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서울시내 답사기

초보산꾼 여행이야기 : 성북동 길상사(吉祥寺)

산중산담 2014. 11. 22. 17:07

 

초보산꾼 발길 닫는 곳 : 길상사(吉祥寺)

                                                                                            

언제 : 갑오년(14년) 미틈달 여드레 해날

누구랑 : 3450온누리 산악회 산우님들

어딜 :  길상사 ( 북악하늘길 연계산행)

 

'무소유'와 '명상'. 길상사(吉祥寺)에서 얻게 되는 깨달음이다. 길상사는 법정 스님이 우리에게 남겨준 아름다운 선물이다.

길상사는 오래된 나무들이 많아 특히 가을이면 도심 속의 단풍 숲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는 곳이다.
모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그렇다고 누추하지도 않은 길상사.

길상사에는 아직도 우리 가슴을 덥히는 창건 실화가 녹아 있는 곳이다. 밀실정치 밤의 정치의 요정이 청정도량으로 바뀐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속에 들어있음이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음을 길상사는 오늘도 말없는 가르침으로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길상사 입구

 

일주문이 보인다

 

한성대 입구역까지 운행하는 셔틀버스도 있습니다

 

천천이 걸으며 다 사연이 있는 이름들이니 한번 마음을 다잡아 본다

길상사의 가람 대부분은 대원각으로 사용되던 때 지어져 보수 작업을 거쳐 문을 열었기 때문에 사원의 배치가 일반적인 사찰과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눈을 부릅뜬 사천왕상도 보이지 않은게 이색적이다

 

일주문을 들어서자 마자 극락전이 보이고 앞에 관음보살상이 반긴다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씨가 조각한 석상으로 성당의 성모상과 인상이 비슷하다. 최 씨는 마리아상으로 이름난 조각가다.

마리아상을 닮은 관음보살상은 법정 스님이 고 김수환 추기경, 이해인 수녀 등과 가졌던 교분과 함께 종교 화해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법정 스님처럼 다른 종교와의 화해에 관심을 쏟는다면 재밌는 세상이 돌아 올까?

 

종교화합의 또 다른 상징물인 길상7층보탑이 일주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보인다

기독교 신자인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7층 석탑을 기증했다. 석탑은 법정 스님과 길상화 보살의 깊은 뜻을,

그리고 길상사가 종교화합의 상징적 공간임을 기리고 있다.

길상사 경내에는 수녀들과 목사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해마다 부활절에는 ‘작은형제 수도회’와 ‘성북동 성당’ 사람들이 달걀을 들고 나타난다.

12월이면 길상사에는 성탄절을 경축하는 현수막이 내걸린다고 한다

 

 

되돌아 본 일주문의 秋景

 

극락전

우선 일주문을 통과하면 바로 본당인 잘 지어진 고택의 사랑채를 닮은 극락전이 등장한다. 길상사에서 가장 큰 건물로 오른쪽에 범종각을 두고 있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봉안한 길상사의 본법당이다. 보통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단청 대신 소박하고 단정한 모습에서 법정스님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된다.

내부도 매우 소박하다. 작은 삼존불이 모셔져 있고 그 옆으로 초들만 가득하다.

 

"정랑"이라고 화장실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마음을 정갈이 하는 공간이라는 뜻인 듯하다 

실제로 이용해 본 결과 다른 사찰의 해우소와 다르게 일단 신발을 벗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다

우리같은 산꾼들은 조금은 불편할 수 있지만 너무 깨끗해서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장실이라 해도 좋을 듯

불을 켜지 않아도 출입문과 복도 지붕, 그리고 화장실 지붕도 유리로 되어 있어 자연 채광을 하고 있었다

 

느티나무 보호수가 극락전을 지키고 있다

 

다시 뒤돌아 본 종각 방향 秋景

 

이제 좌측 계단따라 올라 우측으로 내려 온다

 

계곡을 건너면

 

시주 길상화 공덕비가 나온다

선운각, 삼청각, 대원각으로 대표되는 고급 요릿집(한정식집) 요정은 ‘밤의 정치’, ‘밀실 정치’로 가는 비밀 통로였다

1951년 문을 연 대원각 역시 권력자들이 즐겨 찾던 특별한 공간이었다.

대원각 소유자 고 김영한(1916~1999)씨는 16살 때 조선권번(券番, 기생조합)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 문하에 들어가 기생 진향이 됐다.

그는 월북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진 뒤 자야(子夜)라는 아명을 얻고 밤의 요정으로 불렸다. 3공화국 시절 대원각은 권력 실세와 거물급 경제인의 밀실 정치 장소로 급부상했다.

백석과의 사랑은 뜨거웠지만 백석의 부모는 기생 출신 자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기에 한국전쟁은 이들을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백석을 그리며 또 기다리며 자야는 치열하게 살았고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하지만 허기진 마음은 지식으로도, 돈으로도 채울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데

격정의 세월을 그렇게 흘러보내고 어느 날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큰 감명을 받고 돌아보니 살아온 날들이 남루함을 깨닫고 자신을 비우고자 마음을 먹는다

 

 

1987년 당시 1000억원대의 재산을 시주하려 했으나  ‘무소유’의 법정은 이를 간단히 뿌리쳤고 그로부터 10년 동안 승강이가 벌였다고 한다

시줏돈에 관한 법정 스님의 생전 지론은 이랬다. "중은 시줏돈을 날아오는 화살처럼 여겨야 한다."
그렇다면 법정 스님은 왜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였을까. 스님이 불일암을 등지고 강원도 오두막에 들었을 때였다.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라는 모임을 발족시켰다.

“삭막하고 살벌한 현실에 향기로운 마음의 연꽃을 피워보자”는 취지의 시민운동이었다. 1994년 3월 출범한 모임은 소리 없이 번져나갔다.

전국에서, 각계에서 ‘맑고 향기롭게’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회원들은 모일 장소조차 없어 이 절 저 절을 전전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김영한 할머니의 청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했다. 마침내 법정 스님이 결심했다.

청을 받아들인 법정스님은 1997년 절(길상사)을 지었다. '밤의 요정, 밀실 정치'의 상징이던 대원각이 '맑고 향기로운 근본 도량'이란 뜻을 지닌 사찰로 변한 것이다.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며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개원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탄생했다.

그것은 “누구나 들어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길상화 보살의 염원이기도 했다.

자료 :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74526

 

김 씨는 기생 '진향'에서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고 1999년 11월 14일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 길상사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다.

1997년 12월 14일 마침내 길상사가 개원했다. 김 할머니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려준 법정 스님은 보살 목에 108염주를 걸어주었다. 창건법회서 길상화 보살이 말했다.

보살은 그 후에도 시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일인데 있는 것을 드렸으니 내세울 일이 아니네.”  “내 모든 재산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 못해.”

길상화 보살은 자신이 죽거든 눈 오는 날 자신의 유해를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고 당부했다. 연인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백석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길상화 보살은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비를 마친 유골은 유언대로 첫눈이 오는 날 길상사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길상화 공덕비 옆에 있는 '길상헌'위로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 길상화의 거처로 알려저 있다 - 자료 사진 : 초보산꾼

 

연등 만드는 작업을 하는 적묵당

 

계속 오른다

 

사찰에 걸린 어록들

 

드디어 법정스님의 진영이 모셔저 있는 진영각

지난 3월 일반에 처음 공개된 진영각(眞影閣)은 법정 스님이 세상과 작별한 곳으로 길상사의 가장 안쪽에 있다.
스님의 진영을 비롯해 생전에 썼던 모자, 부채, 붓, 염주 같은 유품과 수십 권의 저서가 전시돼 있다.

"작은 것과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소욕지족(小慾知足)'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

‘현대인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다. 모자람이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함을 알지만 넘침에는 고마움과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따뜻한 가슴을 잃지 않으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 50선(選)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맨 위에 올려놓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소로는 교사 목수 측량기사를 거쳐 아버지의 연필공장 일을 돕다 1845년 7월 월든 숲에 방 한 칸짜리 통나무집을 짓고 2년 동안 살았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자연 예찬과 문명사회 비판을 담은 ‘월든’을 썼고 마하트마 간디와 시인 예이츠를 비롯한 사상가 그리고 환경운동가들에게 두고두고 영감을 불어넣었다.

소로는 ‘간소하게, 간소하게 살라. 그대의 일을 두 가지나 세 가지로 줄일 것이며, 백 가지나 천 가지가 되도록 하지 마라. 자신의 인생을 단순하게 살면 살수록

 우주의 법칙은 더 명료해질 것이다’라고 썼다. 법정 스님은 월든 호수를 세 번이나 찾아갔고, 저서 ‘무소유’나 ‘오두막 편지’에도 월든의 흔적이 어려 있다.

 

다시 내려오다 만나게 되는 맑고 향기롭다라는 뜻의 청향당

 

정진중이라 조용히 내려온다

 

관음보살상 뒤로는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는 설법전이 있다. 설법과 행사가 이뤄지는 설법전에서는 멀리 남산과 N서울타워가 한눈에 들어온다.

 

극락전 앞 秋景

 

범종각

 

78세를 일기로 입적한 법정 스님이 길상사를 떠나던 날 하늘도 스님이 가시는 걸 아는지 난데없는 돌풍이 불었다고 한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2동에 위치한 길상사는 ‘무소유 정신’으로 유명한 법정스님이 설립한 사찰이다.

법정스님은 수필가로도 활동하며 종교를 떠나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존경받았던 인물이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 물건을 가지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마음을 쓰게 된다. 따라서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것.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있다는 것이다.'(법정스님 산문집 '무소유'중에서)

스님은 없지만 그의 가르침만큼은 오롯이 남아 오늘도 찾아오는 많은 이들에게 스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평생 '무소유'를 실천하며 맑고 향기로운 삶을 살았던 법정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오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초보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