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의 석파령과 춘천의 길을 걷는다.
4월 22(화)일과 23(수)일 이틀 간에 걸쳐 강원도 치유형 헬스케어 팸 투어를 실시합니다. 한국분권아카데미(길·문화지원센터) 주관으로 진행되고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회원들이 참여하는 이 번 팸투어는 춘천의 아름다운 옛길 석파령과 조선의 팔대명당이라는 신숭겸 묘 그리고 김유정문학관을 비롯한 춘천시내의 길을 걸으며 실시됩니다. 시간과 마음이 허락하는 분들의 참여바랍니다.
이 일대의 지형을 두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 곳에 비하면 춘천과 원주가 조금 낫다. 춘천은 인제 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한양과는 물길로나 육로거나 모두 200리 거리이다.
춘천부 관아 북쪽에 청평산이 있다. 산속에 절이 있고 절 곁에 고려 때의 처사(處士) 이자현(李資玄)이 살던 곡란암(鵠卵菴)의 옛 터가 있다. 이자현은 왕비의 인척이었지만 젊은 나이에 결혼도 벼슬도 하지 않은 채 이곳에 숨어살면서 도를 닦았다. 그가 죽자 이 절의 중이 부도(浮屠)를 세워서 유골을 갈무리하였는데, 지금도 산 남쪽 10여 리 지점에 남아 있다.
(……)
산속에 평야가 펼쳐져 있고, 두 강이 그 가운데를 흘러간다. 기후와 바람이 고요하고 강과 산이 맑고 훤하며 땅이 기름져서 사대부들이 여러 대를 이어가며 살고 있다.”
춘천은 원래 고대에 규모가 큰 원시부족국가였던 맥국(貊國)의 터로, 삼국시대에 들어와 백제․고구려․신라의 지배를 차례로 받은 뒤에 조선왕조 태종 13년(1413)부터 현재의 이름인 춘천으로 불렀다. 강원도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된 강릉과 원주에 밀려 한적한 고을이었던 춘천이 하나의 전환기를 맞은 것은 1888년이다. 그때 춘천은 유도부(留都府)로 승격되어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강6-4춘천
서울에 난리가 일어나 조정이 위험해질 경우를 대비하여 임금과 신하가 난리를 피할 궁궐을 지금의 강원도 도청자리에 짓게 하였다. 궁궐이 들어선 뒤로 춘천은 강원도의 행정 중심지가 되어갔고 결국 1895년에는 영서지방을 통괄하는 관청인 관찰부가 들어섰다. 이듬해에 전국을 13도로 나누는 과정에서 영동지방, 즉 강원도 전체를 다스리는 관찰사를 이곳에 두게 되었다. 춘천은 그때부터 강원도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910년에 관찰부를 도청으로 바꾸었다.
북한강 상류인 의암호․춘천호․소양호 등의 인공호수와 구절산․연엽산․대룡산․가리산․촛대봉․북배산․청평산 등의 크고 작은 산들이 있고, 북한강변에 그림같이 떠 있는 남이섬이 있는 호반의 도시 춘천은 천혜의 관광지로 손꼽힌다.
특히 북한강과 소양강이 합류하는 신동면 의암리의 신연강新延江 협곡을 가로질러 축조된 의암댐, 즉 의암호衣岩湖가 봄내라고도 부르는 춘천을 ‘물의 도시‘ ’호반의 도시‘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의 좋은 경치 그림으로는 못 그리겠네. 사면四面의 산들은 병풍처럼 둘러서고, 쌍 내(雙川)를 다다랐다”라고 이변李弁이 노래했던 그 옛날의 정취가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편 춘천시내를 흐르는 공지천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 있다.
조선시대의 큰 유학자인 이황이 이곳에 와서 살았던 적이 있어서 그가 살았던 곳이 퇴계동이고 이 마을이 공지천을 끼고 있다.
이황이 이곳에 살 때에 짚을 썰어서 강에 내던지자 짚부스러기가 모두 공지, 곧 공미리라는 고기로 변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내를 공지천이라고 불렀다는데, 또 다른 전설도 있다.
옛날 이곳에서 두 사람이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살생을 금하라는 계율을 어기고 이 강에서 고기를 잡아먹었고 그러자 속이 뒤틀려 토하게 되었다. 그러자 한 사람의 목구멍 에서는 고기 한 마리가 산 채로 꼬리를 치면서 나왔고, 다른 한사람의 목구멍 속에서는 꽁지가 없는 죽은 고기가 나왔다. 산 고기를 토한 사람은 도를 깨달았고, 죽은 고기를 토한 사람은 도를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내를 꽁지천으로 부르다가 말이 바뀌어 공지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 춘천에 남아 있는 옛길이 석파령이고 이 고개는 안보역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선시대 역원(驛院)제도가 있을 때 안보역이 있었던 이곳은 옛날 춘천과 경기도를 연결하던 역으로 춘천으로 들어오던 길목이었다. 안보역은 서면 안보리 고역촌 마을에 있었고, 지금의 당림초교 부근으로 추정한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를 남기고 청나라로 끌려갔던 김상헌金尙憲은 이곳을 지나면 ‘안보역’이라는 시를 남겼다.
예서 역은 산 어귀를 기대어
모옥(茅屋)이 팔 구가(八九家)라
담쟁이 덩굴 어지러이 문 위에 엉겨있고
언덕 가까이로 은빛 모래가 반짝이네
새 소리 깊은 숲 너무도 좋아서
지는 꽃 아래에서 한가로이 단잠을 잔다
황벽한 이곳을 그 누가 알아 주리오마는
홀로 마음껏 화사함을 누리네
안보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당림리 마당골은 석파령에서 서울 쪽으로 가는 첫 마을이었다. 넓은 언덕에 울창한 숲이 있어 언덕 당(塘), 수풀 림(林), 당림이라 하는데, 이 당림 속에 말의 안녕을 비는 이색적인 집, 마당(馬堂)이 있었다고 한다. 안보역에 적을 둔 늙은 말이 춘천에서 안보역(40리)거쳐 상천역에 이르는 80리 길을 성실하게 사람을 태우거나 짐을 실어 날랐다. 고을 원님이 이 사연을 듣고 말의 효성을 갸륵하게 여겨 말이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당을 짓고, 말의 안녕을 위해서 사람도 의관을 갖춰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후 마당리라 불리게 되었다.
당림리에서부터 시작되는 석파령이 <여지도서>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석파령, 화악산에서 뻗어와 삼악산三岳山의 으뜸이 되는 줄기가 된다. 민간에서 전하기를, 전임과 후임 수령이 이곳에서 인수인계를 했는데, 아전이 방석을 하나밖에 가져오지 않아서 방석을 갈라서 앉았다고 한다. 까닭에 방석을 가른 고개라는 뜻으로 ‘석파령席破嶺’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관아에서 서쪽으로 25리이다.“
삼악산의 북쪽 능선이 이어지는 곳으로 덕두원리와 당림리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예로부터 춘천의 관문으로 여러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좁고 험한 고개로 이름이 높았던 이 고개에 대한 기록이 김상헌의「청평록」에 남아 있다.
석파령을 넘는데 고갯길이 험준하고 협소하여 겨우 말 한 마리가 지날 정도이다. 하늘에 닿을 듯한 숲과 깊은 골짜기에 시야가 아득하고 마음이 두근거렸다. 임진년(1592년)에 왜구를 피해 온 가족이 걸어서 이곳을 지날 때를 생각하니 추억이 창연하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상촌 신흠申欽도 춘천으로 유배 왔을 때 집필한「춘성록」에 석파령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석파령에 이르렀을 때 그 험준하고 위태로움에 겁을 먹어 말에서 내려 걸어갔는데, 길 아래쪽으로 아득히 솟아있는 낭떠러지를 보고 정신이 오간데 없을 정도였다.’라고 했다. 또한 농암 김창협도 「동정기東征記」에서 이곳의 정경을 남겼다.
“병자년(1696) 8월 18일, 해가 뜰 무렵에 출발하여 석파령에 올랐다. 고개 길이 매우 험준하여 도보로 걸으면서 말을 쉬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호 윤휴도 「백호전서」에서 ‘만약 삼악산에 관을 설치하여 그 삼면을 막고 지킨다면 이 나라의 한 보장이 될 법 했다. (……) 석파령을 넘었는데 산 이름은 삼악이었다. 재가 매우 높아 길은 평평했어도 길가로는 깎아지른 절벽이라 말에서 내려 걸었다. 재 너머 서쪽은 전부 산 아니면 깊은 골짜기뿐이고, 그 재에서 군까지의 거리는 20여리였다.“라고 하였다.
이 석파령은 말이나 사람들의 사고가 많아 우두사 승 지희 (1558년), 춘천 부사 엄황(1647년)이 길을 정비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석을 세웠다.
春川府 서뽁 25리쯤에 서울로 통하는 석파령이라는 고개가 있다. 이 고갯길이 험하여 사람과 말이 자주 굴러 이리로 다는 사람들이 퍽 고통스럽게 여겼다. 가정 무오년 봄에 우두사 중 지희知熙가 이 길을 평탄하게 닦으려고 민간인을 권유하여 얼마간의 양곡과 베를 모아 석공을 부르고, 승려들을 모아 돌을 깎고 파내어 위태로운 곳은 평탄하게 하고, 굽은 곳은 바로잡고 좁은 곳은 넓혀 수개월 아니하여 일을 마쳐 험로가 편편하게 되어 말이니 수레가 구르지 않게 되었으니 이는 승려들의 공이 크다. 내 장차 춘천에 와 은거하려고 이곳을 왕래할 때 늘 여기 와서 길이 나쁜 것을 한탄했었는데 이제와 보니 길이 이렇게 좋아 졌으므로 여기 그 내력을 돌에 새겨 이곳을 지나는 행객에게 그 공을 알리게 한다.
석파령(350m)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에는 춘천 수령이 이곳에서 교구(交龜)를 행하였던 곳이다. 산이 험하여 길이 너무 좁은 탓에 앉을 자리 두개를 깔지 못하고 하나를 둘로 잘라서 이용하였다는 데서 '석파령(席破嶺)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25 전에는 고갯마루에 ‘석파령지’라는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정상에서는 삼악산성(청운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돌로 쌓은 성인 삼악산 고성이 <여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춘천의 명물로는 춘천막국수를 꼽을 수 있는데, 막국수는 메밀로 만든 냉면과 비슷하다.
인물로는 한말의 의병장이며 팔도창의대장(八道倡義大將)을 지낸 유인석(柳麟錫)이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고, 「동백꽃」 「봄봄」 「산골나그네」 등의 빼어난 단편소설을 지은 김유정은 춘천시 신동면 중리에 태를 묻은 사람이다.
29세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발표한 김유정은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徽文高普)를 거쳐 연희전문(延禧專門) 문과를 중퇴한 그는 한때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가 《중외일보(中外日報)》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였다. 폐결핵에 시달리던 그가 1937년 3월 29일 경기도 광주에 있는 누이의 집에서 세상을 뜨기 전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겼다. 그만큼 그의 문학적 정열은 남달리 왕성했다.
데뷔작인 《소낙비》를 비롯하여 그의 작품은 대부분 농촌을 무대로 한 것이었다.
오늘도 우리 수탉이 막 쫓기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무를 하러 갈 양으로 나올 때이었다. 산으로 올라서려니까 등 뒤에서 푸드득푸드득 하고 닭은 홰 소리가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르랴 두 놈이 또 얼리었다.
그의 대표작인 「동백꽃」의 서두이다.
「금 따는 콩밭」은 노다지를 찾으려고 콩밭을 파헤치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그린 것이고, 「봄봄」은 머슴인 데릴사위와 장인 사이의 희극적인 갈등을 소박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린 그의 대표적인 농촌소설이다. 그 밖에 「동백꽃」「따라지」 등의 단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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