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한 겨울에 남한강변의 폐 사지를 거닐다.

산중산담 2016. 3. 3. 09:45

 

한 겨울에 남한강변의 폐 사지를 거닐다.

 

한 겨울에 가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폐사지입니다. 겨울나무들이 헐벗고 서 있는 그 가운데 탑 하나 석등 하나 남은 폐사지의 여운을 만나러 남한강변으로 갑니다. 나라의 중앙에 세워진 중앙탑과 목계장터 그리고 엄정면 괴동리 백운암에 갑니다.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 민비가 이곳에 피난을 왔을 때 점을 쳐서 환궁을 예언했던 진영군이 지은 절입니다. 그 부근의 억정사터에 아름다운 비석인 대지국사비가 있습니다. 청룡사와 거돈사 그리고 법천사로 이어질 이번 폐사지 답사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대지국사비는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억정사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탑비로 1393(태조 2) 건립. 비신높이 267, 너비 130, 두께 24. 보물 제16. 화강석재로서 개석은 없고 비신의 상부를 좌우로 귀접이하였는데,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다.

비문은 박의중(朴宜中)이 짓고 승려인 선진(旋軫)이 쓰고 또 전액도 하였으며, 국사의 문인인 중윤(中允)이 세우고 혜공(惠公)이 각자하였다. 비문에 국사의 이름은 찬영(粲英),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菴), 속성은 한씨이고 양주 사람이다.

, 지감국사와 탑명인 혜월원명(慧月圓明)은 시호임을 밝히고, 이밖에도 충숙왕 15년에 출생하여 14세에 수법하고 공민왕의 명으로 내원(內院)에 들어가 왕을 보살피고, 우왕·창왕에게도 충성을 다하였으며, 공양왕 2년에 63, 승랍(僧臘) 49세로 입적할 때까지의 경력과, 대사의 천부의 자질과 인품·학력 등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음기(陰記 : 비 뒤에 새긴 글)에는 국사의 문도들과 속인으로서의 문도들의 이름을 새겼다. 글씨는 그 당시 이미 송설체가 유행할 때였으나, 그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왕희지(王羲之)의 법을 잘 체득한 것으로서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의 법을 겸수한 듯한 느낌이 드는데, 필력이 주경하고 결구도 잘된 작품이다.

조선에 들어 송설체가 크게 유행하면서 점점 서격(書格)이 보잘것없이 떨어지게 되는데, 이 비는 그 과도기의 것으로 고려의 마지막 글씨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백운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886(조선 고종 23) 진령군(眞靈君) 파평윤씨가 세웠다. 창건주 윤씨는 본래 무당이었다고 하며,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장호원읍으로 피난왔을 때, 곧 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을 예언하여 진령군 여대감(女大監. 당상관 삼품)이라는 벼슬을 얻었다.

공경재상들까지도 그녀 앞에 허리를 굽혀 아첨에 바빴다.

1886년 꿈에 흰옷을 입은 철불이 나타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으라고 계시하여 지은 절이라 하나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1977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법당과 삼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법당은 창건 당시에 세운 것으로 내부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철불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철불좌상은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근래에 갈라진 부분에 석고를 바르고 금색으로 칠하였다. 불상 뒤로는 후불탱화와 신중탱화·지장탱화가 걸려 있다.

 

천 몇 백 년의 세월을 견디고도 의연하게 솟아있는 중앙탑(국보 6)를 바라보며 목계가 멀지 않음을 안다. 이곳 중원은 고구려 때는 국원성이라 불리다가 신라가 이곳을 빼앗은 다음 진흥왕 때에는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귀족들과 6부 호민을 옮겨 살게 한 다음 경덕왕 때 이 지역을 중원경으로 고쳐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남에서 오고 북에서 오던 두 스님이 강가에서 마주쳐 얘기를 주고 받다보니 두 스님은 남쪽 끝과 북쪽 끝에서 한 날 한시에 떠났음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곳이 이 나라의 한 복판임을 알고 탑을 세웠다. 그 탑이 중앙탑이고 그래서 중앙탑은 중원문화의 상징이며 중원문화권이라는 이름으로 나라 안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문화권’, 내포를 중심으로 내포문화권’, 고령김해 일대의 가야문화권’, 공주부여의 백제문화권등의 영향을 받아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북도 일대에서 완산문화권을 제정하자고 몇 년 전부터 제안했지만 논리도 성립되지 않는 조선문화권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못 받고 있으니...

아직 이른 남한강 변에 새들이 날아오르고 차는 목계 다리를 건넌다. 서울시에서 편찬한 한강사목계는 강 건너에 가흥리를 마주보고 있는데 가흥에는 남한강 수계(水系)에서 가장 큰 세곡창이 있었다고 한다. 충주, 음성, 괴산, 청안, 보은, 단양, 영춘, 제천, 황간, 영동, 청풍, 연풍, 황산 등 열세 개 고을에서 거둬들인 세곡들이 이 목계나루에서 배에 실려 서울의 마포나루로 운송되었다. 그래서 이 나루에는 항상 51척의 선박들이 배속되어 있었으므로 남한강에 있는 수많은 나루터 중에서도 가장 번잡한 나루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번잡한 나루였던 목계장터

서울에서 소금 배나 짐배가 들어오면 아무 때나 장이 섰고 장이 섰다하면 짧으면 사흘 길면 닷새나 이레씩 섰던 목계장은 한 달에 한 번 쯤 섰다. 그러나 날이 가물어 물길이 시원치 않거나 날이 얼어붙어 배가 오지 않을 때에는 두 달에 한 번씩 섰다고 한다. 시인 신경림은 그의 절창 목계장터에서 그 당시의 목계장터를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 분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산허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하네

충주시 중원군 소태면 오량리 청계산 자락에 청룡사靑龍寺터가 있다. 잡목이 우거진 산길에 들어서서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유물이 숙종 18년에 세워진 청룡사 위전비이다. 그 곳에서 참나무 숲이 무성한 길을 조금 돌아가면 적운당이라는 이름이 적힌 석종 모양의 부도가 나타나고 곧바로 올라가면 부물 제656호로 지정된 사자석등과 국보 제197호인 보각국사 정혜원융탑普覺國師 定慧圓融塔이 있고 그 뒤에 보물 제658호인 보각국사 정혜원융탑비가 서있다. 비문에 따르면 태조 3(1394)에 건립된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조선시대 부도의 귀중한 유물로서 팔각원당형을 따르면서도 새로운 양식을 보이는 석조 유물이다. 하대석 옆면에는 문양이 없지만 뒷면에는 16판의 연꽃잎이 엎어져 새겨졌으며 신상형의 꽃이 장식되어 있다. 탑신은 구형(球形)에 가까워 회암사지 부도를 연상케 하지만 그보다는 8각의 형태가 뚜렷하게 나있다. 옥개석屋蓋石 상륜부를 보게 되면 태극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이는 경주 감은사지의 석재에 새겨진 태극문양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불교가 호국불교였기 때문에 태극문양이 불교미술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은 상륜부가 땅 속에 파묻힌 채 쓰러져 있던 것을 1968년에야 제자리에 복원하였다. 그러나 보각국사의 사리와 옥으로 만든 촛대, 금송아지, 금잔 등의 장신구는 일제 말엽에 도둑맞았다고 한다.

부도 탑 뒤에 세워진 보각국사 부도비는 조선 태조 3년에 태조 이성계가 보각국사를 기려 세웠지만 머릿돌은 사라지고 비신만이 서 있다. 비의 앞면에는 보각국사의 행장이 쓰여 져 있고 뒷면에는 200여명에 이르는 그의 제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내려가는 길에는 청룡사에 들리는 목탁소리가 아련하고 발목까지 빠지는 낙엽들의 잔해를 밟으며 오랫동안을 헤매다가 청룡사에 닿아 주지(현우)스님이 건네주는 박카스 한 병을 받아 마셨다. 이 절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을 중원군에서 복원하여 국보로 지정되면서 조사와 복원 문제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주지스님(현우)이 이절에 쏟은 정성이 아니었다면 이 절이 이만큼 복원되고 발전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걸어서 청룡사에 이르니

절도 한가롭고 중 또한 한가롭다

어찌하여 종소리 들리지 아니하는가,

 

다시 사적 168호로 지정되어 있는 거돈사(居頓寺)지로 향한다.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 정산리 한계산 자락에 있는 거돈사지 역시 남한강 변에 있는 여러 폐사지들 처럼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절터에 남아있는 여러 가지 유물들로 유추해 볼 때 통일신라 말에 창건되어 고려 때 전성기를 누렸던 절일 것이라고 추정해 볼뿐이다.

지금은 폐교가 된 정산 초등학교를 지나면 부석사의 대석단과 비슷한 석축 위로 천년 세월을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먼저 눈에 띈다.

거돈사터는 약 7500여 평의 절터에 금당 앞의 삼층석탑(보물 750)과 금당 터에 놓여 진 불상대좌와 원공국사의 승보탑비(보물 제 78)가 남아있을 뿐이다. 원공국사의 생애와 행적 그리고 국사의 덕을 기리는 송()이 실려 있는 이 비문은 최충이지였고 김거웅이 전액을 썼다. 비문은 해서이며 서체로 구양순과 그의 아들 구양통의 필법이 어우러진 것으로 필획이 힘차고 아름답다는 평을 받고 있다. <조선금석고>자경 6푼의 해서로 구양순체를 체득하였다.”라고 적혀있다. 원공국사가 사람들에게 좋은 일에 대하여 사양하지 아니하였으며 행상인들이 권태를 느끼면 화성(법화경중, 화성 비유퓸)을 보여주어 용기를 내게 하고 방랑하는 탕자가 의심을 일으키면 모름지기 보물창고를 열어 보여주어 (법화경 신해품의 내용) 곧바로 섭취케 하였으며 칼이 거울로 말미암아 또 하나의 거울을 나타나는 것과 같았다.”라고 하여 원공국사의 대중들에 대한 태도와 그의 실천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절 거돈사터에는 천태 학승이었던 원공국사가 열반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공국사의 법호는 지종이었고 속성은 전주 이씨였으며 여덟 살 때 개경의 사나사에서 인도의 스님이었던 흥법 삼장의 제자가 되었고 광화사 경철화상에게서 수업을 받는다.

어린 나이에 배움이 하도 뛰어난 그를 보고 사람들은 누가 그를 유학(幼學)이라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한다.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뜻을 지닌 법천사(法泉寺)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다.

진리가 샘물처럼 솟아나는 절

신라 성덕왕 24(725)에 창건되어 법고사라고 불리던 절이었으며 고려 문종 때 지광국사가 머물면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유방선(柳方善)이 머물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 때 수학한 사람들이 한명회, 강효문, 서거정, 권람 등이 있다. 그 뒤의 절의 역사는 자세히 전해지지 않지만 절이 폐사된 뒤 거대한 절터에 민가가 들어서고 절에 쓰였던 돌은 마을 들머리의 느티나무를 둘러싼 축대가 되었거나 민가의 주춧돌 또는 담이 되기도 했으며 논밭이 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이자 혁명가인 교산 허균許筠<원주 법천사기>를 남겼다.

원주의 남쪽 50리 되는 곳에 산이 있는데, 비봉산飛鳳山이라고 하며, 그 산 아래 절이 있어 법천사라고 하는데, 신라의 옛 사찰이다..... 금년 가을에 휴가를 얻어 와서 얼마 동안 있었는데, 마침 지관智觀이라는 승려가 묘암墓菴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그로 인하여 기축년에 일찍이 법천사에서 1년간 지낸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유흥遊興이 솟아나 지관을 이끌고, 새벽 밥을 먹고 일찍 길을 나섰다. 험준한 두멧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소위 명봉산鳴鳳山에 이르니, 산은 그다지 높지 않은 봉우리가 넷인데, 서로 마주보는 모습이 새가 나는 듯 했다. 개천 둘이 동과 서에서 흘러나와 동구洞口에서 합쳐 하나를 이루었는데, 절은 바로 그 한가운데에 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리에 불타서 겨우 그 터만 남았으며, 무너진 주춧돌이 토끼나 사슴 따위가 다니는 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비석은 반 동강이 난 채 잡초 사이에 묻혀 있었다. 살펴보니 고려의 승려 지광智光의 탑비塔碑였다. 문장이 심오하고 필치는 굳세었으나 누가 짓고 누가 쓴 것인지를 알 수 없었으며, . 나는 해가 저물도록 어루만지며 탁본을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중은 말하기를 이 절은 대단히 커서 당시에는 상주한 이가 수백이었지만, 제가 일찍이 살던 선당禪堂이란 곳은 지금 찾아보려 해도 가려 낼 수가 없습니다. 하여 서로 바라보며 탄식하였다.” 허균이 살았던 당시에도 폐허가 되었던 법천사지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폐사지로 남아 있다가 발굴이 시작된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현재는 법천사지의 발굴을 위해 민가들을 철거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을씨년스런 풍경이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헤아릴 길이 없는, 노목을 지나서 좌측으로 꺾어진 산길을 한참 오르면 여러 가지 석물들과 함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국보 59)가 한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절 건물은 찾아볼 수 없고 석불만 남아있는 이 절에서 당대의 제일가는 고승 지광국사가 출가하고 열반에 들었다. (...)

비신 상면의 가운데에 지광국사현묘탑비라고 쓴 사각 편액이 있으며 편액 양 옆에는 사각의 틀을 만든 후 그 안에다 봉황을 새겨 넣었다. ‘부처님에 버금가는 큰 인물이라고 추앙을 받았던 지광국사의 행적을 적은 이 비문은 당대 명신 정유산이 찬하고 명필 안민후가 썼는데 글씨는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러움과 단아함을 추구하여 썼으며 이영보와 장자춘이 새겼다. 이 비 옆에는 지광국사의 현묘탑이 서있다.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보기보다 페르시아 풍의 이 부도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오사카에 강제 밀반출 되었다가 8.15 광복 이후 다시 반환되어 경복궁 뜰에 세워졌다. (...).

이능화는목선불교통사에서 원주 지광국사 현묘탑은 정교의 극치를 이룬다.”고 평가하였는데 경복궁 안에 쓸쓸히 서있는 지광국사 현묘탑은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먼 곳에서 법천사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법천사 터가 있는 부론면은 향나무가 많기로 옛부터 이름이 높았다. 이 향나무는 법천사에서 퍼져 나간 것으로서 육십년 대 초까지도 산과 들에서 임자 없이 자랐는데 이 부론 향나무의 종자가 좋아 도시 사람들이 자기 집 정원을 꾸미려고 많이 캐가는 바람에 그 수효가 몰라보게 줄어들었다.

햇살은 부드럽고 잔디밭 위에 누워 잠을 청한다. 잠에 취한 우리들의 꿈속에 지광국사나 또 다른 현인賢人이 나타나 새로운 세상을 제시해 주거나 사랑이 없는 이 시대에 새로운 사랑 법을 주지는 않을는지 모르지만, 기대는 기대로만 머물고 다시 우리들은 세상 속으로 돌아가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