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산의 명물 부대찌개로 저녁을 먹으며 반주로 마신
맥주 한 잔 반의 의력에 의해서라기 보다
지난 밤에 설친 잠으로 인해 고목이 쓰러지듯 잠자고 일어나니 새벽 다섯시,
창문 너머로 들리는 풀벌레 소리가 가을을 알리고
지나간 어제 일들이 다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세월속에 변하지 않는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서대문이라고 불리던 돈의문은 흔적도 없이 차들만 쌩쌩거리며 지나고
그 고개 마루 강북 삼성병원 앞 마당에 경교장이 있다.
백범 김구선생이 머물다가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한 현장이다.
그날 그대로 김구선생이 앉아 계시던 곳과 창문에 난 총탄 자욱,
다시 복원해서인지 창문을 만져도 유리 그대로다.
신문로를 지나며 본격적인 의주대로가 펼쳐진다.
경교장 앞 조선시대 경기영터를지나고
계속 길을 따라 올라가자 조선시대 사신들을 영접하던 곳이자
조선의 사신들이 사대례를 행하던 모화관 터가 표지석만 남아 있다.
이곳 모화관터에서 김지하 시인이 <모화관 옛터>라는 시를 남겼다.
모화관은 태종 7년인 1407년에 개성의 영빈관을 모방하여 건립되었다.
모화관터를 지나면 독립문이 나타난다.,
청나라로부터 독립되었다는 의미로 서재필박사가 이끌던 독립협회가 1896년에 주축이 되어 세운 문이다.
독립문을 지나면 무악재에 이른다.
지금은 완만한 고개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매우 높고 험한 고개였다.
1448년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동월이 그가 지은 조선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기서는 천길의 험한 산세를 이루었으니 어찌 천만 군사만을 이기겠는가.
서쪽으로 하나의 관뭇을 바라보니 겨우 말 한 필만 지날 수 있겠다.
홍제원에서 가다가 5리도 못되어 하늘이 만든 관문 하나가
북으로 삼각산을 잇대고 남으로 남산과 연결되어
그 가운데로 말 한필만 통할만하여 험준하가가 더 할 수 없다." .
이 고개는영조가 아버지 숙종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넘어 다녔다고 해서 추모현이라고도 부른다.
이 고개는 1935년부터 넓혀져서 1960년대에 2차선이 되었고 지금은 더 넓혀져 수맣은 차들이 다니고 있으니,
무악재를 넘어서면 지하철 홍제역 부근에 홍제원 터 표지석이 서 있다.
홍제원은 고레 성종 사년에 정현이란 승려가 세웠다고 한다.
이긍익이 편찬한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중국 사신들이 서울에 오는 날에는
그 정자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쉬어갔다고 실려있다.
이 홍제원에 환향녀의 슬픈 역사가 서려 있다.
ㄴㅁ한상성에서 인조가 항복한 후 끌려갔던 조선 여자 4.5십만명이
다 청나라 사람들이 ㅐ를 배가지고 돌아오자 집집마다
이혼문제가 불거졌다.
그 때 궁여지책으로 조정에서는 각도에 강을 정하고
그 강에서 몸을 씻으면 다시 쇠절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홍제천도 그 강중 하나였다.
얼마나 슬프고 아픈 역사인가?
이곳의 돌다리가 서석게 다리라는 홍제교였는데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파내에 가져다 썼다고 한다.
"홍제원 너머 서석게 다리 여러 천 년 묻혔더니 경복궁
이룩시에 세상 구경 다시 했네".
그당시 민가에서 불려졌던 노래였다.
그 옆에 있는 시장이 떡을 팔았던 병전거리고
병전을 지나면 녹번동에 이른다.
녹반현으로 옛글에 실려 있는 녹반은 산골을 말하는 것으로 이 고개 석벽에서
산골이 많이 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골은 이황회철 산화철을 주성분으로 하는 푸른빛을 띠는 누런색의 쇠붙이로
곱게 갈아 마시거나 몸에 바르면 접골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산골 팝니다."라고 쓰여진 문을 밀고 들어가니 중년의 남자가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의 조부께서 백여년 전부터 채취하기 시작했다는 산골은
뼈가 금이간 사람에게 특효약으로
몇 십년 전만해도 한 달 먹는 약값이 쌀 세가마니정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약 8만원 정도라고 하는데, 빛이나는 쇠붙이가
어떻게 몸에 들어가 그 효험을 ㅇ리으키는지
세상은 다 기적같은 일이 비일비재 일어나는 비밀의 화원이다.
이렇듯 사연이 많은 나라에서 큰 길 <의주대로> <관서대로>를
자치단체에서는 '의주길'이라고
'영남길' '삼남길'이라고 명명하고 있으니,
역사 속의 길, 나라의 큰 길을 '소로길, '고샅길,' '골목길'과 같이
치부하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인가?
"말을 들어보니 우리는 약소민족이라 하더군"이라고 황동규 시인의 시 구절 같은
일이 현재에도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 가슴이 아플 뿐이다.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부렸던 일본이나 중국에서 한것도 아니고 우리 스스로가
낮추어서 도로명 주소에서도 큰 길을 '대로' '로'라고 부르고 작은 길을
'길'이라고 부르는데,
아이고 생각할 수록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것은 속 좁은 나만의 병통일까?
오늘 의주대로의 마지막 지점 임진나루와 도라산 역을 비롯한 의주대로 관서대로는
나를 어떤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지
서글프면서도 설레는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이다.
을미년 구월 초아흐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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