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다리는 몇개일까?
청계천 홈페이지 제공 : 총22개
전통사회에서 다리는 단순히 물을 건너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서울사람들의 생활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땅한 공공장소가 없었던 시절
다리는 약속과 모임의 장소였고
길 가던 사람들이 쉬어 가는 쉼터이기도 하였다.
다리가 있음으로 인하여 동네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반대로 부근 동네 이름을 따서 다리에 붙이기도 하였다.
다리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가 생겨났으며
웃음과 지혜가 담겨있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도성의 다른 곳에 놓여 있던 다리보다 비교적 크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다.
그런 만큼 청계천의 옛 다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청계천의 중요한 문화적 유산이었다
좋은 글 모셔옴 글 자료 : http://www.kizcosmos.x-y.net/cgi-bin/read.cgi?board=ajan_08&y_number=1048&nnew=1
초보산꾼과 함께 걷게 될 청계천의 다리만 모아 봤습니다.
좋은 자료가 되시길,,,
모전교(무교동사거리) - 종로구 서린동∼중구 무교동
조선시대 이 다리 모퉁이에 토산 과일을 파는 가게인 과전(果廛)(모전(毛廛)이라고도 함)이 있었으므로
모전교(毛廛橋)・모전교(毛前橋)・모교(毛橋)・모전다리라고 하였으며, 달리 한자명으로 우전(隅廛 모퉁이가게)다리라고도 하였다
광통교廣通橋 - 종로구 서린동∼중구 다동
지금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었던 다리인데 광통방에 있는 큰 다리였으므로 처음에는 대광통교라 하였다.
특히 옛부터 서울에서는 큰 다리로 알려져 정월 대보름이 되면 도성의 많은 남녀가 이 곳에 모여 답교놀이를 하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주변에 시전이 위치 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는데 흙다리이다 보니 자꾸 유실되어
이 곳에 석교로 가설한 것은 태종 10년(1410) 8월이다.
가장 원형에 가깝게 복원된 다리입니다. 한자도 많이 남아 있고...
광교 - 다동 음식문화 특화거리 - 종로구 관철동∼중구 삼각동 광통교가 있던 자리에 새로 놓인 차도교
옛 광통방 인근에 있던 크고 넓은 다리라는 의미에서 광교라 일컬어졌으며, 현재 광교 사거리가 이 위치에 해당된다.
장통교長通橋 - 종로구 관철동∼중구 장교동
청계천 본류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지점에 있었는데 숙종이 장희빈을 처음 만났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이 다리 부근에 긴 창고가 늘어서 있었다고 하여 장창교(長倉橋)・장찻골다리, 줄여서 장교(長橋)라고도 불렀다
조선시대 5부 52방 가운데 하나인 장통방(長通坊)이 있던 자리라 하여 장통교, 혹은 줄여서 장교라 하였다
삼일교三一橋 - 인사동 - 종로구 관수동∼중구 수표동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한 뒤 전국에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시위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로 이름을 삼일로라 하였고 다리 이름도 여기서 유래되었다. 다리 인근의 인사동과 명동성당 등을 연계한 근대 건축의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다른 다리와 다르죠? 현대 건축의 이미지를 담았다고 하는데... 무슨 의미일까요? 미술은 잘 몰라서...
수표교 - 종로구 관수동∼중구 입정동
광통교와 함께 가장 유명한 다리로 1420년(세종2)에 만들어졌다. 당시 이곳에 마전(馬廛)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으나,
1441년(세종 23)에 다리 옆에 홍수에도 대비하고 개천의 수위를 측정 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이후 수표교라고 하였다.
수표교는 1773년 무렵 연암 박지원이 친구들과 통행금지를 무시하고 깊은 밤 달빛을 즐기던 장소다.
이 수표는 세종 때 발명된 하천 수위계의 전통을 이은 유일한 유물이다. 전체적으로 우아한 모양을 가진 점 등에서 매우 귀중한 과학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관수교 - 종로구 세운상가∼중구 대림상가
청계천 준설작업을 위한 준천사가 설치되어 있었고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옛 교량
준천사(濬川司)... 지금으로 말하면 국책사업 정도? 그만큼 청계천 준설은 중요했다는 방증...
세운교 - 세운상가 - 종로구 예지동∼중구 주교동 조선시대 효경교(孝經橋)가 있던 자리
이 근처에 소경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맹교(盲橋)ㆍ소경다리라고도 하였는데, 세운상가 옆 아세아전자상가 동쪽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로부터 소경이 많이 모여 살아 ‘소경교’로 불리다 ‘효경교’로 이름이 바뀌었던 이 곳은 인터넷 투표 결과 세운교로 결정됐다.
하늘을 향한 탑이 인상적이네요... 정신 바짝 세우고 세계로,,,
배오개다리 - 종로구 예지동∼중구 주교동
현 배오개길과 연결되는 차도교로 과거 이 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여러 그루 심어져 있어 배나무고개, 배고개라 하다가 음이 변한 것이다
새벽다리 - 종로구 종로5가∼중구 방산동
동대문 시장의 시작지점인 광장시장 인근으로 방산시장과 광장시장 등 새벽시장의 활기와 향수를 담아 ‘새벽다리’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반쯤 떠오른 해? 다리 위 시설물의 정체는? 그것이 궁금하다... 해뜨기 전에 새벽을 열어야 하는데...
11 마전교 - 종로구 종로5가∼중구 방산동
현재 청계 5가 사거리 동쪽 방산시장 앞으로 추정된 다리 부근에서 우마를 사고 팔던 마전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차도교
나래교 - 종로구 대학천남길∼중구 을지로6가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모양으로 만드어진 보도교로 나비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것처럼 세계패션 1번지로 비상하라는 뜻
나비가 정말 나래를 펴고 있네요... 정말 세계에서 알아주는 패션의 나라 한국 최고 !!!
전태일 다리(버들다리) - 종로구 종로6가∼중구 을지로6가
과거 오간수문 상류에 와버들이 많았다는 데서 유래한 차도교로
1970년대 이 곳은 봉재공장이 들어서 있던 곳으로, 성장과 생산 일변도의 정책이 낳은 열악한 작업 환경이 결국 전태일이라는 열사를 만든 곳이다
2012년 11월일 버들다리와 전태일다리를 병행하기로 결정 명명식을 가졌다
전태일 흉상이 다리 위에 있는 것 아시죠? 역사도 살려야 하고... 열사의 정신도 살려야 하고... 다리 이름에 고민이 느껴진다
오간수교(청계6가) - 종로구 창신동∼중구 흥인동
동대문에서 을지로6가로 가는 성벽아래 청계천 6가에 있던 다리로,
성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하기 위하여 성벽 아래에 수문(水門)이 다섯칸으로 되었다 하여 오간수다리라고 하였다.
초보산꾼과 함께 정순왕후의 흔적을 찾아서에 함께 하신 산우님들은 아시죠? 오간수문...
맑은내다리 - 종로구 창신동∼중구 흥인동
청계천을 순 우리말로 바꾼 이름의 보도교
다산교 茶山橋 - 종로구 숭인동∼중구 황학동
조선중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호를 따서 붙인 다산로로 이어지는 차도교
영도교 - 종로구 숭인동∼중구 황학동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아내 송비와 이별한 장소로 다시 만나지 못해 ‘영영 이별 다리’, ‘영영 건너간 다리’ 등으로 불린 데서 유래했다
원래는 영미교라는 이름의 나무 다리였으나 성종이 돌로 가설했다가 경복궁 재건시 석재를 뜯어가는 바람에 다시 나무다리로...
중량천에서 만나게 되는 살곶이다리와 함께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는 다리이다
가운데 원형으로 만든 이유는 뭘까요? 어린 단종과 단종의 비가 손을 맞잡고 이별하는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황학교 - 동대문구 신설동∼성동구 왕십리동
황학이 날아왔다는 논밭 인근에 위치한 황학동의 이름을 딴 이름
그런데 학은 맘꺽 날아왔다 날아가야 하는데... 새장을 만들어 놓았네요? 지금 살아가는 사람이 우선인겨?... ㅋㅋ
비우당교 - 동대문구 신설동∼성동구 왕십리동
조선 세종 때 청백리로 유명한 하정 유관 선생이 살던 집인‘비우당’을 본 떠 이름을 정했다.
그의 청령함은 비가 오는 날에도 방안에서 우산을 들고 피했을 정도였다고 하여 유래한 이름이다.
무학교 無學橋 - 동대문구 신설동∼성동구 왕십리동 무학로와 연결되는 차도교
조선시대 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가 도읍을 정하기 위해 지리를 살피던 중 왕십리지역까지 왔으므로 도로명을 무학로라 하였고,
여기서 다리 이름이 유래되었다
21. 두물다리 - 동대문구 신설동∼성동구 마장동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세워졌다고 해서 이름 붙은 보도교
두 물길이 만난다는 뜻으로 붙인 두물다리 이름에는 화합의 의미도 담겼다.
두 개의 물이 만나는 다리라는 뜻. 다리 모양도 서로 만나는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최고의 작품입니다. 따로 소개 합니다.
고산자교(버들습지) - 동대문구 용두동∼성동구 마장동 고산자로와 연결된 차도교
고산자교엔 조선시대 30여년 동안 방방곡곡을 걸어다니며 실측조사로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리학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인근에 살았다는 역사적 숨결이 담겼다
청계천 복원 구간 제일 끝의 버들습지가 제8경으로 수생식물을 심어 놓은 자연생태 공간이다.
청계9가 성동사회복지관 앞에 놓인 두물다리는 보행자 전용이다. 반면 고산자교는 사람과 자동차가 함께 다닐 수 있다.
여기부터 생태습지를 비롯해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기대하시죠..
청계천에 놓인 다리는 끝이나고 계속 중량천으로 이어진다
내부순환로를 따르고
중앙선 신답 新踏철교
이름은 답십리 동명에서 유래되었
제2 마장교
중량천 살곶이 다리
초보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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