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강 기행> 비단 결처럼 아름다운 금강錦江 천리 길을 첫 번째로 걷는다.
2016년 1월에 시작한 섬진강 530리 도보답사를 마치고 <한국의 강 기행>기행 두 번째로 금강 천리 길 장정에 오릅니다. 마한의 역사, 백제 패망의 역사, 후백제와 정여립 사건이라고 일컬어지는 <기축옥사>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는 강이 금강입니다.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신무산 뜸봉샘에서부터 비롯되는 금강은 진안, 무주, 금산, 영동, 옥천, 대청댐을 거쳐 신탄진을 지납니다. 그 번성했던 세종시의 부강포구를 거쳐, 백제의 두 번째 서울인 공주를 거쳐 세 번째 서울인 부여에 다다릅니다. 백제 흥망의 현장을 지켜 본 부소산 자락을 지나 구드래 나루를 거쳐 강경에 이르고 익산 웅포와 군산의 공주산을 거쳐 군산과 서천을 가로 지른 금강 하구둑에 이릅니다.
금강 천리 길을 걸으며 이 땅의 역사와 문학, 그리고 이 땅에 스며있는 철학을 베우게 될 금강 도보답사에 참여를 바랍니다.
“ 뜬봉샘 500m라는 나무 푯말이 뜬봉샘회, 팔공청년회 이름으로 세워져있고, 평원 같은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자 먼저 온 일행들이 젯상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들이 춤을 춘다는 뜻을 지닌 신무산 밑에 뜬봉샘이라고 새겨진 바위 표지판이 서 있고, 잘 정비된 뜬봉샘은 제법 많은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뜬봉샘이라고 부르는 이 샘을 하천 연구가 이형석 선생은 밥내샘으로 부른다. 그 이유는 고개 너머에 식천리가 있고 수분리에서 식천(食川)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밥이 타는 냄새가 난다는 의미를 지난 밥내고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 정상이 바로 위쪽임에도 불구하고 가뭄에도 끊이지 않고 솟아난다는 저 물길은 어디서 솟아나는 것일까.(...)
금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이 물이 가장 근접한 골짜기 강태등골을 흘러 장수천으로 흘러갈 것이다. 좌우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고 수분리에 이르러 가야할 사람은 가고 남는 사람은 남는다. 한 걸음 한걸음 하구를 향해 따라가야 할 금강은 어떠한 강인가. 나라 안에서 여섯 번째이며 남한에서는 낙동강, 한강에 이어 세 번 째로 길며 총 유역 면적만 해도 9천8백86㎢에 이르는 금강을 역사의 기록인《당서 唐書》에서는 웅진강(熊津江)이라고 기록하였다. 금(錦)은 원어 ‘곰’의 사음(寫音)이다. 곰이라는 말은 아직도 공주의 곰나루()라는 명칭이 남아있다. 일명 호강(湖江)이라고도 부르는 금강의 발원지는 어디인가.《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수분현(水分峴) :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골짜기의 물이 하나는 남원으로 향하고 한줄기는 본현으로 본현으로 들어와 남천이 되었다. 이것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남천은 북으로 흘러 용담현 경계로 흘러간다.」고 기록되어 있는 금강은 여러 가지로 불리우고 있다. 즉 상류에서부터 적등진강(赤登津江), 차탄강(車灘江), 화인진강(化仁津江), 말흥탄강(末訖灘江), 형각진강(荊角津江) 등으로 되어 있으며, 공주에 이르러서는 웅진강, 부여에서는 백마강, 하류에서는 고성진강(古城津江)으로 되어있다. 현대 문헌으로「한국지명사전」에서는 육십령과 천마청산,「한국지명요람」과「큰사전」(한글학회),「새한글사전」에는 전북 장수군,「국어대사전」(현문사)과「세계대백과사전」(학원사)에는 소백~노령산맥 사이,「한국지명총람」에는 신무산 수분이 고개로 표기되어 있다. 동아 세계대백과사전에는 장수군 소백산맥 서사면에서 발원한다고 지명에도 없는 부분을 명시하고 있다. 십여년 전만 해도 수분이 고개에 있는 김세호씨 집의 남쪽 처마로 떨어지는 빗물은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북쪽으로 떨어지는 빗물은 금강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새로 집이 지어져 그렇지가 못하다. 수분리 남쪽에 있는 고개인 수분재는 해발 600m쯤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이 섬진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금강이 되기 때문에 물이 나뉜다는 뜻의 수분이 고개라고 하였다.
수분원터는 사라지고
이곳에는 조선조 때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던 원집이 있었다. 사리원, 장호원, 조치원, 영원, 오원 등과 같은 의미의 원이 있었던 이 고개에는 현재 주유소와 식당이 들어섰고 길손이나 관리들이 묶어갔던 수분원은 사라지고 없다. 졸졸 흐르는 강이 수분 남쪽에 있는 강태들골을 쑤시고 개정리에서 이평천을 받아들이며 강은 제법 구색을 갖추고 흐른다. 계단식 논들이 다랑다랑 펼쳐진 이곳에 웬 들판은 그리도 많은지 온숫골 들판, 언굿볼 들, 진압봇 들이 펼쳐진 이 지역에는 흉년에 해구에게 팥죽 한 그릇 얻어먹고 넘겨주었다는 팥죽 배미라는 논이 있다.(...)
조선시대 하나의 현이었던 장수의 백제 때 이름은 우평雨枰현이다. 신라 때에 고택(高澤)으로 고쳐서 장계군에 딸렸다가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고려 말기의 문인 윤여형(尹汝衡)의 시에, “산길에 가을바람 새벽의 찬 기운을 빚어내고, 서리 맞은 황엽은 말안장에 가득하네” 하였던 장수는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목으로 높고도 험한 산들이 즐비하다. 남덕유산․백운산이 있으며, 그 가운데 함양으로 넘어가는 육십령이 있다. 고개가 높고 험해서 60명이 모여야 넘었다고 하고, 고개의 구비가 60여 개가 되었다고 해서 육십령이라고 부르는 이 고개 마루를 사이에 두고 말씨와 풍습이 바뀌었다.
이곳 장수에는 ‘장수삼절’이라고 하여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세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논개論介의 충절이다.
논개의 죽음을 가장 먼저 주목하고 글로 남긴 사람이 조선 중기 설화문학의 대가인 유몽인柳夢寅이었으며, 설화집 <어우야담於于野談> ‘효열‘ 편에 다음과 같이 실었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官妓이다. 만력(萬曆. 중국 명나라 신종神宗의 치세治世. 연호年號) 계사(癸巳1593)년에 김천일金千鎰이 의병을 일으켜 진주에 들어가 왜적에게 항거하였다. 성이 함락되고 군대가 패하게 되자 백성이 모두 죽었다. 논개는 화장을 하고 복장을 단정히 한 뒤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섰다. 그 아ㅐ는 만길 높이여서 곧장 물길 속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여러 왜적들이 보고 좋아했으나 모두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한 장수가 몸을 뻗쳐 곧장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왜장을 유인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왜장을 끌어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임진란에 관기가 왜적을 만나 욕을 당하지 않고 죽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비단 논개 한 사람뿐만이 아니었으나 대부분 그 이름을 잃었다. 저들 관기는 음탕한 창녀이니, 정렬貞烈로써 일컬을 수가 없다. 그러나 죽음을 보기를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해서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았다. 저들 역시 임금의 교화를 입은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차마 나라를 배반하여 적을 따를 수 없었던 것이지, 별다른 충성심은 없었던 것이다, 아아, 슬프다.“
전쟁이 끝난 지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쓴 이 글 뒤에 함경도의 의병장이돈 정문부鄭文孚의 둘째아들인 정대륭鄭大隆이 논개가 몸을 던지 그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그 글자를 본 조선 후기의 문신 오두인吳斗寅이 의암기義巖를 새긴 것이 1651년이었다.
일찍이 수부 번영로가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은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보다 더 푸른/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이 흘러라/아리따웠던 그 아미/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 같은 입술/죽음을 맞추었네/아! 강낭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길이 길이 푸르르니/그대의 꽃다운 혼/어이아니 흐르랴아!/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라고 노래한 의기 논개는 선조 7년 9월 3일 현재 장수군 계내면 주촌마을에서 부친 주달문과 모친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길도 없는 강 길을 올라오면서 고기를 잡고 삶의 터를 잡은 뒤 땅을 갈아 농사 짓고 살았던 게 아니겠어”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문명이 갠지스강이나 유프라테스강 또는 황하강 유역에서 발달했듯이 우리나라 역시 강을 중심으로 문화가 발달했던 것이다. 강은 반달을 그리며 굽이쳐 흘러가고 그렇다. 우리가 걷는 이 아름답고 고적한 이 길이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천천교에서 십분 간 휴식을 취하며 다리에 몸을 누인 내게 <논어> 용야편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고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사느니라” 나는 어줍잖게도 산도 좋아하고 물도 좋아하는데 이 길을 따라 걷는 우리들은 지혜롭기도 하고 어질기도 한가. 글쎄, 자신이 없다.
산 위가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이름 붙은 산, 천반산 아래에서 남쪽 장수에서 흘러내려온 장계천과 동쪽 무주 덕유산에서 시작되는 구량천이, 파자 형으로 굽이쳐 흐르는 중간 지점에서 몸을 합하여 금강으로 태어난다. 이 지역 사람들이 어두운 곳을 이야기할 때 흔히 “구량천같이 어둡다”하는데 절벽이 높고 깊은 구량천과 장수천이 만나는 그 합수머리는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딴 데로 돌려지고 말았다.
천반산에는 명당이 있다
이곳 천반산 기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천반(天盤)․지반(地盤)․인반(人盤)의 명당(明堂)자리가 있는데, 이 산은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하여 천반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김진태씨가 이곳에 이사를 왔던 십여 년 전만 해도 5천여 평은 될 듯싶은 평지가 펼쳐진 이 산 정상에 세 가구쯤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잡목만 무성하고 군데군데 돌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저 천반산에 정여립 장군이 서있고, 부귀산에는 관군이 서있어 서로 싸웠다는 이야기와 함께, 송판서 굴에서 정여립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말이 전해져 내려오고, 약 15m쯤 되는 이 바위와 20m 거리로 마주보고 있는 뜀바위를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정여립 장군이 훌쩍훌쩍 뛰어다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그곳에서 30m쯤 바위 사이로 비탈진 길을 내려가면 천반산의 명물 송판서 굴이었다. 바위굴 2개가 15m쯤의 거리를 두고 서북쪽을 향하여 쌍굴을 형성하고 있는 이 굴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굴로서, 큰 굴의 길이가 7m쯤 되며, 10여 명의 사람들이 앉아 쉴 만한 넓이다. 이 굴의 중간쯤의 바위틈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끊이지 않고 흐르는 약수라고 전해지는 한 줄기 물길이 있다.
진안군 통계연보에 따르면 28년 전 이 천반산 아래 죽도 근처에서 정여립과 그의 일파가 쓰던 것으로 보이는 솥과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름이6m쯤 되는 거대한 돌솥이었는데, 솥이 어찌나 크던지 솥전 난간으로 젊은 장정들이 뛰어다녔다고 하며, 화살촉 한 개로 낫을 다섯 개나 만들고도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때 발굴된 돌솥은 어쩌다가 물 속으로 다시 잠겨버리고 말았고, 당시 돌솥을 실제로 보았다는 노인네들은 언젠가 그 돌솥이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여립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전주지역에서 활동한 시절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는데, 이 죽도에 건물을 지어놓고 훈련 때에 그 무기를 썼었다는 그것 역시 불운했던 혁명가 정여립에 대해 품었던 이 지역사람들의 애틋한 마음이 만들어낸 신화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란서에서 전해오는 말 “전설은 역사보다 좀 더 오래된 진리이다”라는 말을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허황된 말들만은 아니리라.(...)
조선 최초의 의문사라고 일컬어지며 정여립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3년 뒤에 일어났던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되새기며 나는 구량천과 장수천이 만나 금강으로 태어나는 곳 죽도에서 흐르는 금강 물을 바라다본다. 저 멀리 보이는 폭포는 원래는 병풍바위라고 불리던 것을 70년대 개간 붐이 한창이던 시절 가막리로 돌아가는 물길을 폭파해 경작지를 만들면서 폭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보상도 끝나고 용담댐이 담수가 될 예정이니 지금이라도 전 날의 그 물길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죽도에 자리 잡은 물도리동을 역사와 문화 그리고 지리교육의 산 현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이 곳 금강의 물줄기는 지리적으로 볼 때 전형적인 감입곡류嵌入曲流로 영월의 동강이나 서강처럼 아름답기 이를 데 없지만 용담댐이 들어서면서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도난당했다가 되찾아 온 용바위 근처에서 우리들은 신 김소월의 시 한편을 노래로 부른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 뜰에는 반짝이는 금 모랫빛 / 뒷문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그래 삼십여 년 전만 해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어름치 뿐만 아니라 수달까지도 살았다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으니, 우리들은 추억 속에서만 강변에 살아야 하고 이 노래 부르던 강변은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말 것인가.
사마광은 일찍이 <공여일록>에서 “풀이 걸음을 방해하거든 깎고/나무가 관을 방해하거든 자르라/ 기타 다른 일은 모두 자연에 맡겨야 하니/천지 사이에 서로 함께 하는 것이다/만물로 하여금 제각기 그 삶을 완수하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을 생각하며 MBC 취재진과 작별하고 무거운 발길을 옮긴다. 강물 소리에 취해서 발길을 옮기자 어느새 수동마을은 사라지고 이설도로가 나타난다. 이용엽 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설도로가 45.6km에 이르기 때문에 진안군에서는 종주 마라톤 코스(42.195km)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광장에 올라서면 용담댐은 공룡처럼 큰 형체를 드러내고 언제쯤 이 건물들이 완성되고 저 깊은 금강이 용담댐이라는 이름으로 물이 가득 채워질까? 고대인들은 “자연을 따르고 자연의 이치에 맞게 행동하라”고 말하였고 노자는 “만물은 자연스레 생성한다.”하였다. 또한 공자는 흘러가는 물을 바로보며 “물이여! 물이여!”하고 감탄하였다. 맹자의 제자인 서벽이 “공자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물을 찬양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이 때 맹자는 “근원이 풍부한 물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 나와서 멀리 바다로 들어간다. 그러나 근원이 없는 작은 도랑 같은 것은 7,8월에 큰비가 내리면 넘쳐흐르다가도 비만 그치면 곧 말라 버린다. 그것은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그 물의 근원이 풍부한 점을 취한 것이다. 물의 근원이 풍부해야만 그 물이 마르는 일없이 언제나 흐를 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에 있어서도 그 근본이 확립되어야만 공용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실속 없는 명성은 실로 부끄러운 것이다. 근원이 없는 물처럼 곧 진상이 드러나게 마련이다.”라고 말하였고 생태학자들은 조그만 하천에다 보를 막는 것조차도 자연에 대한 인간의 간섭이기 때문에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는 영화제목만으로 남아있고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과는 정반대로 높은 곳으로만 치닫고 있으니...
용담댐은 일제 때부터
용담댐이 처음 계획되었던 것은 1930년대 일제에 의해서였다. 한반도의 영구침탈을 위해 36년부터 6개년 사업으로 실시했던 조사사업 결과 선정된 154개소 조선수력발전지점망 속에 용담댐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그 뒤 1945년까지 측량을 완료하였고 수몰지역내의 용지 매수까지 완료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패망하자 용담댐은 공사가 중단되었고 1950년에 용지 매수했던 토지는 무상 반환되었다. 66년에 건설부에서 용담댐일대를 재조사하여 수몰지역민의 이주대책까지 세웠지만 계획으로만 그쳤으며 국토종합개발 계획 중 4대강 유역 종합개발에서도 용담댐은 제외되고 대청댐만 건설되었다.
용담댐 건설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서해안 개발이 본격화된 80년대 중반부터였다. 88년 8월에 전주권 2단계 지역개발사업 타당성 조사가 실시되었고 90년 12월에는 실시 설계에 들어갔다.“신정일의 <섬진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
'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 신정일 대표님 자료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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