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서해안을 걷는다. 여덟 번 째. 태안 백사장항에서 천리포까지
걷기에 가장 좋은 시절인 9월의 서해안 기행은 태안 백사장항에서 안흥항 지나 천리포까지 실시될 예정입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소나무숲과 몽산포, 만리포, 친리 갈음이 해수욕장등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지나며 천리포 수목원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은 서해안 기행의 백미가 될 것입니다. ‘
전라도 장흥의 천관산과 변산과 함께 왕실의 숲’으로 가꾸어지던 소나무 숲으로 알려져 있는 안면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그렇게 된 연유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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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인종이, 안흥정(安興亭) 아래의 물길이 여러 물과 충격하는 곳이 되어 있고 또 암석의 위험한 곳이 있으므로 가끔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있으니, 소태현 경계로부터 도랑을 파서 이를 통하게 하면 배가 다니는 데에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여, 정습명(鄭襲明)을 보내어 인근 군읍 사람 수천 명을 징발하여 팠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고 말았는데 … 본조(本朝) 세조 때에 건의하는 자가 혹은 팔 만하다 하고 혹은 팔 수 없다 하여 세조가 안철손(安哲孫)을 보내어 시험하였던바, 공을 이룰 수 없다 하여 대신에게 제하여 자세히 살피게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서 중지하고 말았다.”
그 뒤 조선 인조 때인 1638년에 삼남지역의 세곡을 실어 나르는 것이 불편하자 충청감사 김유金庾가 지금의 남면과 안면도 사이의 바닷길을 파서 안면도는 섬이 되었다. 섬이 되면서 안면도를 싸고도는 뱃길보다 약 200여리가 단축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운하의 효시가 되었으며 이름을 백사수도白沙水道라고 불렀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1970년에 나라 안에서 세 번째로 섬과 육지를 잇는 연륙교(連陸橋)가 생기면서 배를 타지 않고도 육지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황해를 향하여 삿대질을 하려고 내닫고 있는 형국이라는 태안반도에 자리 잡은 태안군을 신숙주는 “비옥한 지대로 통칭한다”고 하였고, 남수문(南秀文)은 기문(記文)에서 “태안군은 옛날 신라의 소태현(蘇泰縣)이었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재배하기에 알맞고, 또 어물과 소금을 생산하는 이익이 있어 백성들이 모두 즐겨 이 땅에 살아왔다. 그러나 이 고을의 읍내가 멀리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니 이는 곧 해상의 구적(寇賊)들이 왕래 출몰하는 요충(要衝)”이라고 하였다. 태안군은 백화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읍을 중심으로 서해안을 따라 안면도로 이어져 있다.
신숙주가 기문에서 “태안군이 충청도에 있어 해변의 요충지가 되어 국가에서 순성진(蓴城鎭)을 설치하고 지군사(知郡事)로 하여금 이를 지휘 관할하게 하고 있다. 군내의 토지가 비옥하여 화마(禾麻)가 풍부하며, 어염(魚鹽)의 이익이 있어 옥구(沃丘)로 일컬어 왔다”고 기록하였던 것처럼 오래 전부터 태안․서산 일대는 수산업이 발달하였던 곳이다.
태안군의 아래쪽에 자리 잡은 섬이 바로 안면도(安眠島)라는 섬이다.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인 안면도는 태안반도 중간에서 남쪽으로 뻗은 남면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 잡고 있다. 유독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이곳 안면도에서 유명한 것이 바로 안면도 소나무 숲이다.
안면도는 북쪽에 솟은 국사봉(107m)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100m 이하의 낮은 구릉지와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안면도는 해안의 드나듦이 복잡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크므로 간조 때에는 간석지가 넓게 펼쳐진다. (...)
이곳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안흥량安興梁 또는 난행량難行梁, 난행목이라고도 부르는 안흥항이 있다.
안흥항에서 신진도로 기는 이 목은 물결이 하도 험해서 배들이 파선이 잘되므로 난행목이라고 하였다. 그 이름이 좋지 않다고 하여 안전하게 일어나라는 뜻으로 ‘안흥‘이라고 이름 지은 이곳은 조세로 징수한 미곡과 면포 등을 해상으로 운송하는 항로 중에서 가장 물살이 세어 험난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선박의 잦은 조난사고 때문에 고려 중엽부터 조선 후기까지 나라의 근심거리였다. 이에 대한 방지책으로 굴포掘浦해안에 창고를 설치하고자 고려 인종 때 창고를 짓기 시작하여 1412년인 태종 2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굴포의 선박출입이 어렵게 되자 육지에 창고를 설치하여 운송하자는 안이 채택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에서도 항상 중요시할 수밖에 없는 안흥량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안흥항이 가장 역사가 깊은 항구로 발달하였다.
고려 말부터 조선후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 사신들이 왕래하던 안흥항은 특히 중국의 산동 반도와 가까워서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지금도 서산시에서 가장 큰 항구인 이 항구는 인천과 군산항의 중계지인 안흥항의 뒷산에 있는 안흥산성은 십년이 넘게 걸려 쌓은 성이다.
안흥산성은 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가 948자 높이가 11자이며 소근포첨절제사所斤浦僉節制使가 군사를 나누어 이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 산성에 있는 태국사泰國寺는 조선 세종 때 태안부사의 꿈에 안흥항 바닷가에 크고 검은 함 한 개가 표착漂着 하였기에 가서 열어 보았다. 그 함에 3척의 금불金佛 한기가 보자기에 덮여 있고, 그 보에 금 글씨로 기원태평국운祈願泰平國運이라고 적혀 있으므로 그 연유를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 뒤 국왕의 특명으로 세종 21년에 중이 내려와 지금의 터를 잡아 불사를 하였다. 그 때 승방과 망해루 등 총 122칸의 절을 건립하여 태국사라고 이름 지었다.
해상의 절경을 조망하고 해구海寇의 출몰까지도 감시할 수 있는 망해루望海樓는 1894년 안흥진성이 폐성이 되면서 폐허화되고 지금은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안흥항에서 바로 눈앞에 바라다 보이는 신진도의 복판에 있는 후망봉은 안흥팔경의 하나인데, 고려 때 송나라에 사신을 갈 때는 먼저 이곳에서 산제를 올리고 일기가 청명하기를 기다렸다가 떠났다고 한다.
또 하나 유적이 신진도 동쪽에 있는 능허대陵虛臺인데, 안흥팔경의 한 곳으로 ‘능허추월陵虛秋月’이라고 하여 예로부터 이름난 경승지이다.
이곳 신진도에는 지금도 중국 성씨인 통씨가 많이 살고 있는데, 그것을 보면 중국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드나들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이 항구를 드나드는 명나라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안흥항에 보기 좋은 성을 쌓은 뒤 그 안에 호화로운 주택 300여 채를 지었다고 한다. 명나라 사람들이 배에서 내려 이곳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때에 “이성계가 임금이 되더니 조선이 참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구나.” 라는 말을 듣기 위한 전시행정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이성계의 뜻대로 이 안흥성이 널리 알려져 중국에선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때부터 이곳 안흥성은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 당시 성이 크게 망가졌고, 그 뒤 네 개의 문도 망가졌으며, 집들로 대부분 다 뜯겨 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성안에 민가 사십여 채가 그 옛날의 영화와는 아랑 곳 없이 성을 지키고 있을 뿐이고 동문 옆에는 조선 후기 영의정을 지낸 김좌근 영세불망비가 서 있다.
한편 안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의도가 있다. 그곳에 있는 가오리도는 독섬 남쪽에 있는 섬으로 모양이 가오리처럼 생겨서 지은 이름이고, 가의도 동쪽에 있는 돛다랭이 섬은 모양이 돛을 단 것처럼 생겼다고 하며, 독섬 남쪽에 있는 만월도는 그 모양이 보름달이 떠오르는 형국이라고 한다.
이 가의 도에서도 70km쯤 떨어져 있는 섬이 물치라고도 부르는 격렬비열도다. 강남에서 제비가 우리나라로 날아올 때나 돌아갈 때 이 섬에서 쉬어 간다고 하며, 물의 끝이자 바다 끝이라고 하여 물치라고도 부른다.
죽림 서북쪽에 있는 갈음이 마을은 가래미 또는 노음이라고 부르는데, 갈미봉 아래에 있다. 이 마을에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옛날 어느 난리 때 한 사람이 갈대 속에서 숨어 있는데, 왜병이 갈대 소리만 난다고 하면서 돌아가는 바람에 무사히 피신을 했다고 하며, 그 뒤부터 갈음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 서쪽에 있는 갈음이 해수욕장은 영화 촬영지로 이름난 곳이다.
높은 산이 사방에 둘러 있으므로 막은 것 같이 되었다고 해서 마금이라고 지은 마금리를 뒤에 두고 길은 소원면 법선리로 이어진다.
신덕리 송현히를 지나 파도리에 이른다. 삼면이 바다라서 늘 파도소리가 끊이질 않는다고 해서 이름 조차 파도리의 끝 자락에 뒤끈이산이 있고 그 위쪽에 아치내마을이 있다. 큰말 남서쪽에 있는 이 마을은 지형이 장끼처럼 생겼다고 한다.
파도해수욕장, 어은돌 해수욕장을 지나자 모항리에 이른다. 본래 태안군 월일면늬 져역으로 지형이 목처럼 되고, 띠가 많이 있었으므로 띠목 또는 모항이라고 불렀는데, 곶으로 되어 있는 개고지마을을 지나자 1958년에 개설한 만리포해수욕장에 이른다.
똑딱선 기적소리 ...만리포라 내 사랑,“
이라는 노랫말 속에 남아 있는
이곳 태안에 이름난 해수욕장이 여러 곳이 있는데, 일리포, 백리포, 천리포, 만리포라는 이름의 해수욕장과 학암포, 몽산포, 연포, 구룡포등의 해수욕장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이 일대와 안면도를 묶어서 태안반도 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천리포 해수욕장 근처에는 귀화한 미국인 칼 밀러씨가 자기 돈으로 이만여평을 사서 만들어 놓은 천리포 수목원이 있다. 이 표본장에는 우리나라의 안과 밖에서 모아온 나무 6,500여종과 신기한 풀 500여포기쯤이 자라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소원면 의항리는 지형이 개미의 목처럼 생겼으므로 개미목, 개목이라고 부르다가 변하여 의항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이곳에 천리포 해수욕장과 십리포 해수욕장, 그리고 구룡포 해수욕장이 있다. 막골 서쪽에는 두개의 작은 섬이 잇는데, 모양이 닭처럼 생겨서 뭍닭섬과 섬닭섬으로 불리고 있다. 막골 서쪽에는 큰 발자국이 남아 있는데 옛날 장수가 밟고 놀던 자리라고 한다.
만리 저수지를 지나 태도에서 소근리所斤里로 건나가며 바라본 바다는 다도해를 닮았다. 소근리는 석은이 개. 후근포. 소근포. 후근진으로 불리는데, 세조 12년인 1466년에 소근포진을 두었던 곳이다, 이 진에는 좌도수군첨절제사가 있어서 당진포 만호. 파지도 만호를 관할하였다.
이곳에 소근포진성이 있는데, 조선 중종 9년에 돌로 성을 쌓았다., 둘레가 2,165자, 높이가 11자에 성안에는 우물이 있었다.
소근진에서 다리를 건너자 원북면 신두리에 이른다.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에는 오랜 세월동안 모래가 바람으로 해안에 운반되면서 퇴적된 사구지대가 있다. 탁 트인 해안선에 해당화와 소나무 숲이 우거진 신두리 해안사구의 소나무숲을 지나, “솔바람 산골물이 속된 생각을 씻어준다.” “솔바람 소리 멀리 들려오고 바람비 소리에 학의 꿈이 깨인다.”는 시 구절을 떠올리는 사이 황촌리에 이른다. 황촌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 지형이 목과 같다는 목말이다. 구례포해수욕장과 학암포 해수욕장이 있는 황촌리의 불당골에서 웃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서낭당 고개다.불당이 있었다는 불당골 서쪽에 있는 버둣골 서북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이 신도타여다. 서북쪽에 신도(새방이 섬)가 있는데, 그것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두 자를 덧붙였다민어도에서 주도를 지나자 이원면 관리에 이른다.
예전에고나사가 있었으므로 관리라는 이름이 붙은 관리의 파금봉은 관동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금을 파냈다는 산이고, 관동 동쪽에 있는 창말은 조선시대에 창고와 마방과 주막이 있었던 곳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충청도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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