완화되면서, 한센병의 치료, 요양 재생, 한센병 연구 등을 기본 사업으로 하는 요양 시설로 변모하였다. 또한 1965년 부임한 한국인 원장에게서 과일 농사, 가축 사육에 종사하여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도록 경제적인 배려를 받았으며, 일부는 소록도 축구단을 결성하여 한센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완화하였다.

섬의 주민은 국립 소록도 병원의 직원 및 이미 전염력을 상실한 음성 한센병 환자들이 대부분이며, 환자의 대부분은 65세를 넘긴 고령이다. 환자들의 주거 구역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되어 있다.

삼림과 해변이 잘 보호되어 있어서 정취가 뛰어나며, 관광지는 아니지만, 걸어 다니면서 섬 주변을 둘러볼 수 있게 길이 잘 닦여 있다.

2007년 9월 22일 고흥 반도와 소록도를 잇는 1160m의 연육교 소록대교가 임시개통하여, 육상교통로가 열렸다.

이곳을 무대로 소설가 이청준은 <<당신들의 천국>>을 썼는데, 일제 말에서 19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조선일보 기자였던 이규태의 빼어난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 소설은 살아 있는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과 물이 기이하고

백제 때 감평군(欿平郡)으로 불렸고, 신라 때에 승평군(昇平郡)으로 바뀐 뒤 여러 번의 변천과정을 거쳐 순천시가 되었다. “산과 물이 기이하고 고와 세상에서 소강남(小江南)이라고 일컬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형승’조에 실린 글이다. 남수문은 그의 기에서 “남쪽으로 큰 바다에 연했으므로 곧 바다 도둑들이 왕래하던 요충지다. 인구의 많음과 물산의 풍부함이 남쪽 고을에서 제일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순천을 일컬어 삼산이수(三山二水)라고 부르는데 삼산은 무등산의 맥이 이어 내려와 세 봉우리가 된 원산을 말하며 이수란 순천 시내를 흐르는 동천과 옥천 때문에 비롯된 말이다. 조선 영조 때에 편찬된〈여지도서〉에 의하면 백제시대에 순천의 지명을 승평이라고 하였다.

순천에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순천만 갈대숲이 있다.

 

조계산 서쪽 기슭인 송광면 신평리에 자리 잡은 송광사(松廣寺)는 한국 불교 조계종의 본산이며, 조선시대 초기까지 보조국사 지눌과 진각국사 혜심(瞋覺國師 慧諶)을 비롯한 국사 열여섯 명을 배출했던 곳으로 ‘불’의 통도사와 ‘법’의 해인사와 더불어 ‘승’의 절로 꼽혀 이 나라의 세 보배 사찰에 든다. 그런 옛 전통을 이으려는 듯이 이 절에 깊숙이 틀어박혀 수도에만 몰두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이 절터는 원래 신라의 혜린(慧璘)스님이 길상사(吉祥寺)라는 조그만 암자를 지었던 곳인데 고려시대인 1204년에 보조국사가 그곳에 절을 크게 일으켜 세우면서 송광사가 되었다. 여러 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특히 한국전쟁 때에 옛 절간은 거의 다 불타 없어졌다. 한때는 크고 작은 절간이 72채나 딸렸을 만큼 컸던 이 절이 근래 들어 많이 복구되었다. 송광사에는 국보 3점, 즉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제42호)․고려 고종의 제서(梯書 국보 제43호)․국사전(國師殿 국보 제56호)을 비롯하여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經疏)?(보물 제90호)와 금동 요령(金銅搖鈴 보물 제176호) 같은 보물 12점을 간직하고 있어 절의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한편 조계산의 동남쪽 기슭인 쌍암면 죽학리에는 태고종의 본산이며 보물 400호로 지정된 쌍무지개 다리, 즉 승선교(昇仙橋 보물 제400호)로 유명한 선암사(仙巖寺)가 있다. 백제 성왕 때인 서기 529년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지었던 그 근처의 한 암자에서 역사가 비롯되었고 고려 때에 대각국사(大覺國師)의 힘으로 크게 중창되었다고 알려진 이 절은 일주문․팔상전․대웅전․원통전․불조전 같은 32채의 건물들도 아름답지만 병풍처럼 둘러쳐진 조계산의 풍광을 보배로 삼고 있다.

 

철감선사탑이 있는 화순의 쌍봉사.

쌍봉사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쌍봉사雙峰寺 중조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의 문신 김극기金克己는 쌍봉사에 와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단청한 집이 붉고 푸른 숲 사이에 서로 비치니, 지경의 한가한 것 속된 눈으로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이었네. 학은 푸른 고궁에 날아서 지둔支遁(남북조 시대의 승려)을 하직하고, 물고기 금빛 못에 놀면서 혜관에게 감사하네. 어지러운 봉우리는 옥잠같이 난간에 이르러 빼어났고, 여울은 구슬패물처럼 뜰에 떨어지는 소리로세. 말하다가 조계물을 보니, 일만 길 하늘에 연해 노여운 물결 일어나네.” 이 절은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鑑禪師 도윤道允이 이곳의 산수가 수려함을 보고 창건한 절이라고 한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이 절은 철감선사가 주석하던 시기에 사세가 크게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절에는 신라의 문화재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것 중의 하나인 철감선사 부도(국보 제 57호)와 여러 점의 문화유산이 있다.

 

천불천탑이 있는 화순의 운주사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천불산 기슭에 위치한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제 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서 나지막한 산속에 들어 앉아있다. 이 절 이름을 배(舟)자로 삼은 것은 중생은 물(水)이요 세계는 배(船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물방울 같은 중생이 모여 바다를 만들고 세계라는 배가 그 중생의 바다위에 비로소 뜨는 것이며 역사는 중생의 바다에 의해 떠밀려가는 것이라는 깊은 뜻이 운주사의 배(舟)자에는 숨겨져 있다고 한다. 창건당시 운주사의 명칭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운주사(雲住寺)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후 중생과 배의 관계를 의미하는 운주사(澐舟寺)로 바뀌었다가 다시 훗날에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운주사(雲舟寺)로 전해왔다. 그러한 이름 탓이었는지 이절을 처음 지을 때 해남의 대둔산이며 영남의 월출산 그리고 진도와 완도, 보성만 일대의 수없이 많은 바위들이 우뚝우뚝 일어나 스스로 미륵불이 되기 위하여 이 천불산계곡으로 몰려왔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설화는 신라 때의 고승인 운주화상이 돌을 날라다 주는 신령스런 거북이의 도움을 받아 창건하였다는 설과 중국설화에 나오는 선녀인 마고할미가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그리고 운주화상이 천일기도를 하여 흙 같은 것으로 탑을 쌓았는데 탑이 천개가 완성된 다음 천동선녀로 변하여 불상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거의 똑같은 솜씨로 만든 돌부처들의 모습을 보아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들도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석공들이 석탑과 석불을 만들었던 연습장이었을 것이라는 허황한 설도 전해진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