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문득 가고 싶은 길, 문경새재와 괴산 선유동 계곡을 가다,

산중산담 2014. 10. 9. 12:32

싶은 길, 문경새재와 괴산 선유동 계곡을 가다,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의 일환으로 계획된 하루기행이 여름의 끝자락이자 가을의 초입인 830(토요일)에 실시됩니다. 이번 도보답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걷고 싶어 하는 길, 문경새재와 괴산의 선유동 계곡을 걷습니다. 길고 길었던 장마와 무더웠던 여름을 보내고 선선한 가을바람으로 머리 빗질을 하며 걷게 될 문경새재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이어진 조선시대의 옛길 <영남대로> 상에 있는 길입니다. 숲이 무성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 길, 넓은 신작로 옆으로 난 문경새재의 옛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이 나라 안에 제일가는 산수라고 극찬했던 괴산 선유동과 화양동계곡을 걸으며 세상과 나를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아름다운 길에서 가을을 맞고자 하시는 분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조선시대 영남지역의 사대부들이 서울로 가던 길이 세 개가 있었다. 부산 동래에서 경주와 영천 안동영주 풍기를 거쳐 죽령 넘어 서울로 가던 길이 열닷새 길이었고, 양산,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낙동나루를 거쳐 문경새재 넘어 가는 열나흘 길이었다. 마지막이 김천을 지나 추풍령을 넘어 청주로 해서 가는 길이 열엿새 길이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르거나 과거를 보러가던 선비들은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았고, 죽령은 죽 미끄러진다는 속설 때문에 넘지 않고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의 새재를 넘었다.

문경새재는 웬 고갠가 굽이야 굽이굽이가 눈물이 난다

노다 가세 노다 가세 저 달이 떴다지도록 노다나 가세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며 날 두고 가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느냐

청천하늘엔 잔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수심도 많다

아리 아이랑 아리아리랑 아라리가 났네진도 아리랑 속에 나오는 칠천만 우리민족의 노래아리랑 가락을 부르며 넘는 고개가 바로 문경새재다.(...)

<택리지>지은 이중환은 새재죽령만을 나라의 큰 고개라 하고 나머지는 작은 고개라 했다. 그것은 고개의 높이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고 교통량이라든가 도로의 중요성까지 감안하여 붙인 명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모두 다 큰 고개임은 사실이다. ‘새재라는 이름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들 만큼 험한 고개라고 하여 그렇게 붙여졌다고도 하고, 억새풀이 많이 우거져 있어서 붙여졌다고도 한다.

하초리를 지나 중초리에 이르고 음식점 밀집거리를 지나면 문경새재 길 박물관이 있다. 그곳에서 문경새재 박물관 학예연구사인 안태현씨와 동행하여 새재를 오른다.

이곳 문경새재에 산성과 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이 들어선 것은 임진왜란을 치르고도 100년이 더 지난 1708(숙종 34)이었다. 세 관문 중 제 모습을 비교적 제일 많이 간직하고 있는 주흘관 위 초곡천 건너에 드라마 세트장이 있다.

신라와 고려시대 나라의 대동맥이었던 하늘재 즉 계립령을 대신하여 문경새재를 개척한 것은 조선 태종 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새재발굴조사사업을 실시한 결과에 의하면 이 고갯길은 고려시대 이전부터 뚫려 있었고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하거나 묵어가기도 했던 객관, 즉 원()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 여러 가지 정황을 보면 신라시대 때부터 자연히 이루어진 좁은 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령 제일 관문은 주흘관. 조령제일관문으로 불리고 있는데, 홍예문으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문루가 있으며, 영남제일루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으며 그 동쪽에 주흘신사가 있다. 이 사당은 소사小祠로 되어 나라에서 봄. 가을로 향과 축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다. .

문경새재는 나라 안에서도 중요한 천연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때에 제대로 방어된 적이 없었다. 1589년에 중봉 조헌이 도끼를 옆에 끼고 왜적 방비책으로 영남지방과 문경새재에 경계를 더할 것을 상소했으나 묵살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592414,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채 보름도 지나지 않아 선산과 상주를 함락시키고 문경으로 진격해왔다. 신립은 충주의 단월역에 군사를 주둔시킨 뒤 충주목사 이종장, 종사관 김여물과 함께 새재를 정찰한 뒤에 작전회의를 열었지만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충주에 있는 남한강가 탄금대 앞에 배수진을 쳤다. 조령의 중요성을 알았던 왜군은 새재를 넘으면서 세 차례나 수색대를 보냈지만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한 명의 조선군도 배치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된 왜군은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어서 왜군은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배수진을 친 조선 방어군을 전멸시켰다.

그 때 신립 장군이 새재에서 적병을 막았다면 전란의 양상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하는데 유성룡은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진란에 조정에서 변기(邊璣)를 보내어 조령을 지키게 했는데, 신립(申砬)이 충주에 이르러서 변기를 위하로 불러들여 조령 지키는 일을 버리게 되었다. 적이 조령 길에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수일간을 접근하지 못하고 배회하면서 여러 번 척후로 자세히 살펴 복병이 없음을 알고 난 후에 비로소 조령을 통과했다. 이제독(명나라의 이여송)이 조령을 살펴보고 탄식하기를, “이 같은 천연의 험지를 적에게 넘기다니, 신총병(申總兵)은 참으로 병법을 모르는 자라고 하였다. 내가 이듬해인 계사년에 남쪽의 진중을 왕래면서 다시 조령의 형세를 보니, 관문을 설치하고 양변을 따라 복병하면 적을 방어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군읍에 씻은 듯이 사람이 없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조선의 최정예부대를 거느렸던 신립은 문경새재를 넘어 밀고 올라오던 왜장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결국 참패하였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남한강으로 투신 자결하고 말았다.

조선시대 후기까지 영남사람들의 길목이었던 새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일제시대인 1925년이었다. 문경읍 각서리에서 해발 548m의 이화령을 넘어 충청북도 괴산군으로 가는 산길에 신작로와 터널을 뚫은 것이다. 곧 바로 역사와 전설의 고개 새재는 버려진 길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70년대 중반에 들어서 퇴락했던 관문들을 새로 복원하면서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고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TV의 대하사극 태조 왕건이 방영되면서 더욱 유명세를 탔고 그 바람에 <새재노래>역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 갔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방망이로 다 나간다. 홍두깨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 때,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새재 50리 길에 우거졌던 박달나무도, 한국전쟁 전까지 이 일대 주민들이 만들어 팔았다는 방망이도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고 말았다.“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서

괴산 선유동에서 화양동에 이르는 길.

여기서부터 관평천변을 따라 아홉경치가 아름답기로 소문난 외선유동이다.

조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송시열과 이준경 등 이름난 사람들이 즐겨 찾았으며, 그들이 오래도록 대를 이어 살고자 했던 곳이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의 선유동 부근이다.

송면리는 본래 청주군 청천면의 지역으로 사면四面에 소나무가 무성하여 송면松面이라 부른다. 이곳 송면리는 조선 선조宣祖 때 붕당이 생길 것을 예언했던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장차 일어날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자손들의 피난처로 지정하여 살게 했던 곳이다.

어쩌다 승용차만 지나는 작은 길 따라 냇물이 흐르고 냇물 위에 기이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대개 괴산 선유동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30m 높이의 커다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고 바위에 선유동문仙遊洞門이라는 글씨가 음각된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곳에서부터 선유구곡이 펼쳐져 있다. 바위가 깎아지른 듯 하늘에 솟아 있는 바위가 경천벽驚天壁 이고, 옛날 암벽 위에 청학이 살았다는 바위가 학소암鶴巢岩이다. 학소암 위에 있는 바위로 그 생김새가 화로처럼 생겼는데, 옛날 이곳에 살던 신선이 약을 달여 먹었던 곳이라는 곳을 연단로燃丹爐라고 부르며, 와룡臥龍이 물을 머금었다 내품는 듯이 급류를 형성하여 폭포를 이룬 곳을 와룡폭臥龍瀑이라고 부른다. 와룡폭 위로 방석같이 커다란 형상을 지닌 바위를 난가대爛柯臺라고 부르고, 바둑판 같이 생긴 큰 바위를 기국암棋局岩이라고 부른다. 거북같이 생긴 구암龜岩, 두 바위가 나란히 서 있고 뒤에는 큰 바위가 가로 놓여 그 사이에 석굴이 있는 은선암隱仙岩 등이 선유동구곡으로 주위의 수석층암과 노송이 어우러져 세속과는 거리가 먼 이상향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선유구곡 중 난가대와 기국암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서려 있다.

조선 명종 때 이곳에 살던 어떤 나무꾼이 도끼를 가지고 나무를 하러 갔다. 나무를 하던 중 바위에서 바둑을 두는 노인들을 발견하였다. 가까이 가서 구경을 하자 한 노인이 나무꾼에게 말하기를,?여기는 신선들이 사는 선경仙境이니 돌아가시오.? 하였다 . 그 말에 깜짝 놀라서 옆에 세워둔 도끼를 찾았는데 도끼자루는 이미 썩어 없어진 뒤였다. 낭패감으로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니 낮 모르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누구인가 물었더니 그의 5대 후손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곳에 간 날을 헤아려보니 바둑 구경을 하고 보낸 세월이 150년이나 되었던 것이다. 그 때부터 도끼 자루가 썩은 곳을 난가대라고 불렀고 노인들이 바둑을 두던 곳을 기국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는 저마다 다른 뜻을 지닌 아름다운 곳들이 유난히 많은데, 바위위에 큰 바위가 얹혀 있어서 손으로 흔들면 잘 흔들리는 바위가 흔들바위다. 큰 소나무 일곱 그루가 정자를 이룬 칠송정터, 바위에서 물이 내려가는 것과 같은 소리가 들린다는 바위가 울암이라고 불리는 울바위다. 울바위 옆에 있는 바위로 사람의 배처럼 생겨서 정성을 들여 기도하면 아들을 낳는다는 배바우가 있고, 근처가 모두 석반인데 이곳만 터져서 문처럼 되어 봇물이 들어온다는 문바우등이 이곳 송면리의 선유동을 빛내는 명승지이다.

문처럼 터진 바위에 선유동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강물은 수정처럼 맑다.

이곳 선유동에 남아 있는 선유정仙遊亭터는 약 220여 년 전에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던 정모라는 사람이 창건하고 팔선각八仙閣이라고 지었는데 그 뒤에 온 관찰사가 선유정으로 고쳤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신정일 지음<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서

송시열과 화양구곡

선유동에서 송면리를 지나 화양천을 따라 내려가면 화양구곡에 이른다. 택리지에는 화양동계곡에 대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화양동華陽洞(충북 괴산군 청천면)은 파곶葩串 아래에 있는데, 파곶 물이 이곳에 와서 더욱 커지고 돌도 또한 더욱 기이한 것이 많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를 모방하여 여기에 집을 지었다. 또 주자朱子가 대의를 회복恢復하던 옛일을 모방하여, 고을(동중洞中)에서 명나라 명종明宗과 신종황제를 제사지내다가 후일에 사당을 세운 뒤 만동묘萬東廟라 하였다.

일찍이 송시열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푸른 물의 야단스러움이 성난 듯 하고,

푸른 산의 말없음은 찡그리고 있는 것 같다.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계곡은 원래 청주군(淸州郡) 청천면의 지역으로서, 황양목(黃楊木:희양목)이 많으므로 황양동(黃楊洞)이라 불렸다. 그러나 효종(孝宗) 때의 정치가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현천리(玄川里)를 병합하여 화양리라 해서 괴산군 청천면에 편입되었다. 화양구곡과 만동묘 그리고 화양동서원이 있는 이곳 화양동계곡은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에 들어앉아 글을 읽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자신을 주자에 비유했던 송시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떠서 화양동계곡의 볼 만한 곳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했다. 입구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1곡부터 9곡이 펼쳐진다.

화양천 건너편에 높이 치솟은 바위벽으로 큰 바위가 공중에 높이 솟아 마치 하늘을 떠받친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천벽 아래쪽에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 쓴 송시열의 글씨가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다리를 넘어서면 화양구곡 중의 제2곡인 운영담(雲影潭)이다. 계곡에서 빠르게 내려온 맑은 물이 잠시 고여 숨을 가다듬은 뒤 내려간다는 이곳 운영담의 바위 위에는 주자(朱子)의 시인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의 뜻을 따서 운영담이라는 글씨 석 자가 새겨져 있다.

3곡인 읍궁암(泣弓岩)은 계곡을 향해 퍼져 누운 너부죽한 바위인데 그 바위 위에서 송시열은 돌아간 효종임금을 기리며 매일 새벽과 효종의 제삿날인 54일에 엎드려 곡을 했다고 한다. ‘순임금이 죽은 후 신하가 칼과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는 읍궁암을 지나면 하마비를 만나게 된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대기질을 당했다는 하마비 우측에 그 이름 높았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1695(숙종21)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하여 그의 문인인 권상하, 정호 등의 노론계 관료와 유생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온 나라에 걸쳐 44개 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의 서원 가운데서도 대표적인 서원이 된 화양동 서원은 건립 당시 소론 측의 반대를 받아 중단될 뻔하기도 했다. 노론 측의 강력한 요구와 임금의 특별배려로 설립된 이 서원은 1696년 대사성 이여가 사액(賜額: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扁額)을 내리던 일)의 필요성을 역설한 뒤 사액을 받았고 영조 때에 송시열이 문묘에 배향되자 이 서원의 위세는 날로 더하면서 국가의 물질적 지원은 물론이고 유생들이 땅을 기증하여 강원도를 비롯한 삼남 일대에 토지가 산재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서원은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갔다. 제수전 징수를 빙자하여 각 고을에 보내는 이른바 화양묵패(華陽墨牌)를 발행하여 때로는 관령(官令)을 능가할 정도였다. ‘서원의 제수 비용이 필요하니 어느 날까지 얼마를 봉납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수령들에 대해서는 통문을 보내어 축출을 했고 복주호(福酒戶)와 복주촌(福酒村)을 운영하며 양민들에게 피역(避役)을 시켰다. 또 그 대가로 돈을 거두어들이며 이를 잘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사형을 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폐습이 심화되자 1858년 영의정 김좌근이 복주촌 폐지를 요청했고 1871년에는 노론사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원이 철폐되었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