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옥천의 정지용 생가와 대전의 계족산성 길을 걷다.

산중산담 2014. 5. 6. 11:04

옥천의 정지용 생가와 대전의 계족산성 길을 걷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2014년 5월 10일 옥천과 대전을 갑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생가와 실개천을 거닐고, 여정은 대전으로 이어집니다. 대전 시내에 위치한 남간정사는 기호학파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 선생의 자취가 있는 곳이고 동춘당은 송시열 선생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송준길 선생의 옛집의 별당입니다.

오후의 여정은 계족산성입니다. 맨발로 걷기가 좋은 곳으로 소문이 자자한 계족산성에 올라 내려다보는 대청댐과 대전 시내는 그야 말로 경관이 빼어납니다.

그곳을 답사하고 걷게 될 신탄진 건너편의 길은 금강의 숨겨진 보물 같은 길입니다.

 

인물의 고장 옥천

학사(學士) 남수문도 옥천 사람이다. 남수문이 기문에서, “옥천은 충청도의 이름 있는 고을이다. … 맑은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서 영특한 인재들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선비들의 학문이 다른 고을에 으뜸 간다”라고 묘사했다.

안남면 도농리는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으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금산에서 전사한 중봉(重峯) 조헌(趙憲)이 율곡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잇는다는 뜻의 ‘후율정(後栗亭)’이라는 집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그리고 옥천읍 교동리에는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내였던 육영수가 태어났다.

 

샘물처럼 솟아나는 그리움

그러한 사람들 속에 온 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오랜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포근한 고향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샘물처럼 솟아나게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바로 ‘향수’의 시인 정지용(鄭芝溶)이다.

 

정지용은 1903년 충북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하계마을에서 태어났다. 이 지역 사람들이 구읍(舊邑)이라고 부르는 하계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철도가 나기 전까지는 옥천의 중심지였다. 정지용의 아버지는 젊어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지만 집안은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지용은 만주를 방랑하며 익힌 한의술로 고향에서 한의원을 하며 농사를 짓던 아버지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14세에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있는 고향 옥천을 떠났다.

정지용은 대학시절에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잡지에 <카페 프란스> <이른 봄 아침> <바다> <향수> 등을 발표하여 문단에 신선한 감각과 이미지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진정한 한국의 현대시는 정지용에게서 시작되었다’라는 견해가 있을 만큼 한국 문학사에 뚜렷한 금을 그은 정지용은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홀연히 서울에서 사라졌다. 북한군 문화선전대에 참여했다고도 하고 북한군의 폭격에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학계와 가족들은 정지용이 납북된 것으로 보았으나 정부에서는 월북 작가로 분류하여 그의 작품은 어둠 속에 묻혀버렸고 그에 대한 연구조차 불가능했다. 1988년 정지용의 시가 해금되면서 1989년 5월 14일 옥천읍 한가운데에 있는 관성회관 옆 공원에 정지용의 동상과 시비가 세워졌다.

 

대전에는, ?동국여지승람?에 “세상에 전하기를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고 기록된 계족산 외에도 식장산․보문산 등의 산이 있고 시내 외곽에 서대전평야․삼천동평야 등의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다. 1984년에 유성․진잠․회덕 일부가 편입되었고, 1989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해안 개발시대를 맞아 성장 거점도시로서의 구실을 담당하기 위해 대전광역시로 개편되었다. 그때 “대전은 몰라도 신탄진은 안다”고 알려져 있는 신탄진 역시 대전에 편입되었다. 이 고장이 낳은 인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송준길(宋俊吉)이 있다.

송준길의 호는 동춘당(同春堂)인데, 이는 자신의 집 별당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에 아버지 송이창(宋爾昌)을 따라 회덕 송촌으로 내려왔고, 아홉 살부터 아버지로부터 공자와 주자․율곡의 학문을 익혔다. 이종형제인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공부했는데 이때로부터 비롯된 송준길과 송시열 두 사람의 우의는 학문에 있어서나 정치적 거취에 있어서나 거의 한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열여덟 살 때부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배웠다. 김장생은 송준길의 생활과 학문의 태도를 보고 “이 사람이 훗날 반드시 예가(禮家)의 종장이 될 것”이라 칭찬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 열아홉 살 때 진사가 된 송준길은 스물다섯 살 이후로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의 부임하지 않고 주로 송시열 등과 교우하면서 학문에만 몰두했다.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는데도 부임하지 않았던 그는 효종 8년 조정으로 나아갔고, 호조참판, 대사헌, 이조참판을 거쳐 효종 10년에 병조판서가 되면서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계획을 준비한다. 그러나 효종이 일찍 죽자 북벌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관직에서 물러난 송준길은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나라 안 곳곳에서 찾아온 유림들에 북벌론을 강론하다가 현종 13년 동춘당에서 예순일곱으로 생을 마감했다.

 

동춘당은 조선왕조 때의 별당을 표준으로 삼은 건물로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직한 기단과 아담한 몸체, 조붓한 툇마루, 단정한 지붕 매무새 등 곳곳에서 선비다운 얌전함과 간소함을 풍기는 집이다. 조선 후기 별당 건축의 한 표본으로 꼽을 만하여 보물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동춘당 뒤편에는 ㅡ자 사랑채와 ㄷ자 안채, 두 개의 사당으로 이루어진 송준길의 고택(古宅)이 있다. 인조 20년(1642)에 건립된 이 고택은 안채의 구성 등에 처음 지어졌을 때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사랑채 뒤편과 안마당 사이에 야트막한 내외담을 두어 서로의 공간을 독립시켜 놓은 점이 재미있다. 따로 떨어진 두 사당중에서 별묘(別廟)에 송준길을 모시고 가묘(家廟)에 다른 선조들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을 보여주는 송준길의 고택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근처에 송시열의 자취가 남아 있는 남간정사가 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충청도 편에서

 

 

“금강을 건너 대평리 거쳐 신탄진으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다. 금강의 지류로서 대전시내를 지나는 갑천을 지나고 신탄진에 이른다. 금강의 나루터였던 이 신탄진이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된 것은 신탄진이라는 담배 이름 때문일 것이다. 신탄진에 있던 연초제조장에서 온 국민이 피우던 신탄진을 만들어대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나루터가 아닌 담배로 신탄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조그마한 신탄진 읍이 급속도로 팽창한 대전광역시에 편입되고 경부, 호남선 열차와 고속도로가 교차되는 교통의 요충지로 변모되면서 몰라보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신탄진읍 장동리에서 대덕구 장동으로 변한 장동은 본래 회덕군 일도면의 지역으로 진(긴) 골짜기가 되므로 진골, 전골, 또는 장동이라 불렀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성산리를 병합하여 장동리라고 바꿨다.

계족산성으로 올라가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헨델의 하프협주곡을 듣는다. 그 현란함 뒤에 밀려오는 아련한 슬픔, 그 슬픔을 어찌할 것인가. 가도 가도 또 밀려오는 그 슬픔은 언제쯤이나 내 안에서 융해되고 잠재워질 것인가. 문득 길 위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떨어지는 나뭇잎 사이로 잊어버린 기억들이 하나 둘씩 그리움처럼 떠오를 즈음 계족산성 입구에 도착한다.

장동 자연휴양림 입구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준비한다. 앞서온 차들이 주차장을 빼곡이 채우고 벌써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한결 여유가 있다. 아침 산행이 좋은데 오늘은 너무 해찰을 했구나. 장동 휴양림에서 산성으로 오르는 길 옆 나무들에 아직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매달려 있고 길은 평탄하다. 엠티(MT)인지 수능을 끝낸 고등학생들인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너편 산허리에서 왁자지껄하고, 천천히 노란 낙엽송 나무들이 사열하듯 서있는 길을 걸어간다. 순환도로를 따라가다 계족산성이라고 나무 팻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오르막 산길이다.

그곳에서 한참 나무숲길을 헤쳐나가자 다시 순환도로가 나타나며 봉황정에 이른다. 계족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그곳에서부터 가파르기 이를 데 없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발에 밟혀 부스러진 채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나는 발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길이라선지 문득 땀이 나고 얼마쯤을 갔을까. 이윽고 계족산성에 오른다. 계족산성(鷄足山城)은 대전시 대덕구 장동리의 계족산(423m)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1,200미터이며 사적 제 3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계족산 위에 있는 테뫼형 산성으로서 현존하는 성벽의 안쪽 높이는 3.4미터, 외벽 높이는 7미터, 상부 너비는 3.7미터이다. 가장 잘 남아있는 북쪽 성벽의 높이는 10.5미터, 서쪽 성벽의 높이는 6.8미터이다. 성의 동·서·남쪽에 너비 4미터의 문지(門址)가 있다. 또 길이 110센티미터, 너비 75센티미터, 높이 63센티미터의 장방형 우물터가 있는데, 그 아래로 약 1미터의 수로가 있다. 상봉에 봉수지(烽燧址)로 추정되는 곳이 있으며, 건물지와 주초석이 남아있다. 금강 하류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은 백제가 웅진에 도읍했을 때 청원의 문의와 청주로 통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 토기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이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는 이 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시키기도 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성벽은 납작한 자연활석을 석재로 사용한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나, 동쪽 성벽 약 200미터 정도는 안과 밖으로 석재를 쌓아올리는 내외협축공법(內外夾築工法)을 이용하였으나, 현재 남문지 밖에는 지름 12센티미터, 깊이 12센티미터의 구멍이 뚫린 문초석(門礎石)이 있으며, 성내에서 백제시대는 물론 신라·고려·조선시대의 토기와 자기조각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산성임을 증명해 준다. 특히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하여 비수리 또는 백달산이라고 불리며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어서 동쪽의 옥천 환산의 봉수를 받아 문의현 소이산 봉수에 응하였다고 한다. 이 산성은 그 아래에 견두성(犬頭城)과 같은 보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며, 부근에 질현성(迭峴城)·능성(陵城)·내사지성(內斯只城)·우술성(雨述城)·진현성(眞峴城)·사정성(沙井城) 등이 있다.

계족산성에 서서 아래를 굽어본다. 산아래 대전을 지나 금강에 합류하기 위해 천천히 흘러가는 갑천과 경부고속도로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한 눈에 들러난다. 하지만 그보다도 온 산을 물들이는 노란 낙엽송의 물결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성을 따라 거닐며 바라본 계족산성은 대전시 문화유산 해설사인 민종순씨의 말대로 옛 산성의 모습보다는 21세기형 산성으로 쌓여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쩔 수 없지. 산성을 쌓던 기술자도 사라지고 그 대체인력으로 불도저들이 나섰으니.“

<신정일의 한국의 산성 기행> 중 <계족산성 기행> 중에서

옥천과 대전지역을 거닐며 길 위에 산재한 ‘길 위의 인문학>을 접하고 싶은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