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분단선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걷다. 여섯 번째 ‘진부령 넘어 건봉사에서 통일전망대까지
휴전선 기행 여섯 번째가 인제와 고성을 잇는 진부령을 넘어 건봉사에서 통일전망대까지 이어지는 구간을 걷습니다. 민족의 염원 통일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땅 고성에는 청간정, 화진포를 비롯한 수많은 역사유적과 거진항을 비롯한 아름답고 고즈넉한 항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해와 맞닿은 휴전선 기행에 참여를 바랍니다.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청간정
『연려실기술』 ‘지리전고’ 편에 ‘간성의 청간정(淸間亭)은 군의 남쪽 40리에 있다. 석봉이 우뚝 솟았는데 층층마다 대와 같고 높이가 수십 길이나 된다. 위에는 용트림을 한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만경루가 있으며, 대의 아래에는 돌들이 어지럽게 불쑥불쑥 바다에 꽂혀 있다. 놀란 파도가 함부로 물을 때리니 물방울이 눈처럼 날아 사방에 흩어진다.’고 기록된 청간정은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청간리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누각형식의 정자이다. 남한 땅에 있는 관동팔경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원도 유형문화재32호로 지정된 청간정은 설악산의 골짜기에서 발원한 청간천이 동해로 흘러드는 하구 언저리에 위치하고 있는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조선 인조 때에 군수로 부임해왔던 이식은 ‘정자위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보면 물과 바위가 서로 부딪쳐 산이 무너지고 눈을 뿜어내는 듯한 형상을 짓기도 하고 갈매기 수백 마리가 아래위로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 사이에서 일출과 월출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좋은데, 밤에 현청에 들어 누으면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창문을 뒤흔들어 마치 배에서 잠을 자는 듯한 느낌이 든다.’라고 청간정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129개의 긴 주초석으로 받쳐진 이 정자의 창건연대와 건립자는 알 수 없지만 1520년(중종15) 간성군수 최청이 중수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뒤 청간정은 1844년에 갑신정변당시 불에 타버린 뒤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928년 토성면장 김용집의 발기에 의해서 재건한 것을 1981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이 청간정을 두고 어우 유몽인, 오산 차천치 등의 문장가들이 시를 지어 찬양하였고, 조선시대 명필인 양사언과 송강 정철의 글씨 및 숙종의 어제시를 비롯한 전직 대통령의 글씨가 남아있다. 청간정의 현판은 1953년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썼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이후 1년이 채 안되는 동안 대통령에 재직했던 최규하 대통령의 글씨도 걸려있다. 또한 이 정자에서 바라보면 토성면 신평리 신선봉에서 발원하여 화암사와 신평을 거쳐 청간리로 흘러드는 청간천과 동해바다와 합하게 되는 합수머리를 바라볼 수가 있다.
동해 바닷가에는 그림 같은 정자와 누각이 많이 있었는데, 만경루(萬景樓)는 청간역(淸澗驛) 동쪽 근처에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우뚝 일어서고 층층하여 대 같은데, 높이가 수십 길은 되며 위에 구부러진 늙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다. 대의 동쪽에 작은 다락을 지었으며 대 아래는 모두 어지러운 돌인데, 뾰족 뾰족 바닷가에 꽃혔다. 물이 맑아 밑까지 보이는데 바람이 불면 놀란 물결이 어지럽게 돌 위를 쳐서 눈인 양 사면으로 흩어지니 참으로 기이한 광경이다.” 하였고, 이달충(李達衷)은 그의 시에서, “바다를 구경하러 와서 만경대에 오르니, 구름 안개에 쌓인 물결이 하늘에 닿아 들어오네. 만일 이 물이 봄 술로 변한다면, 어찌 하루에 3백 잔을 마시는 데만 그치리,”하면서 바닷물을 술에 연상시키는 풍류를 연출하고 있다.
청간정 근처에 있는 청간역에 대해 고려 때의 문장가인 김극기는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남겼다.
“높은 다락이 푸른 연기 낀 나무 끝에 있는데, 난간에 엎드려 나는 새를 엿보네. 가을도 되기 전에 서늘한 기운 많고, 여름철에도 더위는 적다네. 매미소리는 늦은 바람에 부서지고, 갈 가마귀 그림자는 저녁 햇빛에 번득이네. 술잔 들며 흰눈으로 바라보니, 만리에 푸른 하늘이 작구나. 관동은 산수의 고장인데, 지나는 나그네 어조와 함께 섞이네. 돌아가는 길사람 마음과도 같아 험한 가운데 평지가 적구나. 석양은 말머리에 떨어지는데, 서쪽 변방엔 달이 처음으로 비치네. 곤하여 침상 위에 거꾸러지니, 태산이 가을철의 털과 같이 작게 보이네.”
또한 안축은, “중첩한 멧부리 사면으로 둘러싸여 지경이 그윽한데, 세월이 오래니 소나무 비늘 백 자나 길구나. 큰 관도에 나무가 깊으니 바람은 원집에 가득하고, 바닷물에 안개가 개이니 물은 다락에 밝구나. 비 오는 날 도롱이 삿갓 쓰고 고깃배 타기 평생의 기약인데, 티끌 묻은 옷으로 길 가는 행장은 조만간 그만두려네. 만일 성 남쪽 경호의 달을 준다면, 예전 살던 곳이라고 하필 이 고을을 그리워할 것이랴.”하였다.
한편 이곳 간성과 고성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다. “양간지풍통고지설養杆地風通高地雪‘이라는 이 말은 양양과 간성 지방에는 바람이 많이 불고, 통천과 고성지방에는 눈이 많이 내린다는 말이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 바람이 드세게 부는 겨울철에는 그 육중한 소나무들이 반으로 부러져 길을 막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고 폭설이 내려 며칠씩 교통이 두절되는 곳이 바로 이 지역이다.
공수진公須津 북서쪽에 있는 호수인 선유담仙遊潭은 신라 때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安祥. 남석南石이라는 네 신선이 이곳에서 놀았다는 곳이고, 공수진 서쪽에 있는 장막재 마을은 간성 원님이 이곳에서 장막을 치고 놀았다는 곳이다.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 위천 동북쪽에는 팔음 또는 바르메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부근에 건봉사가 있어서 석가 탄신일이 되면 사면팔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이 마을을 지나가므로 팔방의 소식을 다 듣는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건봉사는 신라 법흥왕 7년(520)에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신라 말에 도선국사가 중수하여 서봉사라고 지었다가 고려 공민왕 7년에 나옹화상이 중수한 뒤에 건봉사라고 고쳤다. 일주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6.25때 불에 타고 현재의 건물은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
한편 조선시대의 법전法典인 <대명률大明律>에 “승려로 처를 데리고 있으면 장 80대를 쳐서 환속을 시킨다.”라는 조항이 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승려는 독신생활을 하는 것이 기본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통념이 깨진 것은 일제시대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 대처 승려들을 위해 사하촌寺下村이 생겼는데, 간성의 건봉사의 경우가 재 있다. 수도를 하는 비구승들은 능파교 북쪽의 도량에서 수도를 전념하여 그들을 이판理判이라고 불렀고, 사하촌에서 가장 생활을 하면서 출근하는 승여들을 능파교 남쪽에서 거주하면서 사무寺務를 돌보았다, 그들을 일컬어 사판事判이라고 하였다.
간성 근처에 있는 거진巨津은 조선시대에 초가집 몇 채가 올망졸망하게 모여 있는 조그만 어천이었다. 서울로 과거를 보러가던 어느 선비가 해안선이 활처럼 휘어져 들어간 땅의 형세를 보고 마치 ‘클 거(巨)자와 닮았으니 앞으로 큰 나루가 될 것이라고 말 한 뒤부터 큰 나루라는 뜻으로 거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 연유를 지닌 거진이 일제 시대에 고성군 일대를 중심으로 정어리가 많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고깃배가 몰려들어 제법 큰 항구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이 될 무렵 정어리가 사라지며 침체일로를 걷다가 함경도 지방에서 주로 잡히던 명태가 잡히면서 거진항은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명태를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인데, 얼린 것을 동태라 부르고 말린 것을 북어라 부르며 간성읍 진부리에서 한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쐬면서 말렸다가 물에 불렸다가 하는 과정에 노린 빛깔을 띈 명태를 황태라고 한다. 명태가 그 이름을 같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에 함경도 명천明天 지방에 살던 태太씨라는 성을 가진 어느 어부가 어느 날 이름을 알 수 없는 고기를 많이 잡았다. 어부는 처음 보는 고기라서 그 고을 원님을 찾아가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자 원님이 그 고을 원의 이름 첫 글자와 어부의 성을 합해서 지은 이름이 명태라고 한다. <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에서
“우리 일행이 금구도 부근에 이르렀을 때 한창 무르익은 성게 축제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작은 항구에 넘치는 활기를 뒤로 하고 우리 여정은 대진리大津里에 이른다. 대진 앞 바다에 거무섬이라는 검은 빛깔의 바우가 있다. 툭 튀어나온 바닷가 난간에 세워진 대진등대를 바라보며 도착한 마차진麻次津, 그곳 북서쪽에 봉화봉은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어 북쪽으로 정양산, 남쪽으로 죽도에 응했다고 한다.
명파리를 통과하다
조선시대 명파역明坡驛이 있었던 명파리에 이른다. 명파 남서쪽에 잔재이라고 부르는 반전半田마을은 1945년에 38선 이북 지역이었다가 1950년 정전협정에 따라 완충지대가 되었다.
마차진리에 이르기 전 통일 안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교육을 받은 뒤에 7번 국도를 따라 제진리, 사천리, 송현리를 지난다. 그곳에서 통일전망대가 멀지 않다. 통일전망대를 가만가만 오른다. 그 아래 걷고 싶어도 걸을 수 없는, 우리의 발길이 허용되지 않는 북녘 땅이다.
“온갖 것 보러 태어났건만 온갖 것 보아서는 안 된다 하더라.” 괴테의 문장처럼,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곳, 한반도 북쪽 땅이다. 그러나 “발은 땅 위에 있어도 뜻은 구름 위에 있다.”는 옛말처럼 자유로운 영혼이야 어디인들 갈 수 없겠는가?
통일 전망대에서 북으로 펼쳐진 해금강을 바라보는데, 문득 구름이 걷히며 금강산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너무도 선명하게 보이는 금강산의 모습에 그리움은 더욱 커지고……, 기쁨만큼이나 큰 아쉬움을 안고 전망대를 내려와 다시 7 번 국도를 따라 해변 길로 내려간다. 갑자기 길이 끊긴다. 끊어진 7번 국도는 수풀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맹자는 “산길도 많은 사람이 다니면 큰 길이 된다.” 고 했는데, 길이 막히다가 보니 사람의 통행마저 끊어진 지 오래다. 사람의 발길을 기다릴 휴전선 155마일 최북단 동해 바닷가 길, 언제 쯤 우리의 발길을 자유롭게 허용할 수 있을까? 저 길을 마음껏 걸어 두만강에 갈 수 있는 그 날을 염원하며, 내 영혼의 자유로운 통행로를 만들어 북녘 땅에 들어선다.“
신정일의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중에서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이 아름다운 부석사를 보고서 고치령을 넘는다. (0) | 2015.10.28 |
---|---|
을미년 가을에 선유도와 고군산군도의 섬들을 가다. (0) | 2015.10.28 |
어제 지나온 의주대로를 회상하며 (0) | 2015.10.28 |
세계 문화유산 백제의 마지막 고도 부여를 걷는다. (0) | 2015.10.28 |
유서 깊은 절 안동의 봉정사와 천하의 절경 회룡포를 가다. (0) | 2015.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